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땅콩 Apr 19. 2022

안나 카레니나가 만들 수 있는 가정은 없다

톨스토이 <안나 카레니나>(문학동네,2010)

소설은 돌리 남편의 불륜이 발칵되는 장면부터 시작합니다. 드라마처럼 도입부터 확 끌기 때문에 읽기에는 어렵지 않아요. 자유주의자 귀족인 오블론스키는 아내 돌리와 화해하기 위해 돌리의 절친이자 자신의 여동생인 안나 모스크바로 초대합니다. 야기는 돌리부부가 사는 모스크바, 안나 부부가 머무는  페테르부르크, 레빈이 지주로 있는 농장을 오가며 펼쳐집니다. 


2012년에 키이나 나이틀리와 주드로가 부부로 나오며 영화화되기도 했는데 아무래도 디테일이 떨어지는 건 사실입니다. 당시 러시아의 시대배경을 완벽하게 구현해내기 힘들었을 테구요. 다양한 무대장치를 써서 나름 역동적이면서 감정을 잘 살렸기에 책을 읽은 다음 보는 것을 추천합니다.


#시대배경

고골의 <뻬제르부르그 이야기>에서 러시아에 좀 적응이 되었다면 러시아 1870쯤의 시대도 어렵지 않게 가늠이 될 거에요. 이 시기는 알렉산드르 2세가 통중이고 그는 자유주의를 억압하지 않으면서 많은 부분 개혁을 단행한 군주입니다. 농노제를 폐지하고, 지방자치의회를 개설하는데 키티를 연모하는 오블론스키의 친구 레빈이 의회활동을 하기도 하죠. 안나가 반해버린 젊은 청년 브론스키는 군인입니다. 당시 알렉산드르2세는 사법제도 정비와 함께 징병제도도 개혁합니다. 안나의 남편은 이런 사법제도 추진에 힘을 쓰는 페테르부르크의 고위 관료죠.  

영화 <안나 카레니나>(2012)에서 오블론스키(스티바)와 레빈의 만남

톨스토이가 귀족출신이기에 귀족 지주나 상류사회에 대한 성찰이 남다릅니다. 러시아는 중산층이 거의 없을 정도로 대다수의 농민이 노동력을 제공하고 소수의 귀족들이 정치를 이끌어갑니다. 그 귀족들은 프랑스문화를 좋아하고 영국의 제도를 답습해서 개혁을 하려하지만 그들과는 다른 특질을 가진 러시아에 이식이 잘 되지 않죠. 급기야 1881년 사회혁명당의 테러로 알렉산드르2세의 개혁정치는 끝나고 니콜라이2세의 자유주의를 탄압하는 시대로 나아갑니다. 소설은 그 직전 여러 제도와 정책들이 자유롭게 개진되고 실험되는 시기로 보입니다.  


#(결혼한)여성들의 서사

 당시 러시아에도 여성해방의 바람이 조금씩 불어오고 있다고는 하지만 결혼한 여성에 대한 불공평한 제도들 때문에 많이 답답했네요. 작중 귀족 남성들이 여성의 교육받을 권리에 대해 나눈 이야기에서 그 당시 여론이 생생하게 전해져옵니다. 여성교육 옹호론을 펴는 페스초프에게 딸을 셋이나 둔 노공작(돌리와 키티의 아버지)은 그 의견을 대놓고 조롱합니다. 결혼을 안하고 자기 일을 가진 직업여성(발레리나)을 언급하며 페스초프의 발언을 지지하는 오블론스키를 보고 그의 부인 돌리까지 토론에 끼어들며 한마디합니다. 성의 역할을 '가족'과 '돌봄'에 한정하는 인식이 적나라하게 보여지는 대목이죠.

(p.730)“그렇지만 그런 처녀의 이력을 잘 조사해본다면, 그 처녀는 여자로서의 일을 찾아낼 수 있는 자기 가족이라든가 언니나 동생의 가족을 저버렸음을 발견하게 될 겁니다." 다리야 알렉산드로브나가 잔뜩 토라져서 불쑥 대화에 끼어들며 말했다. 아마도 스테판 아르카디치가 어떤 처녀를 염두에 두고 있는지 짐작한 듯했다.
'규칙'을 어긴 죄로 사교계 왕따가 되는 안나, 극장에서 모욕을 당하는 장면

특히 명민하고 매력이 넘쳤던 안나가 허락되지 않은 결혼 때문에 아들과 헤어지고 친구들과도 멀어졌으며 아무리 열심히 공부해도 받아주는 공동체가 없어서 망가지는 모습을 볼 때 너무 안타까웠습니다. 반면 돌리는 바람을 피우고 밖으로만 나돌며 가정경제를 돌보지 않는 자유주의자 남편에 벗어나기 보다 아이들을 챙기며 제 앞의 현실을 받아들이고 꾸려나갑니다. 두 여성보다 한참 어린 이제야 막 결혼시장에 뛰어든 돌리의 여동생 키티는 레빈의 청혼을 거절한적이 있지만 자기기만과 위선을 깨닫고 점점 알을 깨고 나오기 시작하지요. 리는 제 과거와 아주 많이 닮았고 키티는 현재, 안나는 제 내면과 많이 닿아있어요. 당시의 어떤 여성이 읽어도 다 공감했을 이야기란 거죠. 리얼리즘을 살리면서 전 세대, 젠더를 아울렀기에 잡지 연재로 이어나가기 좋았다고 생각합니다. 톨스토이가 연재하며 매 회마다 독자들을 사로잡으려면 사회적인 메세지와 함께 극적인 스토리가 꼭 필요한 법이니까요. 이 밖에도 책 두께만큼이나 다양한 그 시대의 여성들이 담겨있으니 그 재미를 느껴보셨음 합니다.

기차역에서의 안나, 안나를 이해했던 돌리

# 마음은 농민공동체에, 몸은 귀족공동체에

제가 농사꾼의 딸이고 벼농사체제의 공동체에서 벗어나 지금은 도시사회에 적응해서 살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레빈의 시선과 맞닿는 부분이 많았습니다. 레빈은 지방에서 농장을 거느린 자유파 지주귀족입니다. 이복형 세르게이 이바노비치는 모스크바에 살고 있는 지식인으로 휴가차 레빈의 집에 머뭅니다. 그와 얘기하면서 레빈은 본성이 아니라 이성에 기반한 사고를 하고 인류애를 피력하는 세르게이 이바노비치(이복형)에게 반박하기 어려운 무력감을 느끼지만 동시에 이질감을 느끼고 부자연스러움을 느끼지요.

(p.454) 이처럼 형에 대한 이해가 깊어짐에 따라 그는 세르게이 이바노비치를 비롯해서 만인의 행복을 위해 일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마음이나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으로 인도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는 것이 좋은 일임을 이성으로 판단하고, 그 판단 하나로 얽매여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한층 더 분명히 깨닫게 되었다. 이러한 고찰에서 레빈의 깨달음을 더욱 확고히 한 것은, 그의 형이 만인의 행복이니 영혼의 불멸이니 하는 문제를 사고하는 태도가 장기의 승부라든가 새로운 기계의 치밀한 구조를 연구할 때와 조금도 다름이 없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데 있었다.
키티와 레빈이 알파벳블록을 이용해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는 장면

레빈은 단순한 육체노동에 지나지 않은 풀베기를 농민들과 함께하면서 육체노동의 쾌감과 공동체의 매력을 알게 됩니다. 하지만 이렇게 합심해서 일을 해내는 농민들이 신식방법을 불신하고 좋은 기계들을 다룰 줄 모르는 걸까 답답해하지만 레빈을 답답해하기는 세르게이 이바노비치도 마차가지입니다. 그런 농민들을 교육하는 제도를 만들고 공동체의 성장을 위한 관계시설을 확충하는 제도를 불신하는 것이 레빈이기 때문이죠. 농노 해방과 더불어 제도 개혁까지 함께 박차를 가하자는 형과 부딪히면서 기업처럼 농사를 효율적으로 짓고 싶어하는 것이 자기 모순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거지요.


더군다나 그는 나리, 가족을 이루지 못한 나홀로 사장입니다. 그런 사람이 농사를 좋아하면 좋아할수록 딜레마에 빠질수 밖에 없어요. 그런데 그는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상류(?)문화를 향유하는 키티네 가족을 동경하고 키티를 좋아합니다. 귀족들의 문화 동경하면서 소박한 농부의 꿈을 꾼다? 자기 기만일 수 밖에 없지요. 레빈은 열심히 관련 서적을 탐독해 그가 체험했던 농촌공동체를 파괴하지 않으면서 현재의 상황을 개선시킬 러시아에 맞는 지주형 농사노동형태에 대해 공부하기 시작합니다.


# 총3권, 합본으로는 1500페이지

어떤 이야기든 길게 만난다는 것이 이 책을 통해 무엇인지 알겠어요. 가정마다의 사정들, 결혼 전과 후의 달라지는 것들 다양한 인물군상과 그밖에 많은 부분에서 삶을 아우르는 어떤 잔잔하면서 찡한 어떤것들이 긴 숨으로 쓴 톨스토이의 글에서 발견됩니다. 어떤 한문장을 가져와 맥락없이 여기에 옮기는 것이 이 책을 읽으면서는 부질없다는 생각을 합니다.

이 두꺼운 책은 시간의 스펙트럼보다 다양한 인물들과 장소의 스펙트럼이 넓은 소설입니다. 안나의 사랑이 시작되고 끝나는 약 몇 년동안 부부생활부터 정치, 사회, 당시의 어지럽게 개혁되고 있던 귀족사회와 농장의 시간을 아주 밀도있게 구성했기에 힘들이지 않고 읽힙니다.  


#안나 카레니나라는 가정

어떤 가정은 파경을 맞고, 어떤 가정은 근근히 그 끈을 부여잡고, 어떤 가정은 새로 만들어집니다. 오직 허락되지 않은 가정을 선택한 안나만이 끔찍한 결말을 맞게 되지요. 이것은 주류 공동체가 내린 사형선고입니다.  안나의 모험으로 그것의 실체는 명백해졌습니다. 안나의 힘으로는 옛가정을 벗어날 수도 새 가정을 꾸릴수도 없었습니다.  만약 제도로 묶이지 않아도 괜찮다고 당당했던 사람이 안나가 아니라 브론스키였다면 결말은 달라졌겠지요. 법은 결국 가진자들이 갖고 있는 것을 놓치지 않기 위해 만들어진 것입니다. 아마 허락되지 않은 가정이 많을수록 주류가 이득을 보게 된다면 법은 아주 쉽게 얼굴빛을 바꾸겠죠. 톨스토이가 레빈을 통해 가진자들의 위선을 각 인물들에게서 보여주려 한 이유가 거기 있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이것은 가정이 아니었다. 그녀는 지금 자기에게 인생의 의미와 인간들간의 관계를 드러내준 그 선명한 빛 속에서 분명하게 그 사실을 본 것이었다.(p.1416)






매거진의 이전글 엄마, 엄마 가슴에 이 '주홍글자'는 뭐예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