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장 - 지도

소설 도시는 배우지 않는다. 8장: 아이비 하우스의 밤

by 마나월드ManaWorld
main.png 2부 1장: 아이비 하우스의 밤


비행기가 흔들렸다.

정민은 눈을 떴다.

창밖이 어두웠다. 구름이 사라져 있었다.

아래로 불빛들이 보였다. 점점이. 주황색과 흰색.

“착륙을 준비합니다.”

안내 방송이 울렸다. 영어였다. 독일어가 따라왔다.

프랑크푸르트.

정민은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장판 조각이 있었다. 손끝에 닿았다. 꽃무늬의 요철. 닳은 표면.

아직 있다.

창밖을 봤다. 불빛들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프랑크푸르트 공항.

저녁7시.

청소부가 바닥을 밀고 있었다. 기계 소리가 멀리서 윙윙거렸다.

정민은 벤치에 앉았다. 백팩을 무릎 위에 올렸다.

앞주머니를 열었다. 서류가 있었다.

[도시운영 네트워크 국외훈련(도시재생 선진사례 조사·분석)]

A4 한 장. 구청 직인. 스테이플러 자국이 왼쪽 위에 찍혀 있었다.

정민은 서류를 꺼냈다.

모서리가 접혀 있었다. 비행기에서 잠들면서 눌렸다.

펴봤다. 다시 접혔다. 손가락으로 눌러봤다. 소용없었다.

파견 기간: 2027년 3월 18일 ~ 2027년 4월 29일

파견지: 프라이부르크(독일), 도야마(일본), 타이베이(대만) 외 3개 도시

목적: 도시재생 선진 사례 연구 및 네트워크 구축

6주.

정민은 서류를 봤다.

글자들이 있었다. 깔끔한 글자들. 명조체. 관인.

이게 떠나는 이유였다.

서류 한 장.

접어서 다시 앞주머니에 넣었다.




런던행 비행기.

1시간 40분.

창가에 앉았다. 옆자리는 비어 있었다.

이륙했다. 구름을 뚫었다. 또 구름 위였다.

정민은 메모장을 꺼냈다.

펼쳤다.

어제 적은 것.

‘다른 도시들은 무엇을 보고 바뀌기로 결심했을까.’

펜을 들었다.

적었다.

‘3월 28일. 런던으로.’

멈췄다.

뭘 적어야 할지 몰랐다. 아직 아무것도 보지 않았다.

메모장을 덮었다.

창밖을 봤다.

구름이 흘러갔다.


히드로 공항.

입국 심사를 통과했다.

짐을 찾았다. 캐리어가 컨베이어 벨트 위로 나왔다.

검은 캐리어.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마나시 도시재생본부.

캐리어를 끌고 나왔다.

도착 로비.

사람들이 있었다. 마중 나온 사람들.

피켓을 든 사람들. 포옹하는 사람들.

정민을 마중 나온 사람은 없었다.

당연했다.

출구로 걸었다.

자동문이 열렸다.

런던의 공기가 들어왔다.

차가웠다. 습했다. 마나시와 달랐다.

바다 냄새 대신 비 냄새.

3월의 런던.

정민은 코트 지퍼를 올렸다.


지하철.

피카딜리 라인.

파란 좌석에 앉았다. 캐리어를 다리 사이에 끼웠다.

창밖이 어두웠다. 지하였다. 터널 벽이 스쳐 지나갔다.

런던.

처음 와봤다.

정민은 휴대폰을 꺼냈다.

메시지가 떴다.

하린: 도착했어요?

시간을 봤다. 한국 시간으로 새벽 세 시.

왜 안 자고 있지.

답장을 적었다.

정민: 지금 런던이에요.

정민: 지하철 타고 숙소로 가는 중.

보냈다.

바로 답이 왔다.

하린: 사진 보내줘요.

하린: 뭐든.

정민은 창밖을 봤다. 터널 벽. 찍을 게 없었다.

정민: 지하철이라 아무것도 안 보여요.

하린: 그럼 나중에.

정민은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지하철이 역에 멈췄다. 사람들이 내렸다. 다른 사람들이 탔다.

다시 출발했다.


숙소.

넌헤드 역에서 걸어서 10분.

작은 호스텔. 3층 건물. 붉은 벽돌.

체크인했다. 여권을 보여줬다. 열쇠를 받았다.

진짜 열쇠. 금속. 무거웠다.

방은 2층이었다.

계단을 올라갔다. 캐리어가 계단에 부딪혔다. 쿵. 쿵.

방 문을 열었다.

작은 방. 싱글 침대. 책상. 의자. 창문.

창문으로 거리가 보였다. 가로등. 붉은 벽돌 건물들. 간판 하나.

‘Ivy House.’

정민은 창가에 섰다.

펍이었다. 오래된 건물. 창문에 불빛이 켜져 있었다.

안에서 사람들이 움직이는 게 보였다.

시계를 봤다. 저녁 여덟시 십분.

배가 고팠다.

코트를 다시 입었다.



아이비 하우스.

문을 밀었다.

안으로 들어갔다.

따뜻한 공기. 맥주 냄새. 나무 냄새. 오래된 냄새.

사람들이 있었다. 바에 앉은 사람들.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

웃고 있었다. 말하고 있었다.

벽에 뭔가 붙어 있었다.

다가갔다.

액자. 그 안에 종이. 이름들이 빼곡했다.

‘Community Shareholders.’

공동체 주주.

정민은 이름들을 봤다. 수십 개. 아니, 수백 개.

손으로 쓴 것도 있었다. 타이핑한 것도 있었다.

“도와드릴까요?”

목소리.

돌아봤다.

바텐더. 사십 대 중반. 짧은 머리. 앞치마.

“아, 저는…”

“여기 처음이죠?”

“네.”

바텐더가 웃었다.

“어디서 오셨어요?”

“한국이요. 마나시.”

“마나시? 처음 듣는데. 서울 근처?”

“좀 떨어져 있어요.”

바텐더가 고개를 끄덕였다.

“난 톰이에요. 여기서 일해요.”

“정민이에요.”

톰이 액자를 가리켰다.

“이거 보고 있었죠?”

“네. 이게 뭐예요?”

“주주 명단이에요. 이 펍을 산 사람들.”

정민이 다시 액자를 봤다.

“펍을요? 이 사람들이 다?”

“371명이요.”


톰이 바 쪽으로 걸어갔다. 정민이 따라갔다.

“2013년이었어요. 이 펍이 문 닫을 뻔했거든요.

개발업자가 사서 아파트로 바꾸려고 했어요.”

“그래서요?”

“동네 사람들이 돈을 모았어요. 6개월 동안. 14만 파운드.”

정민이 계산했다. 한화로 2억이 넘었다.

“그걸 어떻게…”

“조금씩이요. 백 파운드부터. 누구나 살 수 있게.”

톰이 맥주잔을 닦았다.

“마실 거 있어요?”

“아, 맥주요. 아무거나.”

톰이 맥주를 따랐다. 거품이 올라왔다.

“여기요.”

정민이 받았다. 잔이 차가웠다.

“그래서 지금은요? 누가 운영해요?”

“우리요. 주주들.”

톰이 바 뒤를 가리켰다.

벽에 또 다른 액자. 사진들. 흑백 사진. 컬러 사진. 사람들.

“저 사진들이요?”

“이 펍의 역사예요. 1930년대부터.”

정민이 사진들을 봤다. 오래된 사진.

술 마시는 사람들. 웃는 사람들. 같은 공간. 다른 시대.

“90년이요.”

톰이 말했다.

“이 펍이 여기 있던 시간.”


맥주를 마셨다.

바에 앉아 있었다.

사람들이 들어왔다. 나갔다. 인사했다. 웃었다.

톰이 그들과 이야기했다. 이름을 불렀다. 농담을 주고받았다.

단골들이었다.

정민은 지켜봤다.

여덟 시가 됐다.

문이 열렸다.

노인이 들어왔다. 칠십 대. 흰 머리. 코트.

“매리!”

톰이 소리쳤다.

“여보, 늦었네.”

매리가 웃었다. 바로 걸어왔다. 정민 옆자리에 앉았다.

“새 얼굴이네.”

매리가 정민을 봤다.

“한국에서 왔대요.”

톰이 말했다.

“한국? 멀리서 왔구나.”

매리가 손을 내밀었다. 정민이 잡았다. 손이 마르고 따뜻했다.

“왜 여기 왔어?”

“도시를 보러요. 다른 도시들이 어떻게 하는지.”

“뭘?”

정민이 잠깐 멈췄다.

“배우는 거요. 도시가 배우는 방법.”

매리가 고개를 갸웃했다.

“도시가 배워?”

“잘 모르겠어요. 그래서 보러 왔어요.”

매리가 웃었다.

“재밌는 애네.”

톰이 매리에게 맥주를 줬다. 매리가 받았다. 한 모금 마셨다.

“이 펍 얘기 들었어?”

매리가 물었다.

“조금요. 371명이 샀다고.”

매리가 벽의 사진들을 가리켰다.

“저기 봐.”

사진 하나. 흑백. 젊은 남녀가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1952년. 우리 엄마 아빠야. 첫 데이트.”

“여기서요?”

“응. 아빠가 프로포즈한 것도 여기야.”

매리가 다른 사진을 가리켰다. 컬러. 웨딩드레스를 입은 여자.

“내 결혼식 피로연. 1978년.”

또 다른 사진. 케이크 앞에 선 젊은 여자.

“우리 딸 스무 살 생일. 2003년.”

또 다른 사진. 아기를 안은 사람들.

“손녀 돌잔치. 2019년.”

정민은 사진들을 봤다. 같은 공간. 다른 시대. 3대가 같은 테이블에서.

“그래서 샀어.”

매리가 말했다.

“우리가 산 건 펍이 아니야.”

“네?”

“시간을 산 거야.”

정민은 사진들을 다시 봤다.

1952년. 1978년. 2003년. 2019년.

70년.

“이게 사라지면, 우린 우리 자신을 잃는 거야.”

매리가 맥주잔을 내려놓았다.

“그래서 371명이 돈을 모은 거야. 각자 조금씩.”



아홉 시.

무대에서 뭔가 시작됐다.

기타 소리. 누군가 마이크 앞에 섰다.

노래가 시작됐다.

사람들이 따라 불렀다. 맥주잔을 들고. 박자를 맞추며.

합창이었다.

정민은 지켜봤다.

매리도 부르고 있었다. 톰도. 바의 손님들도.

같은 노래. 같은 리듬. 같은 공간.

노래가 끝났다. 박수가 터졌다. 다음 노래가 시작됐다.

정민은 휴대폰을 꺼냈다.

사진을 찍었다. 무대. 사람들. 맥주잔들. 손을 흔드는 사람들.

노래가 또 끝났다.

매리가 정민을 봤다.

“매주 금요일이야.”

“네?”

“이 모임. 14년째.”

정민이 계산했다. 14년. 매주 금요일.

“한 번도 안 빠지고요?”

“왜 빠져? 여기가 우리 집인데.”

매리가 웃었다.


열 시.

사람들이 하나둘 나가기 시작했다.

매리가 일어섰다.

“나도 가야겠다.”

코트를 집었다.

정민도 일어섰다.

“감사해요. 이야기해줘서.”

매리가 코트를 입다가 멈췄다.

정민을 봤다.

“근데 궁금한 게 있어.”

“네?”

“한국은 어때?”

정민이 매리를 봤다.

“거기도 이렇게 해? 동네 사람들이 돈 모아서 가게 사고?”

정민은 입을 열었다.

말이 안 나왔다.

매리가 기다렸다.

2초.

3초.

정민은 마나시를 생각했다.

프래그먼트. 하린. 문 닫은 가게들.

임대문의 종이. 셔터 내린 골목.

동네 사람들이 돈을 모았나?

아니.

상생협약이 있었다. 서명이 있었다. 도장이 있었다.

하지만 돈을 모은 건 없었다.

건물주가 임대료를 올렸고. 임차인이 나갔고.

구청이 회의했고. 보고서를 썼고.

정민이 그 보고서를 썼다.

“잘… 안 돼요.”

정민이 말했다.

목소리가 작았다.

“왜?”

매리가 물었다.

정민은 대답하지 못했다.

왜?

몰랐다. 진짜로 몰랐다.

왜 안 되는지는 한 번도 안 적었다.

매리가 정민을 봤다. 3초. 5초.

표정이 바뀌었다. 동정이 아니었다. 이해 같은 거였다.

“그거 알아내러 온 거구나.”

정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말이 안 나왔다.

매리가 정민의 어깨를 두드렸다. 가볍게. 손이 따뜻했다.

“찾아봐. 여기 있으면 뭔가 보일 거야.”

문을 열고 나갔다.

찬 공기가 들어왔다.

문이 닫혔다.



정민은 바에 남았다.

톰이 잔을 닦고 있었다.

사람들이 빠져나가고 펍 안이 조용해졌다.

정민은 벽의 이름들을 봤다.

371명.

마나시에서 371명이 모인 적이 있나.

상인회. 많아야 30명. 그마저도 1년에 두세 번.

정민은 맥주잔을 내려놓았다.

잔이 카운터에 닿았다. 딱.

“괜찮아요?”

톰이 물었다.

“네.”

괜찮지 않았다.

“맥주 한 잔 더요?”

“아니요. 갈게요.”

정민이 일어섰다.

“내일 낮에도 열어요?”

“열죠. 두 시부터.”

“또 올게요.”

톰이 손을 들었다.

“언제든.”

밖으로 나왔다.

문이 닫혔다. 안에서 의자 끄는 소리가 났다.

거리에 섰다.

가로등 불빛. 붉은 벽돌. 차가운 공기.

정민은 휴대폰을 꺼냈다.

사진을 찾았다. 아까 찍은 것. 무대. 사람들. 합창.

하린에게 보냈다.

사진 1장.

문장을 적었다. 멈췄다. 지웠다. 다시 적었다.

정민: 여긴 동네 사람 371명이 펍을 샀대.

보냈다.

바로 답이 왔다.

하린: 371명이요?

정민: 응.정민: 각자 백 파운드씩.

정민: 그래서 지금 이 사람들 거래.

하린: …

하린: 우리는 왜 안 됐을까요.

정민은 화면을 봤다.

같은 질문이었다. 매리에게 못 한 대답. 하린도 묻고 있었다.

정민: 몰라.

정민: 그거 알아내러 왔어.

보냈다.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메모장을 꺼냈다.

펜을 들었다.

적으려다 멈췄다.

뭘 적어야 하지.

‘371명이 돈을 모았다.’

적었다.

그건 정보였다.

다음 줄.

‘왜 우리는 안 됐을까.’

적었다.

대답을 몰랐다.

다음 줄.

‘매주 금요일. 14년.’

적었다.

다음 줄.

‘시간을 샀다.’

펜이 멈췄다.

메모장을 봤다.

정보와 질문이 섞여 있었다.

대답은 없었다.

메모장을 덮었다.

숙소로 걸었다.

뒤에서 펍의 불빛이 보였다. 아직 켜져 있었다.

톰이 정리하고 있을 것이다.

걸었다. 호스텔 문 앞에 도착했다.

뒤를 돌아봤다.

펍의 불이 꺼졌다.

어둠.

가로등만 남았다.

정민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계속-




"한국은 어때?"

"우리가 산 건 펍이 아니야. 시간을 산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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