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봉 5배와 워라밸을 얻고도 후회하는 이유

Learning Agility

by 마찌

대학 동창들 사이에서 저는

제법 성공적인 경력을 쌓은 축에 속합니다.

대단치 않은 출발선에서 시작했지만,

치열한 노력과 적지 않은 운 덕분에

지금의 자리에 올랐으니까요.

모든 것에 감사해야 마땅한 이 시점에,

누군가 제게

"지난 과정을 돌아보며 후회되는 점은 없습니까?"라고 묻는다면

저는 주저 없이 대답할 것입니다.

"나는 너무 오랜 시간 안전지대(Safety Zone)에 머물렀습니다."

한국에서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개척하기도 했고,

미국으로 건너와 새로운 도전을 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결정적인 순간마다 저는

'난 이 분야의 전문가가 될 거야'라는

그럴싸한 핑계 뒤에 숨었습니다.

진짜 전문가가 되기 위한

치열한 자격증 공부나,

내 업무 너머의 더 큰 세상을 볼 기회들을

스스로 차버린 채

주어진 일들에만 안주했던 것입니다.

이 뼈아픈 후회를 마주하게 된 건

작년 가을, 회사의 인상적인 인사 발표 때문이었습니다.

입사 연도도 같은 'M'이 차세대 배터리 연구소장에 발탁된 것입니다.

젊은 나이에 요직을 맡은 것도 놀라웠지만,

저를 충격에 빠뜨린 건

그의 인사발표 문구에 담긴 경력 사항이었습니다.

<마찌와 M의 경력비교>

그가 단순히 임원이 되어서 부러운 것이 아닙니다.

15년 동안 그는 생산, 회계, 기획, 영업, 연구소까지

회사의 거의 모든 밸류체인을 경험했습니다.

각 부서는 사실상

다른 회사라고 봐도 무방할 만큼

운영 목표와 프로세스가 판이합니다.

보통은 관련 전공자를 뽑아 전문가로 키우지만,

M은 달랐습니다.

그가 부서를 옮길 때마다

겪었을 과정을 상상해 봅니다.

그는 익숙한 곳에서의 '선임' 자리를 버리고,

새로운 부서의 '신입'이 되어

모르는 것을 묻고 배우는 고통을 기꺼이 감수했을 것입니다.

그가 '무지(無知)'를 드러내며

바닥부터 다시 배울 때,

저는 '전문가'라는 타이틀을 방패 삼아

안전지대에 머물러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이제 숲 전체를 조망하는 리더가 되었고,

저는 나무만 보는 기술자로 남았습니다.

지금 우리는 AI가

인간의 지적 능력을 추월하는 격변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의학, 법률처럼

최고의 인재들이 모인다는 분야조차

기존 데이터를 학습한 AI에게 자리를 위협받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한 자리에 멈춰 서 있는 것은

현상 유지가 아니라 도태를 의미합니다.

심리적 안전지대는

이제 가장 위험한 사각지대가 되었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기초대사량이 줄어들어

같은 몸매를 유지하려면 더 많이 움직여야 하듯,

우리는 더 많이 배워야 겨우 현재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이런 변화의 파도 속에서도

유연하게 성장하는(Learning Agility가 뛰어난) 선배들을 보면

세 가지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첫째, 가르침에 너그럽습니다.

유독 정보를 감추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레퍼런스나 이전 자료를 마치 대단한 기밀인 양

쥐고 있는 것은 사실 불안감의 반증입니다.

반면, 끊임없이 배우는 사람은

정보를 공유해도

자신이 더 빨리 나아가 우위를 점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습니다.

후배들은 그런 선배를 믿고 따르며,

자연스럽게 강력한 연대가 형성됩니다.


둘째, 섬세하며 호기심이 많습니다.

남들은 무심코 지나치는 불편함이

그들의 레이더에는 포착됩니다.

커피숍에서 줄을 서서 메뉴판을 볼 때도

'메뉴 구성을 이렇게 바꾸면

고객이 더 보기 편할 텐데'라며

개선점을 떠올립니다.

이는 타고난 천재성이라기보다,

평소 크고 작은 문제들을 해결하며 단련된

'고민 근육' 덕분입니다.

큰 근육을 가진 사람이 무거운 짐을 쉽게 들듯,

그들은 일상의 문제에서

쉽게 혁신의 실마리를 찾아냅니다.


셋째, 이해가 깊고 본질을 꿰뚫습니다.

복잡한 현상을 명쾌한 비유로 설명해

무릎을 탁 치게 만드는 사람들입니다.

비유를 잘한다는 것은

대상의 핵심과 맥락을 완벽히 이해했다는 뜻입니다.

제 업무 경험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한 번은 10개 제품의 프로그램 진행 상황을

단 한 장의 장표에 담아 보고해야 했습니다.

담아야 할 정보는 방대하고 복잡했습니다.

제품 10개의 테스트1, 2 진행 일정 (각 6개월, 시작/종료일 다름)

생산지 4곳 (미국, 한국, 멕시코, 중국)

현재 시점의 테스트 실패 개수 및 리스크 등급 (저/중/고)


이 복잡한 정보를 엑셀 표가 아닌,

직관적인 그림으로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고민 끝에 수영 경기장의 레인을 본떠 아래와 같은 차트를 만들었습니다.

<수영장에서 영감을 얻은 차트>

이처럼 시각화를 통해 정보를

단순화하는 훈련을 하다 보니,

당연하게 여겨지던 세상의 규칙들에도

"왜?"라는 질문을 던지게 되었습니다.

우연히 악보를 보았을 때입니다.

악보는 X축(시간)과 Y축(음높이)을 가진 훌륭한 차트입니다.

하지만 '음표의 모양'으로

'음의 길이'를 표현하는 방식은 비효율적으로 느껴졌습니다.

길이는 직관적인 숫자나 막대의 길이로 표현하고,

음표의 모양과 색으로는

강세나 주법 같은 더 풍부한 정보를 담을 수 있지 않을까요?

물론 제 생각이 음악 이론적으로는 틀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건 정답 여부가 아닙니다.

<현재 두가지 표현하는 악보에서 4가지를 표현으로 개선 가능하다>

'Learning Agility'를 가진 사람은

수백 년간 이어져 온 악보 같은 관습 앞에서도

"이게 최선일까? 더 나은 방법은 없을까?"를 끊임없이 고민한다는 점입니다.

안전지대를 벗어나 끊임없이 질문하고,

배우고, 연결하는 힘. 그것이

연봉이나 워라밸보다 더 중요한,

불확실한 미래를 돌파할 유일한 무기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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