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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땅콩 Feb 24. 2022

캐서린은 나보다도 더 나 자신이었다, <워더링 하이츠>

에밀리 브론테 <폭풍의 언덕>(문학동네,2011) 1847년 영국문학

오늘날 아침드라마다, 막장이다, 20대 때 읽었을 때는 너무 좋았는데 나이 들어 읽어보니 완전 실망이었다... 고백클럽에서 평이 극명하게 갈려서 걱정 반 기대 반 했는데 저한테는 아주 재미있고 인상깊었습니다.


아마도 캐서린의 이기적인 선택과 히스클리프의 악독한 복수가 그런평을 불러오지 않았나 싶어요. 하지만 기억하실 게 있어요. 텔레비전에 나오는 모든 막장드라마는 100%허구가 아니라는 것. 오히려 작가들은 실제 사건들은 더 요지경인데 순화했다고도 말해요. 인간이 얼마나 끔찍해질수 있는가, 그것은 전적으로 그 곤경이나 환경에 처해지지 않으면 스스로에게 절대 확신할 수 없는 부분입니다. 지금 우리들이 사는 시대는 불과 50년전보다도 '죽음'과 가까이 있지 않잖아요.  


이야기의 시작은 '폭풍의 언덕'이라고 해석되는 캐서린의 본가 워더링 하이츠라는 저택에서 시작됩니다. 록우드라는 신사가 세속을 피하고 싶어 이곳에 잠시 살게 되면서 워더링하이츠에 얽혀 있는 이야기를 하인 넬리의 입을 통해 듣게 됩니다.  


30여년 전 히스클리프라는 '검은 얼굴의 아이'가 들어와 살게 되면서 캐서린과 단짝이 되지요. 워더링하이츠 근방에 '티티새 지나는 농원'으로 번역이 되는 스러시크로스 그래인지에는 에드거 린턴이라는 사내아이가 살고 있구요. 온실처럼 야생과 격리된 스러시크로스 그래인지와 야생의 히스클리프, 그 중간쯤의 캐서린의 정체성이 있어요.  

영화 <폭풍의 언덕>(2011)

 워더링하이츠와 습지에 고립되어 생활하던 어느 날, 캐서린이 우연히 린턴가에 머물면서 영국사회가 만들어놓은 관습에 눈을 뜨게됩니다. 깔끔한 린턴가의 사람들, 드레스, 품위있는 행동...캐서린이 유년시절과 작별하게 되는 시점입니다. 곧 히스클리프와의 단절이지요. 말쑥하고 교양있어 보이는 린턴에게 끌리는 것은 곧 문명사회에 대한 선망이기도 할테구요. 에드거의 청혼을 두고 망설이던 캐서린이 히스클리프를 향한 마음을 깨닫는 이 장면, 저는 이 대사에 소름이 쫙 끼쳤어요.   


내가 그 애를 사랑하는 건 잘생겼기 때문이 아니야, 그 애가 나보다 더 나 자신이기 때문이야. 그 애의 영혼과 내 영혼이 뭘로 만들어졋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같은 걸로 만들어져 있어.  


 

우리안에는 억압받고 소외당하면서 이를 갈던 히스클리프도 있고, 더 나은 문명 생활을 꿈꾸게 해주는 에드거도 있고, 자연과 야생으로 돌아가고도 싶고 끊임없이 갈등하는 캐서린도 있잖아요.


 물론 우리 소설을 읽면서 인간극복의 교훈 같은 걸 바랍니다. 히스클리프에게는 복수가, 복수를 할 수 있는 힘을 키우는 것이 자신이 꿈꾸던 '인간극복'과 교훈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것이 정당하지 않았다는게 문제지만요.


에드거 린턴에게 청혼을 받은 캐서린은 히스클리프와 결혼하면 비천해진다는 내뱉고 우연히 들은 히스클리프는 말없이 워더링하이츠를 떠나버립니다. 그를 기다리다 힘들어하는 캐서린은 결국 에드거와 결혼하고 5년만에 히스클리프 복수의 칼날을 갈고 다시 돌아옵니다. 저도 히스클리프의 복수에 대해서는 변명의 여지를 주기는 싫어요. 하지만 자꾸 그의 처지가 눈에 밟혀서 마음이 안타까워요. 이렇게 치닫는 복수는 오직 히스클리프만의 것인가? 소외시키는 사회인식과 폭력을 일삼았던 구성원들에게는 책임이 없을까?


소설속 화자는 캐서린의 하녀로써 린턴가에 시집간 그녀의 죽음까지 쭉 함께한 하녀 넬리에요. 그녀의 눈에 다시 돌아온  히스클리프는 린턴부부의 평화를 깨뜨린 훼방꾼이었을겁니다. 도덕적으로 용납될 수 없는 주인의 집을 빼앗고 복수심으로 린턴가의 딸의 결혼을 했으니 당시로써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전복의 위협이자 잔인한 행위지요.


(p.171) (...)"저로서는 캐서린의 원칙들을 신뢰하기 힘든 것은 물론이고, 캐서린의 감정들에 공감하기는 더욱 힘들었습니다. 저는 뭔가 사건이 일어나 히스클리프가 폭풍의 언덕과 티티새 지나는 농원에 출입하지 못하게 되기를 기원했습니다. 그가 나타나기 이전으로 돌아가고 싶었지요. 그의 방문은 저에게는 끝나지 않은 악몽이었고, 제가 짐작하기로는 나리(에드거 린턴)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워더링하이츠에서 일했을 때는 히스클리프에게 호의적이었던 넬리가 린턴가에서 일하게 되자 당연히 그들 부부의 평화에 서는게 맞을 거에요. 자신을 사랑하는 에드거에 대한 배신도, 다시 찾아온 히스클리프를 내치지도 못하고 끝내 병들어버린 캐서린을 이해못하는 넬리와 달리 저는 그녀가 이기적이기보다 인간적으로 보였어요. 어떻게 모든 감정들이 도덕적으로 환원될 수 있나요? 그랬다면 젊은 베르테르가 자살 할 이유도 없었겠지요.  


(p.200) "그렇지만 상상해봐, 열두 살 때 폭풍의 언덕에서 나가야 했다면, 갖고 있던 모든 것을 잃고 살던 곳을 떠나야 했다면, 옛날 히스클리프 같은 신세였다면, 그러다가 순식간에 린턴 부인이 되어버렸다면, 티티새 지나는 농원의 마나님이 되어버렸다면, 모르는 사람의 아내가 되어버렸다면, 내가 살던 세계에서 추방당해 낯선 세계에서 이방인이 되어버렸다면, 그랬다면 어땠을까. 그렇게 상상해본다면 너도 내가 느낀 아득한 절망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거야! 넬리 너는 지금 너랑 상관없는 일이라는 듯이 고개를 내젓지만, 내가 병이 난 데는 네 책임도 있어!"


1부에서 히스클리프의 언어를 가진 캐서린이 죽자 히스클리프는 복수심으로 가득한 악마로 회자되요. 캐서린이 낳은 딸, 자신의 아들, 자신을 억압하던 힌들리의 아들에게 철저히 복수하려는 계획들을 실행해 나가지만 결국 허망함에 무릎을 꿇고 맙니다.

지금이 바로 그들의 자손에게 복수할 때인데....
나에게 힘이 있고 나를 막는 건 아무것도 없는데.....
하지만 이게 다 무슨 소용이야? 나는 복수할 마음이 없어.
(중략) 나는 이제 그들을 파멸시키는 데서 즐거움을 못 느끼게 되어버렸는데,
즐겁지도 않은 일을 하기에는 내가 너무 게으르지.


저자 에밀리브론테는 <폭풍의 언덕>을 발표 1년 뒤 병들어 서른살의 나이로 죽음에 이릅니다. 그의 작품은 출간당시 동생이 쓴 <제인 에어>에 미치지 못할정도로 혹평을 받다가 현대에 이르러 재평가되어 영국3대 비극중 한 편으로 오를만큼 호평을 받게 됩니다. 캐서린의 사랑도 히스클리프의 사랑도 이루어지지 않고 워더링하이츠를 비극으로 몰고 간 에밀리지만 저는 마지막까지 그가 놓지 않았던 어떤 희망을 봅니다. 그녀는 미화하지도 섣불리 판타지를 선물하지도 않아요. 저한테는 너무 리얼한 소설, 모든 인물과 사건들이 치밀하게 현실적이다라는 생각을 지울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누군가와 함께 살고 이 사회안에서 살아가는 한 누군가에게 영향을 끼치고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온갖 다양성을 표현하고 살고 있지만 캐서린이 보았던 '나 자신보다 더 나 자신'인 사람속에 내재된 인간은 호모사피엔스라는 한 종입니다.

인간이 지키고자 했던 고유의 가치, 그것들이 문명과 계급과 위선속에 가려지더라도 고전이라 불리는 문학속에는 살아있으니 고전을 읽고 있나 봅니다. 서른해를 자매들과 책을 읽고 시와 글을 쓰며 살다간 이 여성작가의 소설을 21세기에 이렇게 훌륭한 번역으로 만날 수 있어서 참 다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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