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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땅콩 Apr 03. 2022

엄마, 엄마 가슴에 이 '주홍글자'는 뭐예요?

어머니가 되어 읽는 너새니얼 호손<주홍글자>(민음사,2007)

에드거 앨런 포 시와 수많은 단편을 미국문학의 선두에 남겼다면 너새니얼 호손은 <주홍글자>로 문학다운 문학작품을 내놓았다는 평을 받고 있죠. 학교 다닐 때 <큰바위 얼굴>이라는 단편으로 만난적이 있지만 장편은 처음입니다.


호손은 미국 이주 4세대쯤 됩니다. 독실한 청교도 집안에서 태어나 뉴잉글랜드 주의 전통이 된 종교의 역사를 깊히 탐구하여 여러 저작을 펴냅니다. <주홍글자>의 시대배경은 17세기 중반, 미국  2세대가 가족을 이루던 시기, 아직 영국 식민지였을때 청교도적인 교리가 뿌리 깊었던 뉴잉글랜드 주의 한 마을입니다.  호손은 19세기에 살면서 2세기나 거슬러 시대물을 쓴 것이죠. 2022년의 제가 조선시대 이야기를 쓴다면 비슷한 시대간격이겠네요.

이야기의 시작은 간통을 저지른 헤스터가 가슴에 주홍글자 'A'를 달고 마을 사람들에게 모욕을 당하기 위해 감옥문에서 나오는 순간에서 시작합니다.

새 식민지를 건설한 사람들은 처음에는 인간의 덕성과 행복에 찬 어떤 유토피아를 꿈꾸었는지 몰라도 으레 처녀지의 일부를 묘지로, 또 다른 일부를 감옥터로 떼어 두는 것이 실제적으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주가 한창이면서 새 삶터를 정착시키던 영 식민지 시절로 돌아간 것 같은 현장감이 좋네요. 묘지와 감옥. 이 두 단어가 종종 언급되던데 새로운 공동체에서 어떤 덕목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는지, 종교가 어떤 장치로 사용되는지 문장으로 잘 표현됐네요.


헤스터 프린은 남편의 오랜 부재로 간음을 저질러 다른 남자의 아이를 낳게 되면서 부정을 들키고 맙니다. 'Adultery(간통)'의 머릿 글자인 'A'를 옷에 부착한 채로 살아야 하는 벌을 받게 되지요. 미국으로 돌아온 헤스터의 남편은 제 부인이 광장에서 치욕을 받고 있는 장면을 보고도 체면이 구겨질까 모른체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로저 칠링워스라는 의사그녀 주변을 떠나지 않습니다. 헤스터의 애인이었던 젊은 목사 아서 딤스데일도 모든 망신을 헤스터에게 내맡긴 죄책감을 신앙삼아 더 독실한 청교도목사로 거듭나지요.  

헤스터 프린은 주홍글자를 달고 다니면서 사람들이 주홍글자를 바라보면서 들키는 어떤 욕망을 눈치챕니다.  

(p.62 "...이따금씩 헤스터는 주홍 글자 덕분에 새로운 감각을 부여 받았다고 느끼거나 그렇게 생각할 때가 있었다.(중략) 그 때문에 다른 사람의 가슴속에 숨어 있는 죄를 공감적으로 알게 되었다고 생각하자 온몸에 전율을 느끼면서도 그것을 믿지 않을 수도 없었다. (중략) 그런데 이 악령은 자기 손아귀에 아직 절반밖에 끌어넣지 못한 이 몸부림치는 여인에게 겉으로 순결한 척하는 것은 한낱 거짓에 지나지 않으며, 이 세상 어디에서나 진실을 볼 수 있다면 헤스터프린의 가슴 말고도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속에도 주홍 글자가 타올라야 한다고 설득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홍글자 낙인을 갖고 사는 여성 헤스에 대한 이야기인것 같지만 실은 주홍글자를 때문에 가족과 사랑을 져버리고 주홍글자의 덫에 걸려 처참한 삶을 살아가는 남편과 목사의 이야기로 읽혔어요. 이야기 구성과 진행은 좋았지만 헤스터 프린이라는 이 여성의 내면을 만나고 온 것 같진 않아요. 오히려 욕망에 충실하고 주홍글자를 화려하게 수놓고 당당하게 마을 사람앞에서 망신을 당했던 헤스터 프린이 주홍글자를 붙이고 펄을 지키기 위해 너무 많은 착함을 애쓰고 산 것이 아닐까. 중반부터는 오히려 헤스터가 흐릿해진것 같아요. 그런 성실함과 선의로 7년여를 봉사하는 삶을 산 헤스터는 마을의 천사(Angel) 되지요. 주홍글자 'A'의 의미를 스스로의 힘으로 변화시키는 데에 성공합니다. 결국 사회관습이나 종교라는 것도 해석하기에 따라 여러가지로 떠돌아다니는 기호에 불과하다는 것을 달아요.


헤스터의 딸 펄에 대해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습니다. 헤스터가 사람들 몰래 숲에서 7년만에 아서 목서와 단둘이 만나는 장면입니다. 남자옆에서 안에 숨겼던 머리카락를 풀어헤치고 주홍글자를 떼 버린채 웃고 있는 어머니를 보고 펄은 당황합니다. 개울을 건너 어머니에게 오지 못하고 화를 내요. 욕망을 억업한 채 주홍글자를 달고 살아온 어머니가 자신의 어머니라는 거죠. 어머니는 머리를 주워담고 주홍글자를 다시 가슴에 붙이자 그제야 안심한 펄은 어머니에게 옵니다.


 아버지란 존재에 대해 알지 못하고 여덟살이 된 펄은 어머니에게 '주홍글자'가 무엇인지 물어도 답을 들을 수 없습니다. 어머니가 주홍글자에 대해 답을 회피할수록 주홍글자는 어머니의 신체일부아요. 우리는 나한테 붙어 있는 팔이 무엇이냐고 묻지 않으니까요. 마치 내가 누구인지 묻지 않는다면 부모에게서 독립된 자아가 될 수 없듯이 독립된 개체는 스스로에 대해 정의해야 자기 자신이 됩니다.


헤스터에게 들러붙은 종교의 도덕은 헤스터인채로 살지 못하게 했어요. 두 남자가 죽고 모녀는 마을을 떠나지만 헤스터는 나중에 혼자 이 마을로 다시 돌아옵니다. 그리고 가슴에 그 주홍글자를 붙이는 삶을 선택합니다.  


여성은 어머니가 되어야 하는 게 아니라 온전한 인간 어른으로서 먼저 존재해야 합니다. 남성도 마찬가지 겠지요. 여성에게 더 가혹한 도덕을 요구하거나 어머니에게 더 엄격한 잣대를 들이밀어선 안됩니다. 그것으로 우리 아이들을 설득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을 보고 자란 지금의 어른들이  '어머니되기'를 선택하지 않고 있는 것만 봐도 자명한 사실입니다. 180년이 지나도 아직 사라지지 않은 주홍 글자들을 마음 아프게 바라며 책을 덮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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