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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땅콩 Feb 09. 2022

18세기 초반 영국으로 떠나기 딱좋은 <걸리버 여행기>

과학혁명시대를 지켜본 조너선 스위프트의 말년작

이제 영국산업혁명, 프랑스시민혁명 100여전으로 거슬러올라갑니다. 소인국과 거인국을 여행한 이야기로 유명한 조너선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더스토리,2020)입니다. 시중에 완역본이 여러권있어서 어떤걸 고를까 고민을 많이 했는데 지난번 읽은 <에마>를 번역했던 류경희 역자라서 더스토리의 책으로 골랐습니다. 제가 에마를 정말 즐겁게 읽을 수 있었던데는 번역의 몫이 컸다고 생각했고요, 스위프트의 풍자가 돋보이는 소설이라 역자의 주석에서 풍자포인트를 얻을 수 있어서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데이비드 우튼이 쓴 <과학이라는 발명>이라는 책에 '조너선 스위프트'가 언급됩니다. 


스위프트는 엄청난 독서광이자 당시 영국 식자층중에서도 뛰어난 과학서적 탐독자였던거죠. 

구텐베르크의 인쇄기 발명(1440년경)은 독일에서 마틴루터의 종교개혁(1521년)에 기여했고 그 후 100년에 걸쳐 서적출판이 대중화되면서 스위프트가 방대한 양의 도서를 소장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됩니다. 뉴턴의 <프린키피아>(1687년)와 더불어 영국의 왕립학회에서 다양한 연구를 후원하고 진행하면서 영국에 과학분야가 성과를 내던 시기가 17세기부터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과학이라는 발명>의 저자는 1600년과 1733년경 사이를 과학혁명이 일어난 시기였다고 말합니다.그 사이에 '마술은 과학으로, 신화는 사실로, 고대 그리스의 철학과 과학은 우리의 철학과 과학으로 인식될 만한 무언가로 대체되었다'고 하면서 이 시기의 변혁은 느리게 진행되었지만 이 '변혁의 130'년이 다음 100년(산업혁명, 프랑스혁명)급변의 추동이 되었다고 해요.


이런 변혁은 다른 나라보다 영국이 훨씬 앞서 있었고 그 무대를 지켜보고 겪은 스위프트가 생애 말년인 1726년에 <걸리버여행기>를 썼습니다. 그러니 저에게는 릴리펏이 아니라 18세기 초반 영국으로 여행하기 딱 좋은 책입니다.


01. 릴리펏(소인국)여행기

걸리버의 첫여행지는 소인국의 나라 릴리펏입니다. 릴리펏으로 표류한 걸리버가 군대에게 포로로 잡혀 몸에 지닌 물건들을 내놓는 장면이 재미있습니다. 다른 물건은 다 내줘도 망원경과 안경은 안주머니 깊숙히 넣어두고 내주지 않지요.


걸리버가 몸에 소장하는 물건들을 보자면 갈릴레이의 발견들(1610년 목성의 위성발견)은 망원경발명 덕분이었고,  소지한 총과 나침반은 콜럼버스의 신대륙발견(1492년)과 식민지개척에 기여했지요.  당시 최고의 발명품이었던 망원경을 릴리펏에서 걸리버는 이웃나라를 엿볼때 쓰고, 안경은 쏟아지는 화살이 눈에 들어갈까봐 쓰게되는 발명품들의 쓸모없을을 풍자하는 상황이 자연스럽게 그려냅니다. 


스위프트는 릴리펏이라는 소인국을 통해 당파로 인해 좌지우지되는 영국정치를 비판하고 달걀의 넓은쪽을 깨뜨리든 좁은쪽을 깨뜨리든 어차피 시민의 알맹이를 빨아먹는 가톨릭교도와 개신교도를 풍자합니다. 옆나라 프랑스를 블레퓌스크로 비유해서 영국의 답답한 외교정치를 비교하기도 하고 교육부터 법률까지 광범위하게 비판하면서 자신만의 의견을 제시합니다. 스위프트가 문학적 장치를 활용하여 대중에게 자신의 메세지를 어떻게 전달하고 인간과 정부의 변화를 이끌어낼수 있을까 고심을 한 흔적이 여실히 보입니다.


02. 브롭딩낵(거인국) 여행기

소인국 릴리펏을 떠나 이젠 거인국 브롭딩낵으로 갑니다. 사람들을 내려다볼땐 몰랐던 것을 이젠 자신이 소인이 되어 올려다보는것이죠. 소인국 릴리펏에서는 자신이 신이 된 것처럼 선의를 베풀고 꽤나 말도 많았던 걸로 아는데 브롭딩낵에 가니 걸리버는 모든것들의 크기에 압도당하고 거대한 인간이 징그럽게 보입니다. 



작다는 것, 그것이 어떤 느낌일지 특히나 인간종에서는 나름 큰쪽에 속하는 성인 남성이었으니까 큰것은 익숙할 지 몰라도 자신이 아주 작다는 것에 굴욕감이 더 크겠지요.


많은 시간 브롭딩낵 국왕과 여러가지 문제에 대해 토론하며 걸리버는 자신의 조국인 영국의 계급이나 관료, 성직자 등 자격에 대한 논쟁과 정치사를 풀어냅니다.  비판의식이 없던 걸리버에게 인간과 정치에 대해 혐오를 느끼며 새롭게 눈을 뜨는 여행지이기도 합니다. 조국을 멋지게 포장했지만 브롭딩낵국왕에게  "너희 나라 사람들은 자연이 이 세상을 기어다니게 허락해준 벌레들 중에서 가장 악독한 해충들이다"라고 악평을 듣고 말죠. 



03. 라퓨타, 바니발비, 라가도(대학술원), 그럽덥드립, 럭낵, 일본여행기


<천공의 섬 라퓨타>의 모티브가 된 <걸리버여행기>의 라퓨타

선장이 되어 상선을 끌게 된 걸리버는 라퓨타와 라퓨타가 다스리는 곳으로 우연히 닿게 됩니다.

스위프트가 종종 조지1세(1714-1727재위기간)를 풍자하더라구요. 라퓨타에서도 마찬가지구요.


(p.283) "이 왕은 전임 왕들보다 이방인을 더욱 후하게 대접하는 것으로 유명하다."라고 괄호안에 있던데 뭔가 뼈있는 말 같아서 찾아보니 외국인 왕이더라구요. 


영국 왕정은 가톨릭교가 아닌 개신교도 왕족후손을 찾다보니 영어도 할줄 모르는 이웃왕국 하노버의 군주를 데려다가 왕위에 올려놨어요. 

다행히 프랑스가 제 2외국어였던 유럽이라 의사소통은 가능했지만 정치는 전부 의회에 위임하게 되고 이때부터 의원내각제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고 해요. 

* 이 왕은 음악과 과학의 후원자였지만, 사실은 양 분야에 대해 무식했던 조지1세를 풍자한다(p.281 역자주석)


라퓨타는 뛰어난 수학자와 과학자들이 나라통치를 위해 고안해낸 떠있는 섬입니다. 자석의 원리를 이용하여 신의 위치로 자신들을 격상시켜려고 했던 고위층들의 허영과 권력욕이 가득한 고약한 섬이죠. 

철학과 수학과 과학에 빠져있는 라퓨타에 사는 고위직들을 삽화에서 보시다시피 아주 우스꽝스럽게 풍자합니다. 당시 유행처럼 번지던 이런 학문들에 스위프트가 어떤 시선을 가지고 있는지 가늠할 수 있습니다.

이 여행지에서는 과학을 신봉하고 인간이성을 중심으로 신의 영역에 도전하는 인간의 오만과 뿌리가 깊은 위선의 정치사를 고발합니다. 바니발비에서는 전통적인 방식을 고수해서 사는 귀족을 만나기도 하고 대학술원이 자리한 라가도에 이르러서는 괴상망측한 연구에 몰입한 과학자들을 만나기도 합니다. 마술사의 섬에 들러 지난 100년의 역사속 인물들을 소환한 걸리버는 정치에 환멸을 느끼게 됩니다. 



04. 마지막 여행지, 휘넘국(마인국)


'휘넘'은 이성을 지니면서 야후를 다스리는 말의 존재를 가리키고 '야후'는 그들의 지배를 받으면서 야만적으로 사는 덜 진화한 인간무리를 이르는 말입니다. 걸리버가 그런 나라에 도착해서 뒤바뀐 처지 자신이 그런 야후들과 같은 종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겠죠. 탐욕, 자만, 범죄, 악이라는 단어가 존재하지 않는 휘넘들의 세계, 그 세계에서 걸리버는 이성과 도덕에 대한 예찬과 더불어 인간혐오가 최고조에 달합니다. 


이 장에서는 본격적인 인간 본성에 대한 걸리버의 성찰이 시작되면서 인류의 '이성'에 대해 
철학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동양철학에서 찾자면 인간은 태어날때부터 악하다 - 걸리버는 성악설에 가까운 결론을 내립니다.  휘넘과 야후들 사이에서 자신의 이성이 어디에 더 가까운가 고뇌했을때 걸리버는 인간이성에 절망하고 자신만은 본성을 이겨내는 휘넘이 되고자 했지만 결국 나라밖으로 쫒겨나지요.


걸리버는 서문형식을 빌어 인간(야후)의 대해 '개선되는 일이 철저하게 불가능한 동물 족속'이라는 불신감을 감추지 않습니다. 이런 걸리버를 작중 인물로 내세우지만 스위프트는 인간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릴리펏의 소인들에게 받았던 선의나 여행지에서 돌아올때마다 도움을 주었던 선장들, 휘넘처럼 되고자했던 걸리버의 소망들은 아직 한 개인에게 살아있습니다. 우리가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영역이란것이 겨우 우리 주변이웃일 수 밖에 없으니까요.


(p.543)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작중 주인공인 걸리버의 최종적인 인류 혐오주의는, 저자인 스위프트를 세상에 대한 '환멸감에 빠진 냉소적인 인류 혐오주의자 염세주의자'로 비난받고 오해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걸리버는 어디까지나 저자 스위프트가 조종하는 작중 화자다. (중략) 이것은 셰익스피어 작품에 등장하는 악인들이 모두 셰익스피어와 동일 인물들이라고 말할 수 없고, 라스콜리니코프가 도스토예프스키가 아닌 것과 마찬가지다.


1월부터 고전을 주로 읽고 있는데, 점점 제 자신이 착해지고 있다는 생각은 듭니다. 휘넘들이 말하는 '이성'에 대해 너무 멀리 와버려서 도저히 되돌아갈수 없다고 회의적이었던 제 생각이 조금씩 바뀌고 있는것같아요. 내 주변에 늘 존재하는 사랑의 기운들, 그것들을 발견하면서 울컥 감동하기도 하는 나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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