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개월 차] 다이어리모임, 온도차에 친절하기

뜨거운 사람으로 인해 모임과 관계는 지속된다

by 땅콩

중고등학생 다이어리부터 성인용까지 요즘 다이어리는 시간계획을 할 수 있는 타임라인 칸이 있다. 10년 전 다이어리는 월별-주별로 혹은 데일리형식에 일정을 적고 메모하는 수준이었다면 오늘날은 현대인의 생활방식에 맞게 더 디테일해지고 미래지향적이다.

그저 지난 과거를 기록하는 것을 넘어 오늘의 플래너는 일주일을 계획하고 한 달, 1년, 10년 주기로 스스로를 설계하도록 멀리 내다보고 있다. 어쩌면 시대 변화가 너무 빠르기 때문에 휩쓸리지 않으면서 잘 적응하고 싶은 의지가 아이러니하게 다이어리 쓰기에 불을 붙였다.


인간의 수명은 늘어났지만 적응 및 진화 난이도는 더 가속되었기에 이 홍수 같은 급류의 시대 속에서 나 자신을 지킨 채 생존한다는 것은 인문학적인 기술을 필요로 한다. 유속을 느끼면서 잘 헤엄치고 싶기 때문이다. 그러려면 기록을 통해 가시적인 변화를 확인하고, 계획을 통해 불안을 해소해야 한다. 물론 계획대로 되지 않는 게 인생이지만 불확실함에 대한 불안으로 나를 덜 소비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이어리 쓰기가 잘 되지 않을 수도 있다. 실제로 모임 안에서도 ‘다이어리를 쓰고 싶다’라는 욕구는 있는데 잘 되지 않는다는 멤버들이 있었다.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첫 번째 이유로는 내 일상의 밀도가 타임블록을 채울 정도로 높지 않거나 매일이 비슷하게 반복되기 때문에 일정 쓰기에서 크리에이티브 한 성취가 떨어지고 지루해져서 그럴 수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창작자는 하루 일과가 아주 심플하다. 작업하고 산책하고 책 읽으며 휴식하면 하루가 끝이다. 물론 이런 일과가 자신을 안정적으로 끌어가고 있고 있다면 다이어리를 쓰지 않아도 될 일이다. 다이어리를 쓰는 이유는 자신의 하루 밀도에 만족하지 못했거나 스스로 감각하기도 전에 하루가 다 가버렸을 때 주체성을 잃어버린 것 같은 공허함 때문이다. 나에게 주어진 시간에 진짜 내가 하고 싶은 활동을 하고 있는지 남들이 원하는 사회적 역할도 어느 정도 해나가면서 수동적인 나를 줄이고 있는지 확신이 없기에 그것을 표면화하는데 목적이 있다. 계획했던 활동과 사회적인 만족감 하루하루 쌓으면 자기 삶에 대한 만족도가 높아지는 건 당연하다. 나는 그게 안되고 있다고 생각하기에 타임플래너 쓰기를 시작했다.

그러니 밀도가 낮고 심플한 활동이라도 한 시간 이상 활동을 지속했다면 적어두자. 적어두고 모아서 보아야 회고를 할 수 있다. 한 달 동안 쓴 시간을 모아보면 나라는 인간을 어느 정도 객관적 수치로 바라볼 수 있고 내가 가진 현상이 드러난다. 단순한 내부활동이 많아 환기가 필요하다면 주기적으로 외부활동을 만들어 스케줄에 넣어보는 것도 좋다. 도서관 가기, 전시회 가기, 모임참여해 보기. 적절한 외부의 자극은 내부의 동기를 만들어내고 다이어리에 생동감을 불어넣는다.


두 번째는 나의 밀도를 다이어리가 감당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모임분 중에 S님은 1년이 되도록 다이어리 쓰기에 매번 흥을 내지 못했다. 기존의 다이어리가 야행성인 자신의 타임라인과 맞지 않아서였고 두 번째는 다이어리가 자신의 업무와 기록 밀도를 받아내기엔 디테일이 떨어졌다. 거기다 미적 감수성도 채워주지 못했다. 다른 멤버의 추천으로 새해를 맞아 3P바인더 사의 다이어리를 포기하고 P사의 다이어리를 구입했다. 종이 재질부터 더 세분화된 타임라인, 길어진 ToDo리스트 칸과 확장된 위클리형식은 업무량이 많고 깔끔한 기록을 원하는 S의 성향에 딱 맞았다. 결국 그녀는 스티커와 루틴양식까지 활용해 가며 3월의 다이어리를 가득 채워서 오셨다. 미적감수성을 채워주는 형광펜 선택과 필감좋은 펜부터 귀여운 체크스티커까지 자신에게 맞는 기록을 위해 찾은 아이템들은 그녀의 다이어리 생활을 보필하며 오래 동행해 줄 것이다.

세 번째 이유로는 심리적인 기제가 있다.


이렇게까지 내가 시간을 세분화하며 살아야 하나? 다이어리를 쓰고 싶긴 했는데 이렇게까지 내 시간을 체크해 가며 시계를 자꾸 쳐다보면서 자신을 닦달하는 것이 어쩐지 내키지 않아서 열심을 내지 않게 된다. 거기다 다른 사람들의 과도한 열정과 일과를 들여다보는 것이 부담스럽기도 하다. 어쩐지 나도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압박도 느낀다.


시간을 닦달하는 것 같은 마음은 곧 시간을 쫒아가는 것 처럼 느낀다는 것인데 그럴 때에는 시간의 밀도보다는 깊이의 밀도를 더하는 쪽의 다이어리 쓰기를 권한다. 아직 자신의 하루일과나 활동이 일관적으로 정립이 되기 힘든 라이프스타일이라는 걸 인정하는 것도 필요하다. 시간씀씀이가 자신을 독려하지 못한다면 오늘 나의 기분 체크하기, 일어나자마자 이닦기, 9시에는 책상에 앉아 일기쓰기 같은 루틴에 대한 체크와 단상만으로 깊이를 얻을 수 있다.


오랫동안 같은 멤버들과 모임을 지속하다 보면 그런 온도차를 느낄 때가 있다. 사람들마다 끓는점이 다 다르다. 여러 사람에게서 같은 시간대에 동일한 끓는점 을 갖게되는 건 아주 큰 행운이다. 모임은 이 펄펄 끓고 있는 뜨거운 사람으로 인해 지속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래서 나는 단 한 사람이라도 온도가 높은 사람이 있으면 너무나 감사하다. 지금 내 온도가 조금은 식었지만 언젠가 다시 올라갈 것임을 알기에 그때까지 이 모임을 존속시켜 주는 한 사람의 뜨거움이 고맙다. 그러니 자신의 온도가 낮다고 죄책감을 느낄 필요는 없지만 친절할 필요는 있다.

곽민희 ⓒ 2024

작년 다이어리 모임을 즐겁게 할 수 있었던 이유도 내 온도와 비슷한 뜨거운 동료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매주 자신의 다이어리를 공유하고 서로에게 조언을 구하고 응원했다. 피드백 페이지를 만들어보자는 아이디어도 나왔고 한 달 통계가 주는 의미도 찾게 되었다. 지금은 그때만큼 내가 다이어리 쓰리게 열정적이진 않지만 그때의 뜨거움을 블로그에 기록해 두었다. 덕분에 새로 들어오신 분은 그때의 내 온도를 지닌 글을 읽고 힘을 얻었다고 한다.


처음 시작할 때가 가장 뜨겁다. 그때 자신과 같은 온도를 지닌 사람을 만나는 것은 엄청난 행운이다. 그러니 곧 식을지라도 뜨거워지려는 나를 억압하지 말자. 그때 크리에이티브한 뭔가가 태어난다는 것을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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