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장 - 계약

소설 도시는 배우지 않는다. 10장: 러스트벨트의 실험

by 마나월드Mana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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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4일.

비행기가 흔들렸다.

정민은 창밖을 봤다. 구름 아래로 땅이 보였다. 갈색. 회색. 눈이 덜 녹은 땅.

클리블랜드.

런던에서 일주일.

아이비 하우스에서 배운 것들을 메모장에 적었다. 열두 페이지.

‘정례성(정기성).’

‘1인 1표.’

‘반대도 기록한다.’

‘나는 기록하지 않았다.’

마지막 문장이 계속 떠올랐다.

안내 방송이 울렸다.

“클리블랜드 홉킨스 국제공항에 착륙합니다.”

정민은 안전벨트를 확인했다.

공항.

입국 심사를 통과했다.

짐을 찾았다. 캐리어. 검은 캐리어.

스티커가 아직 붙어 있었다.

마나시 도시재생본부. 모서리가 까져 있었다.

도착 로비로 나왔다.

피켓이 보였다.

‘Jung Min Seo - Evergreen Cooperatives’

들고 있는 사람.

오십 대. 검은 피부. 회색 점퍼.

점퍼에 로고가 있었다. 초록색 잎사귀.

정민이 다가갔다.

“저예요. 정민.”

“어, 반가워요. 조셉이에요.”

조셉이 손을 내밀었다. 정민이 잡았다.

손이 크고 거칠었다. 굳은살이 있었다.

“비행기 괜찮았어요?”

“네. 좀 흔들렸지만.”

“클리블랜드 날씨가 그래요. 3월인데 아직 추워요.”

조셉이 캐리어를 받으려 했다.

정민이 괜찮다고 했다. 조셉이 웃었다.

“차 타요. 숙소 먼저 갈까요, 아니면 바로 볼까요?”

“바로 볼게요.”

조셉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그게 낫지.”


차가 달렸다.

창밖으로 클리블랜드가 지나갔다.

공장들. 문 닫은 공장들. 녹슨 철문. 깨진 유리창. 풀이 자란 주차장.

정민은 창밖을 봤다.

하림지구가 떠올랐다. 셔터 내린 가게들.

임대문의 종이. ‘THANK YOU 30년간 감사했습니다.’

비슷했다. 닮아 있었다.

"여기가 러스트벨트예요."

조셉이 말했다.

"나도 여기서 태어났어요.

아버지가 제철소에서 일했어요.

문 닫던 날 기억나요. 내가 열두 살 때."

조셉이 핸들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80년대까지 철강 도시였어요.

US 스틸. 리퍼블릭 스틸. 다 여기 있었어요. 지금은…"

말이 끊겼다. 창밖을 가리켰다.

거대한 건물. 빈 건물. 벽에 그래피티. 창문이 다 깨져 있었다. 하늘이 뚫려 보였다.

“저게 예전 제철소예요. 3천 명이 일했어요.”

정민은 건물을 봤다. 뼈대만 남은 건물.

“지금은요?”

“아무도 없어요. 30년째.”

조셉이 핸들을 돌렸다.

“그런데 다른 데는 달라요. 보여줄게요.”



에버그린 세탁 협동조합.

차가 멈췄다.

건물이 있었다. 공장 건물. 하지만 달랐다. 창문에 불이 켜져 있었다.

주차장에 차들이 있었다. 사람들이 출입구로 드나들었다.

문 위에 간판.

‘Evergreen Cooperative Laundry’

초록색 글씨. 새 것이었다.

조셉이 차에서 내렸다. 정민도 내렸다.

공기가 차가웠다. 바람이 불었다. 코끝이 시렸다.

“여기가 첫 번째 협동조합이에요. 2009년에 시작했어요.”

문을 열었다.

안으로 들어갔다.

따뜻한 공기. 소리가 들렸다.

기계 소리. 윙윙. 쿵쿵. 물 흐르는 소리. 증기가 피어올랐다.

세탁기들. 거대한 세탁기들. 산업용. 드럼이 돌아가고 있었다.

안에서 흰 천이 휘감겼다.

사람들이 있었다. 작업복을 입은 사람들.

초록색 작업복. 세탁물을 분류하고 있었다. 기계를 조작하고 있었다.

“하루에 10톤 세탁해요.”

조셉이 말했다. 목소리가 기계 소리에 묻혔다. 크게 말했다.

“클리블랜드 클리닉 병원이 주요 고객이에요. 대학 병원도 있고.”

정민이 기계들을 봤다.

“직원이 몇 명이에요?”

“여기만 50명. 에버그린 전체로는 310명 정도.”

“협동조합이라고 했죠?”

“네. 직원이 주인이에요.”

사무실.

조셉이 안내했다.

2층. 계단을 올라갔다. 기계 소리가 작아졌다.

작은 방. 책상. 컴퓨터. 벽에 액자들. 사진들. 신문 기사들.

조셉이 액자 하나를 가리켰다.

“이게 우리 구조예요.”

도표. 원이 그려져 있었다. 화살표들.

‘Cleveland Clinic (병원)’

‘Case Western Reserve University (대학)’

‘Evergreen Cooperatives (협동조합)’

화살표가 이어져 있었다. 병원에서 협동조합으로. 대학에서 협동조합으로.

“앵커 기관이라고 불러요.”

조셉이 설명했다.

“병원이랑 대학은 이 도시를 떠나지 않아요.

뿌리가 여기 있으니까. 수만 명이 일하고.

수십억 달러를 쓰고. 그게 앵커예요. 닻.”

“그래서요?”

“그들이 쓰는 돈이 밖으로 나가지 않게 했어요.”

조셉이 화살표를 짚었다.

“세탁? 우리가 해요. 병원 시트. 가운. 전부.”

다른 화살표를 짚었다.

“식자재? 우리 농장에서 나와요.

태양광? 우리 에너지 협동조합이 설치해요.”

정민이 도표를 봤다.

“돈이 도시 안에서 돌게.”

“그래요. 그게 핵심이에요.

밖으로 새면 가난해지고. 안에서 돌면 부자가 돼요.”

조셉이 다른 액자를 가리켰다.

숫자들. 손글씨로 적혀 있었다. 매년 업데이트한 것 같았다.

‘연 매출: 2,500만 달러’

‘직원 배당: 150만 달러’

‘직원 자산 형성: 1,000만 달러’

정민이 숫자를 봤다.

“배당이요?”

“네. 직원이 주인이니까. 이익이 나면 나눠요.”

“얼마나요?”

“작년에 직원 평균 5,000달러. 잘하면 8,000달러까지.”

정민이 계산했다. 한화로 600만 원에서 1,000만 원.

“월급 외에요?”

“네. 월급은 따로 있어요.

시급 15달러부터 시작해서.

3년 지나면 지분이 생겨요.”


공장 바닥.

조셉이 안내했다.

다시 1층. 세탁기 사이를 걸었다. 증기가 올라왔다. 덥고 습했다. 세제 냄새가 났다.

여자가 있었다. 삼십 대. 작업복. 장갑. 세탁물을 분류하고 있었다.

흰 시트를 들어 올렸다. 바구니에 넣었다.

다시 들어 올렸다. 바구니에 넣었다.

반복.

“사라!”

조셉이 불렀다.

사라가 돌아봤다. 장갑을 벗었다. 땀이 이마에 맺혀 있었다.

“손님이에요?”

“한국에서 왔어요. 우리 모델 보러.”

사라가 정민을 봤다. 손을 내밀었다.

“사라예요.”

“정민이에요.”

손을 잡았다. 사라의 손. 거칠었다.

물에 불은 손. 굳은살이 있었다.

손등에 핏줄이 떠 있었다.

일하는 손.

“여기서 일한 지 얼마나 됐어요?”

정민이 물었다.

“7년이요.”

“처음부터 여기서요?”

사라가 웃었다. 웃음이 아니었다. 씁쓸한 표정. 입꼬리만 올라갔다.

“아뇨. 전에는… 여기저기였어요.”

잠깐 멈췄다. 정민을 봤다. 뭔가 재는 것 같았다.

“전과 기록이 있어요. 아무도 안 뽑아줬어요.”

정민은 말이 없었다.

“5년 동안요. 이력서 100개 넘게 냈어요. 다 거절.”

사라가 세탁기를 봤다.

“여기가 처음으로 기회를 줬어요.

시급 10달러로 시작했어요.

3년 뒤에 주인이 됐고.”

“주인이요?”

“지분이 생겼어요. 이제 이 기계가 내 거예요. 일부지만.”

사라가 세탁기를 두드렸다. 철컹. 금속 소리가 울렸다.

“작년에 배당금 8,000달러 받았어요.”

정민이 사라를 봤다.

“그 돈으로 뭐 했어요?”

사라가 웃었다. 이번엔 진짜 웃음. 눈이 작아졌다.

“집 계약금 냈어요. 25년 살면서 처음으로 내 집이요.”

정민은 사라의 손을 봤다. 기름때. 물때. 갈라진 피부.

“처음으로요?”

“네. 전에는 렌트만 했어요. 매달 쫓겨날까 봐 무서웠어요.”

사라가 장갑을 다시 꼈다.

“이제 안 무서워요. 내 집이니까.”

정민은 대답하지 않았다.

사라가 다시 세탁물을 분류하기 시작했다.

들어 올리고. 바구니에 넣고. 들어 올리고. 바구니에 넣고.

정민은 그 손을 봤다.



점심.

공장 식당.

조셉과 정민이 마주 앉았다. 트레이에 음식. 감자. 고기. 샐러드. 물.

플라스틱 포크. 종이 냅킨.

“어때요?”

조셉이 물었다.

정민은 포크를 내려놓았다.

“솔직히… 믿기 어려워요.”

“뭐가요?”

“이게 작동한다는 게요. 협동조합이. 이 규모로.”

조셉이 웃었다. 물을 마셨다.

“쉽지 않았어요. 처음 2년은 지옥이었어요.”

“왜요?”

“사업을 운영해본 사람이 없었어요.

다들 공장 노동자였으니까.

회계도 모르고. 마케팅도 모르고. 주문이 밀리고. 기계가 고장 나고.”

“그런데 어떻게요?”

조셉이 물을 내려놓았다.

“도움을 받았어요.

데모크라시 콜라보레이티브라는 단체가 있어요.

설계를 도와줬어요. 교육도 하고, 자문도 하고.

망하지 않게 붙잡아줬어요.”

정민이 메모장을 꺼냈다.

“그 단체요?”

“테드 하워드라는 사람이 이끌어요. 이 모델 전체를 설계한 사람.”

정민이 적었다.

‘Democracy Collaborative. Ted Howard.’

“만날 수 있을까요?”

“내일 약속 잡아줄게요. 관심 있으면.”

정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관심 있어요.”


오후.

공장을 나왔다.

차를 탔다.

조셉이 다른 곳으로 향했다.

“하나 더 보여줄 게 있어요.”

창밖으로 동네가 바뀌었다. 공장지대에서 주거지역으로.

낡은 집들. 잔디. 현관. 아이들이 뛰어놀고 있었다.

차가 멈췄다.

집 한 채 앞.

작은 집. 하얀 벽. 빨간 문. 현관에 화분. 노란 꽃.

“사라 집이에요.”

“사라요? 아까 그?”

“네. 작년에 샀어요.”

정민이 창밖을 봤다.

작은 집. 하지만 집이었다. 누군가의 집. 사라의 집.

빨간 문. 페인트가 새 것이었다. 사라가 칠했을까.

현관의 화분. 노란 꽃. 누군가 물을 줬을 것이다. 매일.

“협동조합이 도와줬어요.

다운페이먼트 프로그램이 있거든요.

직원들 주택 구입 지원.”

정민은 창밖을 봤다.

“25가구가 이 프로그램으로 집 샀어요.”

조셉이 말했다.

정민은 대답하지 않았다.

집을 보고 있었다.

마나시가 떠올랐다.

상생협약에 참여한 임차인들. 하린. 프래그먼트.

결국 쫓겨났다. 집은커녕 가게도 못 지켰다.

사라는 집을 샀다.

뭐가 달랐을까.



저녁.

숙소.

작은 호텔. 다운타운. 오래된 건물.

로비에 가죽 소파. 벽에 흑백 사진. 옛날 클리블랜드.

정민은 방에 들어갔다.

침대에 앉았다.

창밖을 봤다. 클리블랜드의 밤.

불빛이 적었다. 런던과 달랐다. 어두웠다.

메모장을 펼쳤다.

오늘 적은 것.

‘앵커 기관. 떠나지 않는 기관. 병원, 대학.’

‘돈이 밖으로 나가지 않게.’

‘직원이 주인. 지분. 배당.’

‘Democracy Collaborative. Ted Howard.’

펜을 들었다.

‘사라: 전과자. 아무도 안 뽑아줌. 5년. 100개 이력서. 거절.’

‘여기서 기회. 7년. 지분. 8,000달러. 집.’

펜이 멈췄다.

정민은 창밖을 봤다.

다시 메모장을 봤다.

‘감동? 아니다. 구조다.’

적었다.

‘사라가 집을 산 건 착해서가 아니다.’

‘시스템이 그렇게 설계됐기 때문이다.’

‘오면 이득. 안 오면 손해. 명확하다.’

펜이 멈췄다.

마나시가 떠올랐다.

상생협약. 착한 임대인. 좋은 취지.

뭐가 있었나.

서명. 악수. 사진. 기사.

구조는?

없었다.

정민이 적었다.

‘마나시에선 와도 이득이 없었다.’

‘안 와도 손해가 없었다.’

‘그래서 아무도 안 왔다.’

‘그래서 다 무너졌다.’

펜을 내려놓았다.

손이 떨렸다. 조금.


휴대폰을 꺼냈다.

사진을 찾았다. 오늘 찍은 것.

공장. 세탁기. 사라의 손.

하나를 골랐다. 사라의 집. 빨간 문. 노란 화분.

하린에게 보냈다.

사진 1장.

문장 1줄.

정민: 여긴 직원이 7년 일하고 집 샀대.

보냈다.

잠시 후 답이 왔다.

하린: 7년이요?

정민: 응.

정민: 전과자였대.

정민: 아무도 안 뽑아줬는데 여기서 기회 받고.

정민: 배당금 모아서 집 계약금 냈대.

하린: …

하린: 우리는 7년 있어도 쫓겨났는데.

정민은 화면을 봤다.

‘7년 있어도 쫓겨났는데.’

하린의 말이었다. 프래그먼트. 7년. 결국 문 닫았다.

정민: 구조가 달라서야.

하린: 구조요?

정민: 여긴 오면 이득이야. 배당. 지분. 집.

정민: 우린 와도 이득 없었잖아.

하린: …

하린: 그러네요.

하린: 와도 손해였는데.

정민은 창밖을 봤다.

클리블랜드의 밤. 어둠.

정민: 여긴 '착하게’가 아니라 ‘나눠 갖게’ 만들더라.

보냈다.

하린이 답하지 않았다.

1분.

2분.

답이 왔다.

하린: 나눠 갖게.

하린: 우리는 나눠 달라고만 했는데.

정민이 화면을 봤다.

정민: 나눠 달라고 하면 안 나눠줘.

정민: 나눠야 이득인 구조를 만들어야 해.

보냈다.

잠시 후 답이 왔다.

하린: 그게 가능해요?

정민이 생각했다.

마나시에서?

정민: 모르겠어.

정민: 근데 여긴 했더라.

보냈다.

하린: …

하린: 어떻게요?

정민은 창밖을 봤다.

정민: 그거 알아내러 왔어.

보냈다.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창밖을 봤다.

가로등 하나가 깜빡이고 있었다. 접촉 불량. 켜졌다 꺼졌다.

정민은 그 불빛을 보다가 눈을 감았다.

사라의 손이 떠올랐다.

7년 동안 같은 동작을 반복한 손.

들어 올리고. 바구니에 넣고. 들어 올리고. 바구니에 넣고.

그 손이 만든 것.

집. 저축. 배당금. 빨간 문. 노란 화분.

구조가 손을 보호했다.

손이 집을 만들었다.

마나시에선?

하린의 손이 떠올랐다.

장부를 넘기던 손.

장판 조각을 붙이던 손.

마지막 날 스위치를 내리던 손.

그 손은 집을 만들었나.

아니.

그 손은 문을 닫았다.

왜?

구조가 없어서.

정민은 눈을 떴다.

가로등이 다시 깜빡였다.

꺼졌다.

어둠.


-계속-



"작은 집. 하지만 집이었다. 사라의 집."

[ ‘감동? 아니다. 구조다.’ - 메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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