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장 - 장부

소설 도시는 배우지 않는다. 9장: 공동체의 경영

by 마나월드ManaWorld
main.png 2부 2장: 공동체의 경영

다음 날.

정민은 눈을 떴다.

창문으로 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흐린 빛. 런던의 아침.

시계를 봤다. 아홉 시.

시차 때문에 늦게 잤다. 새벽 세 시까지 뒤척였다.

매리의 얼굴이 떠올랐다. 코트를 입다가 멈췄던. 정민을 봤던.

‘한국은 어때?’

5초. 입만 벌렸다. 말이 안 나왔다.

정민은 천장을 봤다. 낯선 천장. 금이 없었다.

일어났다.

세수를 했다. 찬물. 얼굴이 시렸다. 수건으로 닦았다. 거친 수건. 호스텔 수건.

창문을 열었다.

아이비 하우스가 보였다. 어젯밤과 달랐다. 조용했다.

문이 닫혀 있었다. 창문에 햇빛이 반사되고 있었다.

오전에는 안 하나.

정민은 옷을 입었다.

거리로 나왔다.


공기가 차가웠다. 3월의 런던. 코트 지퍼를 올렸다.

카페를 찾았다. 호스텔에서 두 블록.

모퉁이에 있었다. 유리문. 안에 사람들이 보였다.

들어갔다.

따뜻한 공기. 커피 냄새. 빵 굽는 냄새.

카운터로 갔다.

“아메리카노요.”

“3파운드.”

카드를 댔다. 삑.

창가에 앉았다. 의자가 나무였다. 차가웠다.

메모장을 꺼냈다.

어젯밤 적은 것.

‘371명이 돈을 모았다.’‘왜 우리는 안 됐을까.’

‘매주 금요일. 14년.’‘시간을 샀다.’

정민은 펜을 들었다.

아래에 적었다.

‘질문: 어떻게 운영하지? 371명이?’

커피가 왔다. 흰 컵. 김이 올라왔다.

마셨다. 쓴맛. 뜨거웠다. 혀가 데었다.

컵을 내려놓았다.

창밖을 봤다. 사람들이 지나갔다. 코트를 입은 사람들.

우산을 든 사람들. 비가 오려나.

휴대폰을 꺼냈다.

검색했다. ‘Ivy House Nunhead’.

기사가 나왔다. 2013년. 가디언.

‘런던 최초의 공동체 소유 펍.’

스크롤했다.

‘Community Benefit Society.’‘1인 1표 원칙.’‘수익 배분 제한. 연 5% 상한.’

정민은 화면을 봤다.

1인 1표.

주식을 많이 가져도 1표. 적게 가져도 1표.

마나시의 재개발 조합이 떠올랐다. 거기선 지분이 곧 표였다.

돈이 곧 권력이었다. 큰 건물주가 회의를 이끌었다.

작은 상인은 손도 못 들었다.

여기선?

정민이 메모장에 적었다.

‘1인 1표. 돈이 아니라 사람.’

커피를 마셨다. 식어 있었다.



오후 두 시.

아이비 하우스가 열렸다.

정민은 문을 밀고 들어갔다.

삐걱. 나무 문이 소리를 냈다.

낮의 펍. 어젯밤과 달랐다. 조용했다. 사람이 적었다.

테이블 세 개에만 사람이 앉아 있었다.

창문으로 햇빛이 들어왔다. 먼지가 떠다녔다. 금빛으로 반짝였다.

바에 톰이 있었다.

“어, 어젯밤 친구.”

톰이 손을 들었다.

“안녕하세요.”

정민이 바로 걸어갔다. 발소리가 나무 바닥에 울렸다.

“낮에도 오네. 뭐 마실래?”

“커피요. 아까 마셨는데…”

“맥주 마셔. 낮맥주. 런던 스타일이야.”

톰이 웃었다. 주름이 잡혔다.

정민도 웃었다.

“그럼 맥주요.”

톰이 맥주를 따랐다. 탭을 당겼다. 황금색 액체가 잔을 채웠다. 거품이 올라왔다.

“여기요.”

정민이 받았다. 잔이 차가웠다. 물방울이 맺혀 있었다.

“궁금한 게 있어요.”

“뭐?”

“어떻게 운영해요? 371명이?”

톰이 맥주잔을 닦았다. 흰 천으로. 천천히.

“운영?”

“네. 결정은 누가 해요? 돈 관리는요? 의견이 다르면요?”

톰이 웃었다.

“많이 궁금하네.”

“직업병이에요.”

톰이 잔을 내려놓았다. 카운터에. 딱.

“잠깐만. 보여줄 게 있어.”

톰이 바 뒤로 갔다. 서랍을 열었다. 나무 서랍. 삐걱거렸다. 뭔가를 꺼냈다.

장부였다.

낡은 장부. 표지가 해어져 있었다. 모서리가 접혀 있었다. 갈색 표지. 손때가 묻어 있었다.

정민은 장부를 봤다.

프래그먼트의 장부가 떠올랐다. 하린의 장부. 장판 조각이 붙은. 손글씨가 빼곡한.

톰이 장부를 펼쳤다.

“이게 우리 회의록이야.”

손글씨. 파란 잉크. 날짜. 안건. 결정.

“매달 한 번 모여. 이사회.”

정민이 장부를 봤다. 종이가 누렇게 변해 있었다. 오래된 냄새가 났다. 책 냄새.

“이사회요?”

“응. 이사가 일곱 명이야. 주주들이 뽑아.”

“투표로요?”

“응. 1인 1표.”

톰이 페이지를 넘겼다. 사각. 사각.

“작년 회의록이야. 봐.”

정민이 읽었다.

‘2026년 3월 이사회’

‘안건 1: 지붕 수리 (예산 5,000파운드)’‘찬성 5, 반대 1, 기권 1’‘결정: 승인’

‘안건 2: 금요일 음악회 시간 변경’‘찬성 2, 반대 4, 기권 1’‘결정: 부결’

정민이 고개를 들었다.

“음악회 시간도 투표해요?”

“당연하지. 모두의 펍이니까.”

정민은 장부를 다시 봤다.

‘찬성 2, 반대 4.’

반대가 이겼다. 기록돼 있었다.

톰이 장부를 닫았다.

“작은 것도 다 기록해. 누가 결정했는지. 왜 결정했는지.”

정민이 장부를 봤다. 낡은 표지. 손때 묻은 모서리.

“이거 몇 권이에요?”

“14권. 2013년부터.”


세 시.

문이 열렸다. 삐걱.

매리가 들어왔다. 어젯밤의 노인. 흰 머리. 파란 코트.

“어머, 어젯밤 친구네.”

매리가 정민을 보고 웃었다.

“안녕하세요.”

정민이 일어서려다 말았다. 매리가 손을 흔들었다. 앉아 있으라는 뜻.

매리가 바에 앉았다. 정민 옆자리. 의자가 삐걱거렸다.

“낮에도 왔어?”

“네. 궁금한 게 많아서.”

“뭐가?”

“운영이요. 어떻게 하는지.”

매리가 톰을 봤다. 톰이 어깨를 으쓱했다.

“직업병이래.”

매리가 웃었다. 얼굴에 주름이 잡혔다. 따뜻한 주름.

“도시 공부한다며?”

“네.”

“그럼 제대로 보여줄게.”

매리가 가방에서 뭔가를 꺼냈다. 천 가방. 낡았다. 손잡이가 해어져 있었다.

종이 한 장. 접혀 있었다.

펼쳤다.

표였다. 칸이 나뉘어 있었다. 이름들. 숫자들. 요일들.

“이번 달 당번표야.”

“당번이요?”

“응. 청소, 재고 확인, 이벤트 준비. 돌아가면서 해.”

정민이 표를 봤다.

이름이 빼곡했다. 요일별로. 시간대별로. 손글씨도 있었다. 펜으로 고친 흔적도 있었다.

“주주들이 직접 해요?”

“당연하지. 우리 펍이니까.”

매리가 손가락으로 한 칸을 짚었다. 손가락이 마르고 가늘었다.

“이게 나야. 토요일 오후. 재고 확인.”

“돈 안 받고요?”

“안 받지. 대신 맥주 한 잔 공짜.”

매리가 웃었다.

정민은 표를 봤다.

371명 중 이번 달 당번이 42명. 매주 돌아가며.

“안 하는 사람은요?”

“없어. 다들 해.”

“왜요?”

매리가 정민을 봤다.

“왜긴. 내 거니까.”

매리가 표를 접었다. 천천히. 접힌 자국을 따라.

“돈만 내면 끝이라고 생각해? 아니야. 손을 써야 해. 시간을 써야 해. 그래야 진짜 내 거야.”

정민은 대답하지 않았다.

마나시가 떠올랐다.

상인회. 청소 당번. 처음엔 있었다. 표가 있었다. 이름이 적혀 있었다.

6개월 뒤엔 없었다.

‘바빠서요.’ ‘오늘은 좀.’ ‘다음에 할게요.’

아무도 안 했다. 표가 비었다. 결국 구청에서 용역을 불렀다. 예산을 썼다. 정민이 그 예산안을 작성했다.

왜 안 했을까.

내 거라고 생각 안 해서?

정민은 표를 다시 봤다. 매리가 접은 표. 접힌 자국이 선명했다.



네 시.

사람들이 하나둘 들어왔다.

정민은 바에 앉아 지켜봤다.

테이블에 사람들이 모였다. 다섯 명. 서류를 펼쳤다. 종이가 바스락거렸다.

톰이 말했다.

“분기 회의야. 재정 검토.”

정민이 봤다.

한 사람이 숫자를 읽었다. 안경을 쓴 남자. 오십 대.

“3월 매출. 1만 2천 파운드.”

다른 사람이 적었다. 여자. 짧은 머리. 펜이 종이 위를 움직였다.

“지난달 전기세가 왜 올랐어?”

“날씨가 추웠잖아. 난방.”

“다음 달은?”

“절감 방안을 찾아볼게.”

적었다.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안건으로 넘어갔다.

정민은 지켜봤다.

질문이 있었다. 대답이 있었다. 또 질문이 있었다.

마나시의 회의가 떠올랐다. 구청 회의실. 파란 PPT. 형광등.

숫자를 읽는 사람만 말했다. 질문은 없었다. 다들 고개만 끄덕였다. 빨리 끝나길 바랐다.

정민도 빨리 끝나길 바랐다. 회의록을 써야 했으니까.

여기선 달랐다. 한 시간이 지났다. 아무도 시계를 보지 않았다.

회의가 끝났다.

마지막에 손을 들었다.

“지붕 단열재 교체. 찬성?”

손이 올라갔다. 네 개.

“반대?”

손이 올라갔다. 한 개. 짧은 머리 여자.

“기권?”

손이 없었다.

한 사람이 표를 세었다. 손으로. 하나씩. 검지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찬성 네 명. 반대 한 명. 승인.”

장부를 펼쳤다. 펜을 들었다. 적었다.

정민은 그 손을 봤다.

펜이 종이 위를 움직였다. 파란 잉크. 글씨가 생겼다.

‘찬성 4. 반대 1.’

반대가 적혔다.

정민은 펜을 쥔 손을 봤다.


저 손이 기록하고 있었다. 찬성도. 반대도. 다 남았다.

마나시에선?

정민이 회의록을 썼다. 수십 번. 6년 동안.

반대를 적은 적이 있나.

없었다.

‘만장일치.’ ‘이견 없음.’ ‘원안 의결.’

그렇게 적었다. 정민이. 정민의 손이.

반대가 없었던 게 아니었다. 손을 안 들었을 뿐. 말을 안 했을 뿐.

정민은 기록하지 않았다. 없는 것으로 했다.

왜?

빨리 끝내고 싶어서. 복잡하게 만들기 싫어서. 위에서 뭐라 할까 봐.

정민은 장부를 봤다.

‘반대 1.’

한 명의 반대가 남아 있었다. 14년 뒤에도 읽을 수 있었다.

다섯 시.

회의가 끝났다.

사람들이 맥주를 시켰다. 웃고 떠들었다. 회의 분위기가 사라졌다.

반대했던 여자도 웃고 있었다. 옆 사람과 건배했다.

반대해도 괜찮았다. 기록되고. 끝나고. 맥주 마시고.

정민은 메모장을 꺼냈다.

적었다.

‘1인 1표.’‘작은 것도 투표.’‘결정은 기록으로 남긴다.’‘반대도 기록한다.’

펜이 멈췄다.

다음 줄.

‘나는 기록하지 않았다.’

적었다.

손이 떨렸다. 조금.

펜을 내려놓았다.

맥주를 마셨다. 미지근했다.



여섯 시.

정민은 펍을 나왔다.

문 앞에 섰다.

공기가 차가웠다. 해가 기울고 있었다. 하늘이 주황색으로 변하고 있었다.

휴대폰을 꺼냈다.

카메라를 열었다.

뭘 찍을까.

돌아봤다. 펍 안이 보였다. 창문 너머로.

사람들이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웃고 있었다. 불빛이 따뜻했다.

찍었다. 찰칵.

하린에게 보냈다.

사진 1장.

창문 너머 사람들.

문장 1줄.

정민: 여긴 반대도 기록하더라.

보냈다.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장판 조각이 있었다. 손끝에 닿았다. 꽃무늬의 요철.

아직 있다.

잠시 후 답이 왔다.

하린: 반대요?

정민: 응. 회의에서. 찬성 4 반대 1. 그대로 적어.

하린: …

하린: 우리는 안 그랬는데.

정민은 화면을 봤다.

정민: 나도 안 그랬어.

정민: 내가 회의록 썼거든.

정민: 반대 적은 적 없어.

보냈다.

하린이 답하지 않았다.

1분.

2분.

정민은 거리를 걸었다. 휴대폰을 쥐고.

가로등이 켜지기 시작했다. 하나씩. 주황색 불빛.

3분.

답이 왔다.

하린: 그래서 안 됐나.

정민은 멈췄다. 거리 한가운데서.

화면을 봤다.

‘그래서 안 됐나.’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수 없었다.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숙소로 걸었다.


호스텔 문을 열었다. 삐걱.

계단을 올라갔다. 발소리가 울렸다.

방 문을 열었다.

창문으로 저녁 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주황색. 방 안이 따뜻해 보였다.

침대에 앉았다.

메모장을 폈다.

오늘 적은 것.

‘1인 1표.’‘작은 것도 투표.’‘결정은 기록으로 남긴다.’

‘반대도 기록한다.’‘나는 기록하지 않았다.’

펜을 들었다.

새 줄.

‘기록하지 않으면 없는 거다.’‘없는 게 되면 바꿀 수 없다.’‘그래서 안 됐나.’

적었다.

메모장을 덮었다.

창밖을 봤다.

아이비 하우스의 불빛이 보였다. 아직 켜져 있었다.

창문 너머로 사람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금요일이 아닌데도.

토요일인데도.

사람들이 있었다.

정민은 불빛을 보다가 눈을 감았다.

휴대폰이 울렸다.

메시지.

하린: 정민 씨.

하린: 다음엔 기록해요.

하린: 반대도.

정민은 눈을 떴다.

화면을 봤다.

답장을 적었다.

정민: 그래야지.

정민: 그래야 바뀌겠지.

보냈다.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천장을 봤다.

낯선 천장. 금이 없었다. 마나시 원룸과 달랐다.

눈을 감았다.

잠이 오지 않았다.


-계속-




[ 반대 1. 한 명의 반대가 남아 있었다. ]

"나는 기록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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