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장 - 떠남

소설 도시는 배우지 않는다. 7장: 떠나는 버스

by 마나월드ManaWorld
main.png 1부 7장: 떠나는 버스

3월 18일.

알람이 울렸다. 다섯 시 사십분.

정민은 눈을 떴다.

천장을 봤다. 하얀 천장. 금이 가 있었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가늘게. 3년 동안 봐온 금이었다.

처음 이사 왔을 때는 몰랐다. 6개월쯤 지나서 발견했다.

누워서 천장을 보다가. 야근하고 돌아온 밤이었다.

하림지구 상인회 회의가 새벽 한 시까지 이어졌던 날.

알람이 계속 울렸다.

손을 뻗었다. 휴대폰을 잡았다. 알람을 껐다.

조용해졌다.

정민은 천장을 보고 누워 있었다. 조금 더.


일어났다.

원룸.

미래구 외곽. 7층. 전용 23제곱미터.

3년 동안 살았다. 이 방에서. 도시재생과 발령받고 이사 왔다.

하림지구와 가까워서. 버스로 삼십 분.

방이 비어 있었다.

어젯밤에 정리했다. 새벽 두 시까지.

버릴 건 버리고. 맡길 건 맡기고. 가져갈 건 캐리어에 넣고.

캐리어 하나. 백팩 하나. 그게 전부였다.

침대는 그대로 뒀다. 임대 가구니까.

책상도. 의자도. 내 건 아니었다. 처음부터.

정민은 방 안을 둘러봤다.

책상. 빈 서랍. 어제까지 서류가 들어 있었다.

상생협약 보고서. 회의록. 통계표. 다 구청에 반납했다.

옷장. 빈 행거. 옷은 캐리어에 있었다.

창문.

커튼이 없었다. 원래 없었다. 필요 없었다. 7층이니까. 볼 사람도 없고.

창밖을 봤다.

아직 어두웠다. 미래구의 불빛들이 점점이 보였다.

아파트 불빛. 가로등 불빛. 편의점 간판.

하림지구 방향은 어둠뿐이었다.

벽을 봤다.

뭔가 붙어 있었다.

‘하림지구 상생협약 – 함께 살아요, 우리 골목!’

포스터.

3년 전 포스터. 구청에서 가져온 것. 샘플이었다.

왜 붙였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그냥 벽이 허전해서였던 것 같다.

정민이 포스터 앞에 섰다.

색이 바래지 않았다. 실내니까. 햇빛이 안 들어서.

어제 본 포스터가 떠올랐다.

철물점 옆 벽. 같은 포스터. 누렇게 바래고, 모서리가 뜯긴.

정민은 포스터를 떼었다.

천천히. 테이프가 벽지째 뜯어질까 봐. 조심스럽게.

떼었다.

접었다. 반으로. 또 반으로.

백팩 앞주머니에 넣었다.



캐리어를 열었다.

옷. 속옷. 양말. 세면도구. 노트북. 충전기. 변압기.

옆주머니를 열었다.

메모장. 펜 두 자루. 명함 열 장.

장판 조각.

꺼냈다.

손바닥 위에 올렸다.

꽃무늬. 분홍과 연두. 색이 바랬다. 가장자리가 닳았다.

표면에 얇은 금이 있었다.

진옥이네 손칼국수. 40년 전 장판.

무게가 거의 없었다. 손바닥 위에서 가벼웠다.

정민은 장판을 봤다.

이 조각을 주웠던 날. 철거 현장. 새벽. 포클레인이 벽을 밀기 전.

무릎을 꿇고 바닥에서 뜯어냈다. 손톱이 깨졌다. 손끝에 먼지가 묻었다.

왜 주웠을까.

몰랐다.

그냥 두면 사라질 것 같아서.

장판을 다시 넣었다.

캐리어를 닫았다.

지퍼를 잠갔다.


문 앞에 섰다.

캐리어. 백팩.

신발을 신었다. 운동화. 오래 걸어도 편한 것.

문에 손을 얹었다.

뒤를 돌아봤다.

빈 방.

침대. 책상. 의자. 옷장.

벽. 포스터 떼어낸 자리. 테이프 자국. 네모나게.

천장. 금.

창문. 커튼 없는 창. 새벽빛. 아직 어두운 새벽빛.

3년.

처음 왔을 때는 짐이 더 많았다.

이삿짐 박스 다섯 개. 지금은 캐리어 하나.

3년 동안 뭘 했을까.

보고서를 썼다. 회의에 참석했다. 통계를 집계했다.

상인회를 만났다. 건물주를 만났다.

그래서?

47개 업소가 21개가 됐다.

상생협약 3년차 유지율 44.7%.

정민은 문을 열었다.

복도.

형광등이 깜빡였다. 새벽이라 아무도 없었다.

우편함들. 대부분 비어 있었다.

이 층에 사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문을 닫았다.

열쇠를 돌렸다. 딸깍.

잠겼다.

엘리베이터를 탔다.

1층.

로비를 지났다.

밖으로 나왔다.

3월 새벽 공기. 차가웠다. 숨을 쉬면 코끝이 시렸다. 입김이 나왔다.

버스 정류장으로 걸었다.


정류장.

사람이 없었다.

벤치에 앉았다. 캐리어를 옆에 세웠다.

여섯 시 오 분.

버스는 여섯 시 십 분.

숨을 내쉬었다. 입김이 보였다. 희미하게.

휴대폰을 꺼냈다.

메시지.

하린: 일어나셨어요?

하린: 오늘 출발이죠?

하린: 잘 다녀오세요.

하린: 기록 기다릴게요.

시간을 봤다. 새벽 다섯 시 오십팔분.

하린도 깨어 있었다.

정민이 답장을 적었다.

정민: 네. 지금 정류장이에요.

정민: 고마워요. 연락할게요.

보냈다.

바로 답이 왔다.

하린: 어제 장부 정리했어요.

하린: 그 조각 붙인 장부요.

하린: 마지막 페이지에 적었어요.

하린: “기록을 기다리는 중.”

정민이 화면을 봤다.

정민: …

정민: 꼭 가져갈게요. 기록.

하린: 네.

하린: 조심히 가세요.

정민은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버스가 왔다.



버스에 올랐다.

카드를 찍었다. 삑.

자리에 앉았다. 창가. 캐리어를 옆에 뒀다.

버스에 사람이 별로 없었다. 새벽이니까.

뒷자리에 노인 한 명. 앞자리에 청소복 입은 여자.

버스가 출발했다.

창밖을 봤다.

미래구.

유리 건물들. 아직 불이 꺼진 곳이 많았다. 가끔 불이 켜진 층.

야간 경비. 청소 노동자.

편의점이 지나갔다. 불 켜진 편의점.

알바생이 계산대에 앉아 있었다. 고개를 숙이고.

카페가 지나갔다. 불 꺼진 카페. 아직 문 열기 전.

버스가 마나교에 올랐다.

다리.

창밖으로 난간이 보였다. 어제 서 있던 난간. 물방울이 맺혀 있던.

아래로 물이 보였다. 어두웠다. 가로등 불빛만 수면에 비쳤다. 흔들렸다.

왼쪽을 봤다.

미래구. 유리 건물들. 불빛. 점점이.

오른쪽을 봤다.

하림지구. 낡은 건물들. 지붕들. 대부분 어두웠다.

그중에서.

찾았다.

‘프래그먼트.’

하린의 카페. 간판이 보였다. 작게. 멀리서.

불이 꺼져 있었다.

당연했다. 어제 문을 닫았으니까.

버스가 다리를 건넜다.

하림지구가 멀어졌다.

프래그먼트가 안 보이게 됐다.

정민은 앞을 봤다.



버스는 공항 방향으로 달렸다.

정민은 창밖을 봤다.

도시가 흘러갔다.

미래구. 유리. 불빛. 새 건물.

경계. 회색 펜스. 공사 중 표지판. ‘하림지구 재개발 사업 – 1단계 공사 중.’

하림지구. 낡은 간판들. 셔터 내린 가게들. 어둠.

또 다른 경계. 논. 비닐하우스. 가로등.

하늘이 밝아지고 있었다. 동쪽. 회색에서 주황색으로.

버스 천장 스피커가 지직거렸다.

“다음 정류장은 인천공항 1터미널입니다.”

버스가 속도를 줄였다.

정민이 캐리어를 잡았다.


인천공항. 제1터미널.

버스에서 내렸다.

차가운 공기. 아까보다 덜 차가웠다. 해가 뜨고 있어서.

캐리어를 끌었다.

자동문이 열렸다. 따뜻한 공기.

공항 특유의 공기. 에어컨과 커피와 사람들 냄새.

출발층.

사람들이 있었다.

캐리어를 끄는 사람들. 배웅하는 가족들. 커피 들고 가는 사람들.

전광판을 봤다.

ICN → FRA 12:15 탑승수속중

프랑크푸르트. 거기서 기차로 프라이부르크.

정민이 캐리어를 끌고 카운터로 갔다.

장면 9: 체크인

줄을 섰다.

앞에 세 명. 가족. 부모와 아이.

아이가 캐리어 위에 앉아 있었다. 흔들흔들.

줄이 줄었다.

정민 차례.

“여권 주세요.”

직원이 말했다.

정민이 여권을 건넸다.

“위탁 수하물은요?”

“이거 하나요.”

캐리어를 들어 올렸다. 컨베이어에 올렸다.

캐리어가 움직였다. 고무 벨트 위로. 사라졌다.

“좌석은 창가 괜찮으세요?”

“네.”

“24A요.”

보딩패스가 나왔다. 직원이 건넸다.

“즐거운 여행 되세요.”

정민이 고개를 숙였다.

걸었다.


보안검색대.

줄을 섰다.

백팩을 내렸다. 트레이에 올렸다.

주머니를 비웠다.

휴대폰. 지갑. 메모장. 펜.

장판 조각.

트레이에 올렸다.

트레이가 들어갔다. X-ray.

정민이 금속탐지기를 지나갔다.

기다렸다.

트레이가 나왔다.

검색요원이 트레이를 잡았다. 멈췄다.

장판을 들었다.

“이게 뭐예요?”

정민이 봤다. 검색요원 손에 들린 장판.

“장판이요.”

“네?”

“오래된 장판이요. 조각.”

검색요원이 장판을 뒤집었다. 앞면. 뒷면. 가장자리를 봤다.

“… 기념품 같은 거예요?”

“비슷해요.”

검색요원이 장판을 내려놓았다.

“… 통과요.”

정민이 장판을 집었다.

손바닥 위에 올렸다.

꽃무늬. 닳은 표면. 40년.

주머니에 다시 넣었다.

다른 것들도 챙겼다. 휴대폰. 지갑. 메모장. 펜.

백팩을 메고 걸었다.


출발 게이트. A28.

의자에 앉았다.

창밖으로 비행기가 보였다. 크고 하얬다. 루프트한자. 꼬리 날개에 노란 마크.

활주로가 보였다. 아직 햇빛이 약했다.

정민이 메모장을 꺼냈다.

펼쳤다.

어제 적은 것들. 철물점. 드라이버. 안경. 포스터. 하린.

마지막 줄.

'이 도시는 왜 배우지 않을까.'

정민이 펜을 들었다.

새 페이지.

적었다.

'3월 18일. 출발.'

펜이 멈췄다.

'첫 번째 질문:'

'다른 도시들은 무엇을 보고 바뀌기로 결심했을까.'


“A28 게이트 탑승을 시작합니다.”

안내 방송.

정민이 메모장을 닫았다. 백팩에 넣었다.

일어났다.

줄을 섰다.

보딩패스를 보여줬다.

통로를 걸었다. 비행기까지. 긴 통로. 창밖으로 비행기 날개가 보였다.

비행기에 올랐다.

24A. 창가 자리.

앉았다.

안전벨트를 맸다.

창밖을 봤다.

활주로. 다른 비행기들. 관제탑. 하늘.

하늘이 밝아지고 있었다.

휴대폰을 꺼냈다.

비행기 모드로 바꾸기 전에. 마지막으로.

메시지를 확인했다.

하린: 탑승했어요?

하린: 잘 도착하면 연락 주세요.

하린: 그리고.

하린: 기록 꼭 해주세요.

하린: 이 도시한테 보여줄 거니까.

정민이 화면을 봤다.

이 도시한테 보여줄 거니까.

답장을 적었다.

정민: 지금 비행기예요.

정민: 도착하면 연락할게요.

정민: 기록할게요.

잠시 멈췄다.

정민: 꼭 가져갈게요. 돌아올 때.

보냈다.

비행기 모드로 바꿨다.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이륙을 준비합니다. 안전벨트를 확인해 주십시오.”

안내 방송.

비행기가 움직였다. 천천히. 활주로로.

창밖을 봤다. 터미널이 멀어졌다. 다른 비행기들이 지나갔다.

멈췄다.

활주로 끝.

엔진 소리가 커졌다. 진동이 왔다. 좌석이 떨렸다.

비행기가 달리기 시작했다.

창밖 풍경이 빨라졌다.

더 빨라졌다.

몸이 뒤로 밀렸다.

땅이 기울었다.

떨어졌다.

공항이 작아졌다.

활주로가 선이 됐다.

터미널이 점이 됐다.

도시가 보였다.

인천. 서울. 멀리.

더 멀리.

마나시.

있을까. 보일까.

창에 이마를 대고 아래를 봤다.

유리 건물들. 작은 점. 미래구일까.

회색 지붕들. 더 작은 점. 하림지구일까.

가느다란 선. 마나교일까.

알 수 없었다. 너무 멀었다.

너무 작았다.

정민이 창에 손을 댔다.

차가웠다. 얼음처럼.

구름이 다가왔다.

흰 구름.

도시가 가려졌다.

사라졌다.



구름을 뚫었다.

갑자기 밝아졌다.

햇빛이 들어왔다. 눈이 부셨다. 정민이 눈을 가늘게 떴다.

창밖.

구름 바다. 하얗고 끝이 없었다. 위에서 보니까 산처럼 보였다. 울퉁불퉁한 하얀 산.

아래는 보이지 않았다.

도시도. 다리도. 골목도.

정민은 창밖을 보다가 눈을 감았다.

도시는 배우지 않는다.

왜?

배워본 적이 없으니까.

그러면.

어떻게 해야 배울까.

모른다.

모르니까 가는 거다.

보러 가는 거다.

배운 도시들을.

눈을 떴다.

주머니에서 장판 조각을 꺼냈다.

손바닥 위에 올렸다.

꽃무늬. 닳은 표면. 40년.

진옥이네 손칼국수.

사라진 가게. 사라진 골목. 사라진 사람들.

하지만 이건 남았다.

이 조각은.

정민이 장판을 쥐었다.

6주.

프라이부르크. 도야마. 타이베이. 그리고 외 3개도시.

그 도시들이 뭘 봤는지.

뭘 보고 바뀌기로 했는지.

어떻게 배웠는지.

기록할 것이다.

돌아올 것이다.

보여줄 것이다.

이 도시한테.

하린한테.

남은 사람들한테.

정민은 장판을 주머니에 다시 넣었다.

창밖을 봤다.

구름 바다가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비행기는 서쪽으로 날았다.


1부 끝.




"모르니까 가는 거다. 보러 가는 거다."

[ 도시가 가려졌다. 사라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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