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장 - 스티커

소설 도시는 배우지 않는다. 6장: 기억의 골목

by 마나월드ManaWorld
main.png 1부 6장: 기억의 골목

정민은 구청을 나섰다.

오후 여덟 시. 현관 자동문이 닫혔다. 등 뒤로 형광등 불빛이 사라졌다.

걸었다.

버스 정류장. 사람이 없었다. 벤치에 앉지 않았다. 서서 기다렸다.

버스가 왔다.

탔다. 카드를 찍었다. 창가에 앉았다.

하림지구 방향.

오늘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았다. 왜인지는 몰랐다. 그냥 그랬다.

버스가 마나교에 올랐다.

창밖으로 물이 보였다. 검은 물. 가로등 불빛이 흔들렸다. 왼쪽에 미래구의 유리 건물들. 오른쪽에 하림지구의 낡은 지붕들.

내렸다.



골목이 어두웠다.

가로등 세 개 중 하나가 꺼져 있었다. 7년 전에도 그랬다. 민원을 넣은 적 있었다. 아직도 안 바뀌었다.

정민은 골목을 걸었다.

발걸음 소리가 울렸다. 자기 발소리만.

왼쪽에 세탁소. 폐업. 셔터가 내려져 있었다. 셔터에 스티커. ‘THANK YOU 30년간 감사했습니다.’ 스티커 끝이 말려 있었다.

오른쪽에 빈 상가. 유리창에 종이. ‘임대문의.’ 전화번호. 아래쪽 숫자가 비에 젖어 번져 있었다. 뒷자리 네 개를 알 수 없었다.

바람이 불었다. 차가웠다. 3월인데 아직 겨울 같았다.

정민은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이 골목을 처음 걸은 게 7년 전이었다.

신규 발령. 도시재생과 신입. 스물여섯. 도시재생이 뭔지도 몰랐다. 골목이 뭔지도. 상인이 뭔지도.

그때는 가게마다 불이 켜져 있었다. 지금은 절반이 어둡다.


정민이 멈췄다.

‘김씨 철물점.’

간판이 그대로였다. 파란 바탕에 흰 글씨. 페인트가 벗겨져 있었다. ‘철’ 자 위쪽이 희미했다.

가게 안은 비어 있었다.

어제 철거 대상지 명단에서 봤다. ‘김씨 철물점 - 3월 22일 철거 예정.’

정민이 유리창 앞에 섰다.

먼지가 껴 있었다. 손으로 닦았다. 동그랗게. 손바닥에 먼지가 묻었다.

안쪽을 들여다봤다.

카운터. 먼지만 쌓여 있었다. 계산대 위에 뭔가. 안경. 김 사장님 안경인가. 드라이버 거치대. 비어 있었다. 드라이버들은 다 가져간 모양이었다.

벽에 뭔가 붙어 있었다.

정민이 눈을 가늘게 떴다.

‘상생협약 체결 업소.’

스티커. 7년 전에 내가 붙인 거였다.


그날도 오후였다.

정민은 서류 가방을 들고 있었다. 상생협약 안내문. 상인회 가입 신청서. 스티커 열 장.

철물점 문을 열었다. 종이 울렸다. 딸랑.

“어서 오세요.”

김 사장이 카운터 뒤에 있었다. 오십대 후반. 안경. 작업복. 드라이버를 들고 뭔가 고치는 중이었다.

“안녕하세요. 도시재생과에서 나왔습니다.”

“도시재생?”

김 사장이 드라이버를 내려놓지 않았다.

“네. 하림지구 상생협약 관련해서요.”

“아, 그거.”

김 사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드라이버로 나사를 조이며 말했다.

“뭘 하면 되는 겁니까?”

“상인회 가입하시면 됩니다. 공동 마케팅, 공동 이벤트, 지역 홍보…”

“마케팅.”

김 사장이 드라이버를 멈췄다.

“그거 하면 손님이 옵니까?”

정민은 대답하지 못했다.

김 사장이 드라이버를 내려놓았다. 카운터에. 딸그락 소리가 났다.

“여기가 철물점이에요.”

“네.”

“이 골목에서 삼십 년 했어요.”

“…”

“단골들 다 떠났어요. 아파트 들어가고. 대형 마트 생기고. 젊은 사람들은 인터넷으로 사고.”

김 사장이 안경을 벗었다. 닦았다. 작업복 소매로.

“마케팅 해서 올 손님이 없어요. 이해합니까?”

정민은 고개를 숙였다.

“… 죄송합니다.”

“아니, 뭘.”

김 사장이 안경을 다시 썼다.

“당신 잘못은 아니잖아.”

드라이버를 다시 들었다.

“이 동네가 그런 거지. 시대가 그런 거지. 당신이 뭘 어떻게 하겠어.”

나사를 조였다. 끼익 소리.

“그래도 왔으니까. 스티커는 붙이고 가요. 붙인다고 손해 볼 건 없으니까.”

정민은 가방에서 스티커를 꺼냈다. 김 사장이 턱으로 벽을 가리켰다.

“저기 붙여요.”

정민이 스티커를 붙였다. ‘상생협약 체결 업소.’ 손으로 눌러서 기포를 뺐다.

“됐어요?”

“네.”

“그럼 됐어요. 수고해요.”

정민은 인사하고 나왔다.

문이 닫혔다. 종이 울렸다. 딸랑.

골목에 서서 뒤를 돌아봤다.

유리창 너머로 김 사장이 보였다. 다시 드라이버를 들고 있었다. 고개를 숙이고 뭔가 고치는 중이었다.


정민이 유리창에서 손을 뗐다.

스티커는 7년 동안 붙어 있었다.

가게는 비었다.

김 사장님은 어디 갔을까. 보상금 받고 떠났을까. 아들 집으로 갔을까. 아니면.

정민은 몰랐다. 알 수 없었다.

서류에는 '이탈’이라고만 적혀 있었다.

발걸음을 옮겼다.



철물점 옆 벽.

낡은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하림지구 상생협약 – 함께 살아요, 우리 골목!’

3년 전 포스터. 정민이 디자인 시안을 검토했었다. 세 가지 후보 중에서 이걸 골랐다. 가장 따뜻해 보여서.

지금은.

색이 바랬다. 원래 주황색이었는데 지금은 누런색. 모서리가 떨어져 나갔다. 왼쪽 위, 오른쪽 아래. 테이프 자국만 남았다. 가운데 접힌 자국. 누가 한번 뜯으려다 만 것 같았다.

‘함께 살아요.’

정민이 손을 뻗었다.

포스터를 만졌다. 종이가 눅눅했다. 손끝에 먼지가 묻었다.

하린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오늘 오후. 구청 회의실. 마지막에 하린이 한 말.

“함께가 이렇게 외로운 단어였나.”

정민은 포스터 앞에 서 있었다.

바람이 불었다. 포스터 모서리가 펄럭였다. 떨어질 듯 말 듯.

손을 내렸다.

떼지 않았다. 붙여두지도 않았다. 그냥 뒀다.

걸었다.


골목을 빠져나왔다.

마나교 방향으로 걸었다. 십분쯤.

다리에 올랐다.

중간쯤에서 멈췄다.

난간에 손을 얹었다. 철. 차가웠다. 밤이슬이 맺혀 있었다. 손바닥이 젖었다.

왼쪽을 봤다.

하림지구. 낡은 건물들. 불빛이 드문드문. 대부분 어둠. 철물점이 있던 골목은 보이지 않았다.

오른쪽을 봤다.

미래구. 유리 타워들. 밤에도 빛났다. 꼭대기 LED 간판. ‘하림지구 재개발 사업 – 더 나은 내일을 위해.’ 글자가 천천히 흘렀다. 한 글자씩.

같은 도시였다.

다리 하나 차이였다.

왜 이렇게 다를까.

아래를 봤다.

물이 흘렀다. 검은 물. 다리 불빛이 흔들렸다. 물결 따라.

휴대폰이 울렸다.


주머니에서 꺼냈다.

화면에 ‘이하린.’

받았다.

“정민 씨.”

하린의 목소리. 피곤해 보였다. 아까 회의실에서보다 더.

“네.”

“지금 어디예요?”

“마나교요. 다리 위.”

“…”

침묵.

정민이 난간을 잡았다. 물방울이 손가락 사이로 흘렀다.

“… 뭐 해요, 거기서?”

“생각 중이었어요.”

“뭘요?”

정민은 물을 봤다. 불빛이 흔들리는 물.

“이 도시가요.”

“…”

“왜 안 바뀔까.”

하린이 웃지 않았다.

“배운 적이 없으니까요.”

정민이 대답하지 않았다.

물이 흘렀다.

“정민 씨.”

“네.”

“파견 가는 거, 확정됐어요?”

“네. 다음 주에 출발해요.”

“얼마나요?”

“6주요.”

“…”

침묵.

하린이 숨을 쉬는 소리가 들렸다. 전화기 너머로.

“거기서 뭘 보실 건지 모르겠지만.”

“…”

“기록해 주세요.”

정민이 난간을 잡은 손에 힘을 줬다.

“기록하겠습니다.”

“다른 도시들은 어떻게 하는지. 왜 그렇게 하는지. 뭘 보고 그렇게 하게 됐는지.”

“네.”

“그걸 보면.”

하린이 말을 멈췄다.

“…”

“뭔가 알 수 있을 것 같아요. 이 도시가 왜 이런지.”

정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린에게 보이지 않았지만.

“알겠습니다.”

“…”

“꼭 돌아와서 보여주세요.”

“네.”

“약속이에요.”

“약속합니다.”

전화가 끊겼다.

정민은 휴대폰을 내렸다.

화면이 꺼졌다.

난간을 잡고 서 있었다. 한참.

물이 흘렀다.



주머니에서 메모장을 꺼냈다.

펜을 꺼냈다.

난간에 기대어 섰다.

적었다.

‘김씨 철물점 – 스티커 아직 붙어 있음.’

펜이 멈췄다.

적었다.

‘드라이버 거치대 – 비어 있음.’

‘안경 – 카운터 위.’

적었다.

‘포스터 – 색 바랬음. 모서리 떨어짐.’

‘함께 살아요.’

펜이 멈췄다.

‘하린 – 기록해 달라.’

‘배운 적이 없으니까.’

펜을 내렸다.

메모장을 봤다.

오늘 적은 것들. 사물들. 흔적들. 사라진 것들. 남은 것들.

새 줄.

적었다.

‘이 도시는 왜 배우지 않을까.’

펜이 멈췄다.

메모장을 닫았다.

주머니에 넣었다.


다리를 건넜다.

버스를 탔다. 미래구 방향.

창밖을 봤다. 하림지구가 멀어졌다. 미래구의 불빛이 가까워졌다.

내렸다.

집으로 걸었다.

원룸. 미래구 외곽. 7층. 전용 7평.

문을 열었다. 불을 켰다.

책상 위.

파견 서류가 놓여 있었다.

‘해외 도시운영 연수 파견 프로그램’

‘기간: 6주’

‘대상 도시: 프라이부르크 / 도야마 / 타이베이 외 추가 연구 도시’

옆에 장판 조각.

진옥이네 손칼국수. 40년 전 장판. 꽃무늬. 닳은 표면.

정민은 장판을 손으로 만졌다.

표면이 거칠었다.

메모장을 꺼냈다.

오늘 적은 것들을 다시 읽었다.

스티커. 드라이버. 안경. 포스터. 기록.

펜을 들었다.

새 페이지.

적었다.

‘질문:’

‘도시가 배우려면 뭐가 필요할까.’

‘가르치려면 뭘 보여줘야 할까.’

‘프라이부르크는 뭘 봤을까.’

‘도야마는 뭘 봤을까.’

‘타이베이는 뭘 봤을까.’

펜이 멈췄다.

창밖을 봤다.

미래구의 불빛이 반짝였다.

하림지구는 보이지 않았다.

불을 껐다.


-계속-




"당신 잘못은 아니잖아."

[ 펜이 멈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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