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땅콩 Mar 21. 2022

언어를 가진 자만이 '잃어버린 시간'을 찾을 수 있다

마르셀 푸르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2>(민음사,2012)

마들렌을 한 입 베어먹고 유년시절의 어떤 장소와 더불어 그 사람들의 면면 눈앞에 펼쳐지면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가는 대장정을 그린 소설로, 너무 유명한 마르셀 프루스트의 소설이죠. 제가 다니는 책방에서 이 책으로 낭독모임을 하고 있다고 해요. 혼자 읽기는 힘들기도 하고 프루스트만의 필체가 확실하기 때문에 소리내어 읽으면 더 좋기도 하고요, 함께 읽어야 집중도 더 잘되니까요. 특히 모든 문장들이 다 좋아서 누군가와 함께 공유하면서 함께 탄성을 지르면서 읽어야 제맛이라고 하더라구요.


1권, 2권을 완독하고 소감부터 말하자면 나를 더 숙성시키고 읽어야 더 잘 읽을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일단은 유럽 20세기 초에 집필된 소설이니 19세기까지의 유럽과 프랑스의 역사를 알고 있어야 함은 물론이며 화자가 언어학과 문학, 음악, 미술까지 미학적으로 접근한 문장들과 예술가와 작품언급이 잦기에 저자가 표현하는 것을 역자의 주석으로 채우기엔 한계가 있지요. 갈증이 더 심해질 뿐입니다. 성급히 완독하겠다고 욕심을 내면 잔가지를 놓치고 큰 줄기만 보게 되는데요, 그러기엔 프루스트의 글이 너무너무 매력적입니다.


그래픽노블로 나온 스테판 외에가 각색 및 그린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1> 콩브레를 회상하는 장면

1권의 주요무대인 콩브레마을의 풍경 하나하나를 세련되묘사하고, 한 사람사람에 대한 성격와 관계묘사도 아주 탁월합니다. 그 사이사이에 저자가 풀어놓는 사유들이 얼마나 주옥같은지 한번 빠져들면 헤어나올 수 없을 정도지요.

100년전의 프랑스가 잘 그려지지 않는 사람이라면 그래픽노블로 나온 이 책도 같이 보면 좋습니다. 원작을 다  담아내기에는 제한적이지만 주요한 장면들을 그림으로 만날 수 있지요.


(p.170) "예전에 읽었을 때 내가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이미 내 기쁨의 원인이었던 드문 표현에 대한 동일한 취향, 동일한 음악적인 유출, 동일한 관념론적인 철학을 인식하면서, 나는 내 사유의 표면에 전적으로 단조로운 형상을 그려 보이는 베르고트의 어느 특정 문단과 마주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베르고트의 모든 저술에 공통되는 그의 관념적인 단락을 대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으며, 모든 유사한 구절들이 그 단락과 혼동되면서 일종의 두께와 부피를 갖춰 내 인식이 확대되어 가는 듯한 느낌이었다."

 - 이부분은 작가 베르고트가 자신에게 미친 영향에 대한 사유인데, 제가 요즘 문학을 읽으며 느꼈던 모든 것들이 그 페이지안에 전부 있어서 얼마나 전율 했는지 모릅니다. 이것이 '언어를 가졌다'라는 것이구나 처음으로 좌절감을 느꼈습니다. 내가 마흔이 다 되어 언어학과 문학, 철학, 과학을 배우고 있지만 죽기전까지 내 언어가 될 수 있을까?라는 현타가 왔어요. 프루스트를 키운 프랑스라는 나라의 미학적 토대, 그에게 영향을 미친 역사적인 인물들과 유럽전체에 아무렇게나 널려있는 예술과 철학들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원작자라고 생각합니다. 문학이 도달 할 수 있는 최고 경지의 수준으로 일컬어지는 이 소설을 프랑스어로 읽지 못한다는 것이 아쉽지요. 시몬 드 보부아르가 넘 부러웠습니다.


2권을 읽을 때 참고하면 좋을 파리지도, 현재의 파리 구역은 1860년대 이후 나폴레옹 3세때 대대적으로 정비하고 나눈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민음사,2012) 1권은 콩브레라는 마을에서 보낸 자신의 유년시절, 가족들과 주변 사람들을 화자가 과거를 재해석하는 부분인 1부 콩브레와 2부 스완네 집쪽과 게르망트 저택으로 이어지는 두 산책길에 대한 자연묘사가 절정을 이룹니다. 장소에 대한 미학적 취향이 확실했던 프루스트는 2권 말미에 나오는 상젤리제 거리와 파리16구역, 서쪽으로 블로뉴숲 묘사에 많은 부분을 할애합니다. 저자는 산업혁명이 바꾸어놓은 파리의 거리와 사람들 모습을 안타깝게 바라보고 과거를 더이상 재현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파리에 대해 저처럼 문외한이신분들은 이렇게 지리적 감각을 익혀놓아도 좋을 것 같아요.


  소설의 큰 줄기는 자신의 이웃아저씨였던 스완의 사랑과 자신의 정념에 관한 이야기로 큰 줄기를 뻗어 나갑니다. 미학적 취향이 남달랐던 스완이 화류계 여성인 오데트에게 반하게 된 순간도 뱅퇴유의 음악과 예술조각과 회화작품의 판타지가 덧씌워져 있습니다. 이런 마당에 글쓰기의 매력을 모르는 사람, 예술가들에 대한 기본배경이 없는 사람, 연주를 들으며 쾌락을 느껴본 적이 없는 사람은 프루스트의 디테일한 감정묘사에 공감하기 힘들것입니다.


  저는 몇 년 전에서야 그런 기쁨에 눈을 떴기에 그의 한구절 한구절에 공감했지만 적응하는데는 오래 걸렸습니다.

문장이 너무 길고 어떤 순간에 대한 묘사가 지나치게 자세하고 찰나의 감정도 놓치지 않고 모두 글에 담으려 애쓴 글이기에 그 앞에서 무장해제되버리고 맙니다. 그 감정선을 따라가지 못하면 졸리게 되지요. 읽는 이의 섬세한 감각도 필요한 책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의 문장에 위로를 받고, 그들의 사랑을 지켜보는 자로써 안타까워하면서 그들의 추악한 본성에서 내 자신을 발견하고 뜨끔하는 것이지요. 가 2권에 남긴 미학에 대한 정의입니다.

(p.278)
어쩌면 허무가 진실이며, 우리 모든 꿈은 존재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다면, 우리 꿈에 비해 존재하는 이런 악절이나 개념 들도 아무것도 아니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죽어 갈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겐 우리 운명을 뒤따를 이 성스러운 포로들이 볼모로 있다. 그래서 이 포로들과 함께라면 죽음도 덜 비참하고, 덜 치욕스럽고, 어쩌면 덜 가능해지리라.


우리는 무엇인가 지키고 싶고 남기고 싶은게 있어서 글을 쓰고 사진을 찍지요.  음악으로, 그림으로, 조각으로, 언어학적인 측면에서 철학적으로 내 안에 축적된 인간정신의 언어를 누군가에게 전달 할 수 있다면 정말로 죽음도 두렵지 않을 것 같아요. 그것이 인간이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기쁨이 아닐까 합니다. 저도 제 남은 생애 이 포로들을 볼모로 데리고 있으려고 해요. 제 잃어버린 시간을 찾을때까지 그 언어를 익혀보려 합니다. 그러려면 이웃들도 함께 잘 살아야 하고, 나라도 튼튼해야 합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결코 프루스트 혼자서 이룬 소설이 아닌것처럼요. 할 일이 참 많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러시아의 작가는 모두 고골의 <외투>에서 나왔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