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브레네 브라운
수치심은 인간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감정이다. 장기로 따지자면 인간의 노폐물을 배출하는 대장, 신장, 생식기 부분이 아닌가 싶다. 그렇기 때문에 표면적으로 보일 수 없고, 개개인에게 아주 은밀한 부위이다. 수치심은 우리가 항상 안고 살아간다. 이 감정은 노폐물처럼 배출해야 하는 감정이다. 그러나 수치심은 나를 숨기고 싶을 때 느끼는 감정이다. 나 자신이 사회로부터 받아들여질 수 없는 존재가 된 것 같고 버림받을 것만 같은 느낌이다. 절대 드러낼 수 없다. 진짜 버림받을 수 있을 것 같은 나의 흉측한 모습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고 사회는 수치심을 안 보이는 곳에 묻어놓고 산다.
브레네 브라운 작가가 쓴 수치심 권하는 사회는 수치심에 대해 심층적으로 분석한 책이다. 수치심이 인간 개개인의 삶에 어떤 큰 영향을 끼치고 사회는 어떻게 수치심을 주입하는지에 대한 분석과 일상에서 느낄 수 있는 수치심에 대해 많은 사례를 알려준다. 또한 수치심을 극복하려면 수치심 회복 탄력성을 길러야 한다고 조언한다. 내용 중에서 아쉬웠던 부분이 있다면 수치심 회복탄력성을 올리는 방법을 실생활에서 쉽게 활용할 수 있는 내용이 없어 조금 아쉬웠다.
수치심은 기름이다. 작은 불씨하나면 모든 걸 태운다. 대부분 순간적으로 올라오는 감정들은 대부분 수치심이 원인이다. 친구가 무심코 한 말에 분노가 치밀어 오르거나, 순간적인 폭력과 폭언, 급격한 우울감, 무기력감 등 많은 감정들을 수치심이 통제한다.
우리 사회는 불을 발견한 이후부터 지금까지 수치심에 의해 발전되어 왔다. 인간을 움직였던 동력은 아마 수많은 감정이 있을 테지만 그중 가장 큰 감정은 수치심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수치스럽다고 여기는 나의 모습을 끊임없이 숨기기 위해, 집단으로부터 받아들여지기 위해, 사랑받기 위해 진짜 자아를 가려왔다. 그리곤 원하는 가짜 자아상을 드러내고 집단에 스며들기 위해 발전해 왔다. 특히, 미용업계가 단적인 예시이다.
사회를 이끌어가는 사람들은 이 수치심을 이용해 사람들을 세뇌를 통해 통제한다. 그런 수치심을 이용하기 위해 사회는 기름을 막 들이붓는다. 집단적으로 그들의 무의식에 저당 음식을 통해 예쁜 몸매를 유지하라고 은연중에 몸매에 대한 고정관념 주입을 허용한다. 광고를 본 어린아이들은 예쁜 몸매를 광고 속 스타들처럼 되기 위해 노력한다. '아 이런 몸매를 가져야만 사랑받을 수 있구나' 하고 성장하는 자기의 몸을 혐오하기 시작하고, 결국에는 섭식장애, 폭식을 하기도 한다. 그 아이들이 성인이 되면 성형수술을 통해 이상적인 몸매 갖고자 하는 열망을 지닌다.
그런 사회 속에서 많은 사람들은 정형화된 기준이 존재하고, 그 기준을 개개인에게 대입한다. 그러곤 상대의 몸을 평가하며 수치심을 주기도 한다.
'너 살 좀 빼야겠다. 넌 쌍꺼풀 수술하면 이쁠 것 같아'
'인서울 정도는 입학해야지, 수능 3등급이 뭐니? 1등급은 받아야지'
'거긴 어느 회사야? 들어본 적도 없어'
학교에선 대학교를 나와서, 대학교를 졸업하면 대기업을 가야 인정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된다고 마음대로 결정한다. 마치 대학교를 나오지 않고, 대기업을 입사하지 않으면 인정받지 못한 사회에 실패자로 은연중에 낙인찍는다. 아니면 공무원처럼 안정적인 직업을 가져야 가정에서든 사회에서든 인정받을 수 있다고 한다. 그렇게 사회가 만든 고정관념에 사람들은 맞추기 시작하고, 사회가 정한 표본에 맞춰 진정한 나 자신을 드러내기를 수치스러워한다. 수치심은 늘 무시되고 있고, 결국 수치심은 점점 커진다. 기름은 채워졌고 누군가 불씨하나만 던지면 모든 것이 연소될 것이다.
사회는 똑똑한 엘리트를 선호하고, 정형화된 아름다움과 몸매를 갖지 못한 것을, 개개인이 가진 저마다 독특한 특성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욕심, 어두운 속내, 기질마저 정형화한다. 인간이기에 가질 수 있는 어두운 마음까지도 수치라고 여기며 사회에서 배제하려 한다. 개개인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어두운 속내를 가진 자를 이해하려는 사람은 집단을 거역하는 인간, 이해하려는 사람이 그와 동일한 인간이라고 사회 자체가 큰 두려움을 가지고 바라본다.
이 책에서 죄책감과 수치심의 차이를 설명하면서, 죄책감은 개인의 성장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죄책감을 통해 더 나은 선택과 발전으로 성장할 수 있다고 말하지만 수치심은 긍정적 수치심 같은 것은 절대 존재할 수 없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인간 사회가 이렇게 고도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수치심 때문이다. 그러나 긍정적 발전이 아닌 아프고 병든 사회로 발전했기에 발전이라고만 한다면 발전한 셈이다. 사람들은 치유되지 못한 수치심을 숨기기 위해 명예, 재물, 학벌에 대한 더 큰 욕심을 갖고, 개개인이 서로를 더욱 고통스럽게 만든다. 서로가 서로에게 더욱 큰 상처를 남기는 아픈 사회로 발전되었다. 발전이라고 하면 긍정적이라고 해야 할까. 아이러니하다.
과거에 가난하고 볼품없고, 버림받고, 무시당했던 과거의 부끄러운 나 자신을 숨겨야한다는 욕망이 개개인들을 움직이게 하였는지도 모르겠다. 치욕스럽고 수치스러웠던 내 모습에서 그리고 상황에서 빨리 벗어나기 위해서 말이다. 이 아픈 사회의 톱니바퀴는 수치심이 없으면 돌아가지 않는다. 슬프지만 사실이다.
많은 사람들은 정신적으로 힘들지만 수치심을 느끼지 않기 위해 하기 싫은 일을 그만두지 못하고 하고 있다.그만두게 되면
버텨내지 못하면 나약한 인간이라는 소리를 들을 것 같아서,
돈 없는 서러움, 무시당하는 수치심, 길에 나앉는 최악의 상황을 면하기 위해서,
직업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생각해 속해있지 못한다는 소외감, 고립감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__매너티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