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무언가를 시작하려 하지만 계획을 무산시키고 침대 안에 몸을 파묻고는 잠적한다.
'어차피 잘 안될 거야'라는 생각에 존재에 무의미를 느끼곤 모든 것을 중단한다.
과거의 실패와 타인으로부터 거절당한 경험으로 만들어진 두려움과 수치심이 오늘의 계획을 무산시키고, 나를 침대로 데려가 잠자코 있으라는 말을 한다. 어차피 노력해 봤자 똑같은 결과를 맞이할게 분명하니까 저항도 하지 못한 채 침대로 끌려간다.
수치심은 과거의 존재이자 실재하는 무언가다. 우리는 매 순간 과거의 존재에게 빙의된다. 예를 들면 이런 자아들이 있다.
5년 전 들어가는 회사마다 진득하게 오래 있지 못해 사람들로부터 무능력한 인간으로 보여 수치스러움 느꼈던 나.
2년 전 친구들과 갑작스럽게 절연했던 날, '내 인성에 문제가 있나'라며 인간관계에 무기력감을 느꼈던 나.
가장 축하받았어야 할 신부였던 날, 그 옆엔 단짝 친구 한 명만이 자리를 지켰다. 그때 나라는 사람과 그간 살아온 나날들이 어땠을지 평가받은 그날 고립감과 수치심을 느꼈던 나
중학교 3학년 때 어디에도 속해있지 못하는 거부당하는 감정을 느꼈던 중학생 때 나
초등학교 3학년 때 친구의 실수로 전교생 앞에서 체벌을 받아 창피함을 느꼈던 초등학생 때 나
이 많은 과거의 자아가 비슷한 상황을 겪을 때마다 찾아온다. 최근 몇 년 전에 일어났던 일도 생생하지만 십수 년 전도 여전히 생생하다. 부정적인 감정들은 늘 갑작스럽게 튀어나와 나를 통제하고 지배하려 한다. 분명 그때처럼 거부당할 거라고, 망신당할 거라는 두려움 때문에 한 걸음 나서기 조차 두렵다. 중요한 순간엔 수치심 느낄까 봐 두려워 달아난 경험도 많았다.
오전 7시, 활기차게 하루를 시작했다. 아침을 먹은 후, 피아노 전원을 켜고 의자에 앉아 악보를 펴고, 늘 연주하던 곡을 연습했다. 최근에 다시 피아노 연주를 시작한 것은 10년 만이다. 초등학교 6학년 이후로 드문드문 20살 이후는 완전히 내려놓았다. 그러다가 올해 갑자기 다시 피아노를 치겠다는 열정이 샘솟았다.
10년 만에 시작한 피아노 연주는 꽤 즐거웠다. 잘할 수 있는 영역이 있다는 감각은 정말 오랜만에 느끼는 뿌듯함과 자부심이었다. 이런 감정에 즐겁게 연주를 하지만, 과거에 묵혀놓았던 두려운 기억이 서서히 드리웠다. 피아노를 칠 때마다 일어났던 두렵고 무서운 사건을 상기하기 시작했다. 떠올리기 힘든 기억 때문에 건반에 힘을 과하게 눌러 소리가 예쁘지 않았다. 수치스러운 기억을 차단하기 위해 건반을 더욱 세게 눌렀다.
그러나 이대로 수치심에 굴복하게 되면 호기롭게 시작했던 피아노 연주도 완주를 목표하는 곡도 물거품이 될게 뻔했다. 떠오를 때마다 늘어지는 무기력감에 굴복하고 싶지 않아서 피아노를 치고 난 뒤, 글을 쓰기 시작했다. 구체적으로 수치심이 탄생한 시점과 상황, 감정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써 내려갔다. 숨바꼭질하던 희미하고 모호하던 수치스러운 감정을 글로 구체화시키면서 사라졌고, 피아노를 치기 싫어지는 무기력감 또한 힘을 잃었다.
떠올리기 힘든 과거를 애써 잊기보다 수치심에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수치스러운 생각은 떠오르면 숨고 싶고 사라져 버렸으면 좋겠다 싶을 만큼 나라는 존재를 한 없이 작게 만들었다. 그러나 글로 구체화하고 수치스러웠던 상황을 지속적으로 상기하는 순간 그 기억은 배경소품처럼 금세 사소하고 평범해졌다.
간혹, 사회가 만들어낸 관념 때문에 수치심을 느꼈던 과거의 나에게 ‘아.. 그런 행동은 하지 말았어야 하는데’라며 스스로 질책한다. 그런 생각은 수치심이 치유되기는커녕 무기력감을 수시로 들여보낸다. 그러곤 잘 살아보려 하면 불쑥 튀어나와 당신의 일상에 찾아와 온몸을 짓누르는 듯한 감정을 느끼게 만든다. 수치심은 '나' 그 자체이다. 나의 일부분임을 인정하고 그럴 수밖에 없었던 환경과 그 당시의 미숙했던 나 자신에게 연민의 감정으로 토닥여주며 미래를 위해 한 단계 나아가야 한다. 만약 수치심을 억압한다면 당신의 인생에서 결정적인 순간에 불쑥 튀어나와 걸림돌이 될지도 모른다.
수치심을 풀어내면 무기력감뿐만 아니라 의문스럽던 불안과 두려움도 한껏 가벼워진다.
과거에서 온 수치심이 기억의 일부가 되어 사라졌기 때문이다.
__매너티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