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도시는 배우지 않는다. 12장: 파리, 운영의 도시
4월 23일.
비행기가 착륙했다.
샤를 드 골 공항. 파리.
정민은 창밖을 봤다. 활주로. 다른 비행기들. 관제탑. 회색 하늘.
클리블랜드에서 열흘. 에버그린 협동조합.
사라의 손. 조셉의 말. 테드 하워드와의 면담.
메모장이 스무 페이지 넘게 찼다.
‘구조 + 습관 = 지속.’
‘시스템은 습관을 보호할 때만 배운다.’
‘내 손은 뭘 기억하나.’
마지막 질문이 계속 떠올랐다.
정민은 주머니에서 파견 통보서를 꺼냈다.
접힌 종이. 모서리가 더 닳아 있었다. 접힌 자국이 희게 변해 있었다.
‘파견지: 프라이부르크(독일), 도야마(일본), 타이베이(대만) 외 3개 도시’
파리는 목록에 없었다.
추가 일정. 클리블랜드에서 테드가 소개해줬다.
“파리에 SEMAEST라는 게 있어요.
지금은 SEM Paris Commerces로 이름이 바뀌었는데. 꼭 보세요.
공공이 시장에 개입하는 방식이 다릅니다.”
그래서 왔다.
지하철.
RER B선.
공항에서 파리 시내로.
창밖으로 풍경이 바뀌었다.
교외. 아파트 단지. 그래피티. 낡은 건물들. 그리고 파리.
회색 지붕. 굴뚝. 좁은 창문. 발코니에 화분.
생미셸 역에서 내렸다.
지상으로 올라왔다.
센강이 보였다. 다리. 노트르담 대성당. 공사 중이었다.
화재 복구. 크레인이 서 있었다.
바람이 불었다. 강 냄새. 축축한 냄새.
정민은 지도를 봤다. 휴대폰.
11구. 벨빌.
걸어야 했다. 30분.
걸었다.
파리의 골목.
런던과 달랐다. 클리블랜드와 달랐다.
좁은 골목. 돌바닥. 발소리가 울렸다.
카페. 빵집. 정육점. 치즈 가게. 작은 서점. 와인 가게.
간판이 오래됐다. 글씨가 손으로 쓴 것 같았다.
나무 간판. 철제 간판. 페인트가 벗겨진 간판.
사람들이 있었다.
테라스에 앉아 커피를 마시는. 바게트를 들고 걷는.
담배를 피우며 서 있는. 개를 산책시키는.
정민은 걸으면서 봤다.
가게들이 살아 있었다.
문을 닫은 곳이 없었다. 셔터가 내려간 곳이 없었다.
임대문의 종이가 없었다.
이상했다.
런던에도 빈 가게가 있었다. 클리블랜드에는 더 많았다.
하림지구는 절반이 비어 있었다.
여기는?
열한 시.
SEM Paris Commerces 사무실.
건물 앞에 도착했다. 5층 건물. 오래된 건물. 석조. 창문에 철제 난간.
간판.
‘SEM Paris Commerces’
파란 글씨. 파리시 로고.
문을 열고 들어갔다.
로비. 대리석 바닥. 발소리가 울렸다.
안내 데스크. 여자가 앉아 있었다. 안경. 스카프.
“봉주르.”
“봉주르. 저는… 약속이 있어요. 에마뉘엘 오스.”
“아, 네. 잠시만요.”
전화를 걸었다.
프랑스어로 뭔가 말했다. 빠르게.
정민은 알아듣지 못했다.
“3층으로 올라가세요. 엘리베이터 오른쪽이에요.”
엘리베이터를 탔다. 오래된 엘리베이터. 철제 문. 삐걱거렸다. 3층.
문이 열렸다.
여자가 서 있었다. 오십 대. 짧은 머리.
회색이 섞인. 안경. 회색 재킷. 검은 바지.
“정민 씨?”
“네.”
“에마뉘엘이에요. 반가워요.”
손을 내밀었다. 정민이 잡았다. 단단한 악수. 짧게.
“멀리서 왔네요.”
“한국에서요.”
“알아요. 테드가 연락했어요. 클리블랜드 잘 봤다면서요?”
“네. 많이 배웠어요.”
에마뉘엘이 웃었다. 입꼬리만 올라갔다. 눈은 정민을 살피고 있었다.
“여기는 좀 달라요. 보여줄게요.”
회의실.
창문으로 파리 지붕이 보였다.
회색 지붕. 굴뚝. 안테나. 멀리 에펠탑 끝이 보였다.
에마뉘엘이 프로젝터를 켰다. 화면이 떴다. 흰 벽에.
‘SEM Paris Commerces’‘Société d’Économie Mixte’
“혼합 경제 회사예요.”
에마뉘엘이 설명했다. 서서. 화면을 가리키며.
“공공과 민간이 함께 소유해요. 파리시가 대주주고. 51%.”
화면이 바뀌었다.
‘미션: 파리 상권의 다양성 보호’
“우리가 하는 일은 간단해요.”
에마뉘엘이 정민을 봤다.
“상가를 사요. 리모델링해요. 그리고 임대해요.”
“시가 직접요?”
“SEM이요. 시의 자회사 같은 거예요.
하지만 기업처럼 움직여요. 빠르게. 유연하게.”
정민이 메모장을 꺼냈다.
“왜 직접 사요?”
에마뉘엘이 창밖을 가리켰다. 파리의 지붕들.
“저 바깥 봤죠? 걸어오면서. 가게들 살아 있죠?”
“네.”
“그냥 된 게 아니에요. 개입했으니까.”
화면이 바뀌었다.
지도. 파리 11구. 구역이 색칠돼 있었다. 노란색. 빨간색. 파란색.
“Vital’Quartier 프로그램이에요. 2004년에 시작했어요.”
“이십 삼년 됐네요.”
“네. 그 사이에 540개 상가를 관리했어요.
매입하거나. 임대하거나. 리모델링하거나.”
정민이 숫자를 적었다.
‘540개. 23년.’
“공실이 생기면 우리가 사요.
아니면 건물주가 팔려고 하면 먼저 연락이 와요.”
“우선 매수권 같은 거요?”
“비슷해요. 법으로 정해진 건 아니고.
관계로 된 거예요. 20년 동안 쌓은.”
에마뉘엘이 정민을 봤다.
“신뢰예요. 우리가 사면 동네가 안 망한다는 걸 알거든요.”
화면이 바뀌었다.
사진. 서점. 작은 서점. 나무 책장. 낡은 간판. 'Librairie’라고 적혀 있었다.
“이게 우리가 살린 가게 중 하나예요. 벨빌의 서점.”
“서점이요?”
“네. 2015년이었어요. 프랜차이즈가 들어오려고 했어요.
임대료를 두 배로 부르고. 서점 주인은 못 버티겠다고 했죠.”
“그래서요?”
“우리가 건물을 샀어요. 서점 주인한테 시세보다 낮게 임대했어요.”
정민이 펜을 멈췄다.
“시세보다 낮게요?”
“네. 30% 낮게. 대신 조건이 있어요.”
에마뉘엘이 다음 슬라이드로 넘겼다.
계약서. 프랑스어. 조항들. 도장. 서명.
“15년 계약이에요. 중간에 못 나가요.
그리고 매출 데이터를 공유해요.”
“데이터요?”
“네. 분기마다. 매출. 방문객. 품목별 판매. 다 보내요.”
정민이 적었다.
‘15년 계약. 매출 데이터 공유.’
“돈 대신 데이터를 내는 거예요.”
“그 데이터로 뭘 해요?”
“상권을 분석해요. 어떤 업종이 살아남는지.
어떤 가게가 위험한지. 어디에 뭐가 부족한지.
그래서 다음 개입을 결정해요.”
에마뉘엘이 화면을 껐다.
“감으로 하지 않아요. 숫자로 해요.”
정민은 메모장을 봤다.
‘돈 대신 데이터.’
클리블랜드가 떠올랐다. 에버그린. 조셉의 말.
“감동으로 안 돼요. 숫자로 해야 해요.”
비슷했다. 다른 도시. 다른 방식. 같은 원리.
점심.
근처 카페.
에마뉘엘과 정민이 마주 앉았다. 작은 테이블. 대리석. 차가웠다.
크루아상. 커피. 에스프레소.
“궁금한 거 있어요?”
에마뉘엘이 물었다. 크루아상을 뜯으며.
정민이 커피를 마셨다. 진했다. 쓴맛.
“왜 이렇게까지 해요? 시가?”
에마뉘엘이 크루아상을 내려놓았다. 접시에. 부스러기가 떨어졌다.
“반대로 물을게요. 안 하면 어떻게 돼요?”
“프랜차이즈가 들어오겠죠.”
“그다음은?”
“임대료가 올라가고.”
“그다음은?”
“작은 가게들이 나가고.”
“그다음은?”
정민이 멈췄다.
에마뉘엘이 말했다.
“동네가 죽어요. 사람들이 떠나요.
관광객만 남아요. 똑같은 가게만 남아요.
스타벅스. 맥도날드. 자라. 그러면?”
“또 다른 곳이 뜨고.”
“그리고 거기도 죽어요. 반복이에요.”
에마뉘엘이 커피를 마셨다.
“젠트리피케이션. 알죠?”
“네.”
"우리는 그 반복을 끊으려는 거예요."
정민이 물었다.
"왜 이 일 해요? 직접."
에마뉘엘이 커피잔을 봤다. 잠깐.
"우리 할머니 가게가 있었어요. 빵집.
내가 열 살 때 사라졌어요. 임대료 때문에."
정민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때부터 생각했어요. 이건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고."
에마뉘엘이 정민을 봤다.
정민은 창밖을 봤다. 파리의 골목. 살아 있는 가게들.
돌아가면 저걸 말로 해야 한다. 숫자 없이. 전례 없이.
"근데 시가 시장에 개입하면…
부작용이 없어요? 비판도 있을 텐데."
에마뉘엘이 웃었다. 짧게.
“물론 있어요. 비판도 많아요.
시장을 왜곡한다고. 공정하지 않다고.
왜 특정 가게만 도와주냐고.”
“그럼요?”
“대답은 간단해요.”
에마뉘엘이 정민을 봤다. 똑바로.
“우리도 시장이에요. 다만 목적이 다를 뿐이에요.”
정민이 펜을 멈췄다.
“목적이 다르다.”
“네. 민간 시장은 수익이 목적이에요.
최대 수익. 최대 효율. 우리는 다양성이 목적이에요.
서점이 있고. 정육점이 있고. 빵집이 있고.
사람들이 걸어 다니고. 그게 목적이에요.”
에마뉘엘이 크루아상을 다시 들었다.
“둘 다 시장이에요. 규칙이 다를 뿐.”
정민은 적었다.
‘우리도 시장이다. 목적이 다를 뿐.’
오후 세 시.
벨빌 거리.
에마뉘엘이 직접 안내했다.
걸었다. 골목. 가게들. 돌바닥. 발소리.
“여기가 우리 구역이에요.”
손으로 가리켰다. 서점. 정육점. 치즈 가게. 빵집. 꽃집.
“저기 저 빵집. 우리 건물이에요. 저기 치즈 가게도. 저기 서점도.”
“다 샀어요?”
“네. 10년 동안. 하나씩.”
정민은 가게들을 봤다.
살아 있었다. 사람들이 들어갔다 나왔다.
봉투를 들고. 바게트를 들고.
“저 서점이 아까 말한 데예요.”
들어갔다.
작은 서점. 문이 삐걱거렸다. 나무 문.
책장이 빼곡했다. 천장까지. 사다리가 있었다. 나무 사다리. 닳아 있었다.
먼지 냄새. 종이 냄새. 오래된 냄새. 살아 있는 냄새.
카운터에 남자가 있었다. 육십 대. 흰 머리. 안경. 조끼. 책을 읽고 있었다.
“장!”
에마뉘엘이 불렀다.
장이 고개를 들었다. 안경 너머로 봤다.
“오, 에마뉘엘. 오랜만이네.”
책을 내려놓았다. 일어섰다. 카운터를 돌아 나왔다.
“손님 데려왔어. 한국에서.”
장이 정민을 봤다. 위아래로.
“한국? 멀리서 왔네.”
정민이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여기 뭐 하러?”
“도시를 보러요. 다른 도시들이 어떻게 하는지.”
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얼마나 됐어요?”
정민이 물었다.
“37년.”
“37년이요?”
장이 웃었다. 주름이 깊었다.
“아버지가 시작했어요. 1955년.
내가 이어받은 게 1990년.
그러니까 우리 가족으로 치면 72년.”
정민은 서점을 둘러봤다. 72년.
책장. 사다리. 카운터. 오래된 금전 등록기. 손때 묻은 나무.
“임대료 때문에 힘들었다고 들었어요.”
장의 표정이 변했다. 잠깐. 입술이 굳었다. 다시 풀렸다.
“힘들었죠. 2015년에. 건물이 팔렸어요. 투자 회사에.
새 주인이 임대료를 두 배로 올리겠다고.”
“그래서요?”
“나갈 뻔했어요. 37년. 아버지 때부터. 다 끝나는 줄 알았어요.”
장이 책장을 봤다. 손으로 책등을 쓸었다. 천천히.
“그때 SEM이 연락 왔어요.”
“에마뉘엘이요?”
“아니. 다른 사람. 근데 같은 조직.
건물을 사겠다고.
그리고 나한테 임대하겠다고.”
장이 정민을 봤다.
“임대료 동결. 15년 계약.”
정민이 물었다.
“조건이 뭐였어요?”
“매출 보고. 분기마다. 그리고 지역 행사 참여.
1년에 네 번. 동네 축제. 책 읽기 모임. 그런 거.”
“그게 다요?”
“그게 다예요.”
장이 카운터 뒤로 갔다. 서랍을 열었다. 나무 서랍. 삐걱거렸다.
종이를 꺼냈다.
계약서. 접혀 있었다. 오래된 종이. 누렇게 변해 있었다.
펼쳤다.
도장이 찍혀 있었다. 두 개. 잉크가 번져 있었다.
“이게 그 계약서예요.”
정민은 도장을 봤다.
‘SEM Paris Commerces’
‘Ville de Paris’
파리시.
두 개의 도장.
“도장이 두 개네요.”
“네. SEM이랑 시. 둘 다 책임진다는 거예요.”
정민이 도장을 봤다.
잉크가 번져 있었다. 종이에 스며 있었다. 10년 전 잉크.
마나시가 떠올랐다.
상생협약. 서명. 악수. 사진. 기사.
도장은 있었다. 어디 갔을까. 그 서류는?
정민이 물었다.
“이 계약서. 잘 보관하시네요.”
장이 웃었다.
“당연하죠. 이게 내 가게가 여기 있는 이유니까.”
장이 계약서를 접었다. 천천히. 접힌 자국을 따라.
“말은 사라져요. 종이는 남아요.”
서랍에 다시 넣었다.
“10년 됐는데 아직 있어요. 10년 뒤에도 있을 거예요.”
다섯 시.
거리로 나왔다.
에마뉘엘이 말했다.
“어때요?”
정민이 거리를 봤다.
가게들. 사람들. 살아 있는 골목. 해가 기울고 있었다.
건물 그림자가 길어지고 있었다.
“마나시에서는…”
말이 멈췄다.
“마나시?”
“제가 사는 도시요. 거기서는… 선언만 했어요.”
“선언?”
“상생협약. 임대료 동결. 좋은 말들.
서명. 악수. 사진. 근데 계약이 아니었어요. 구속력이 없었어요.”
에마뉘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차이예요.”
“뭐가요?”
“선언은 사라져요. 계약은 남아요.”
에마뉘엘이 장의 서점을 돌아봤다. 창문에 책들이 보였다.
“저 도장이요. 번진 잉크. 저게 10년 전에 찍힌 거예요.
아직도 있죠. 10년 뒤에도 있을 거예요.”
정민도 서점을 봤다.
“도장이 남아 있으니까.”
“네. 말은 사라져요. 도장은 남아요. 계약은 남아요. 책임은 남아요.”
정민은 대답하지 않았다.
마나시의 상생협약이 떠올랐다.
서명. 악수. 사진. ‘상생협약 체결식’. 현수막. 박수.
그 서류는 어디 갔을까. 파일 어딘가에. 아니, 폐기됐을 수도.
아무도 찾지 않았다. 아무도 책임지지 않았다.
도장은 있었다. 잉크는 스미지 않았다.
저녁.
숙소.
작은 호텔. 마레 지구. 오래된 건물. 삐걱거리는 계단.
정민은 방에 들어갔다.
침대에 앉았다.
창밖을 봤다. 파리의 밤. 지붕들. 굴뚝. 안테나. 불빛.
메모장을 펼쳤다.
오늘 적은 것.
‘SEM Paris Commerces. 혼합 경제 회사.’
‘시가 대주주. 51%. 하지만 기업처럼 움직인다.’
‘상가 매입 → 리모델링 → 임대.’
‘시세보다 낮게. 대신 데이터.’
‘15년 계약. 매출 데이터 공유.’
‘540개 상가. 20년.’‘우리도 시장이다. 목적이 다를 뿐.’
펜을 들었다.
새 줄.
‘선언은 사라진다. 계약은 남는다.’
‘개입은 선언이 아니라 계약이다.’
‘도장 = 책임의 무게.’‘잉크가 스민다 = 책임이 스민다.’
적었다.
메모장을 봤다.
마나시를 생각했다.
상생협약. 서명. 악수. 사진.
도장은 있었다.
하지만 책임은?
정민이 적었다.
‘마나시의 도장:’
‘- 찍혔다.’‘- 사진 찍혔다.’
‘- 기사 났다.’‘- 그리고 사라졌다.’
‘- 파일 어딘가에.’‘- 아무도 안 찾았다.’
‘- 그래서 책임도 사라졌다.’
펜을 내려놓았다.
휴대폰을 꺼냈다.
사진을 찾았다. 오늘 찍은 것.
장의 서점. 책장. 사다리.
계약서. 도장. 번진 잉크.
하나를 골랐다. 계약서. 도장이 찍힌 부분. 클로즈업.
하린에게 보냈다.
사진 1장.
문장 1줄.
정민: 도시가 손을 대는 방식은 말이 아니라 도장이더라.
보냈다.
잠시 후 답이 왔다.
하린: 도장이요?
정민: 응. 계약서에. 15년 계약.
정민: 10년 전에 찍은 건데 아직 있어.
정민: 잉크가 번져서 종이에 스며 있었어.
하린: …
하린: 우리도 도장 찍었는데.
정민이 화면을 봤다.
정민: 그 도장 아직 있어요?
하린: …
1분.
2분.
답이 왔다.
하린: 없어요.
하린: 서류도 없고.
하린: 어디 갔는지도 몰라요.
정민은 창밖을 봤다.
파리의 밤. 지붕들. 굴뚝. 불빛.
정민: 여긴 10년 된 계약서가 서랍에 있더라.
정민: 도장 잉크가 번져서 종이에 스며 있었어.
정민: 그게 책임인 것 같아.
보냈다.
하린이 답하지 않았다.
1분.
2분.
3분.
답이 왔다.
하린: 잉크가 스민다.
하린: 그게 책임이구나.
하린: 우리 도장은 스미지 않았네요.
정민은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메모장을 다시 폈다.
펜을 들었다.
‘잉크가 스민다 = 책임이 스민다.’
‘스미지 않은 잉크 = 사라지는 책임.’
적었다.
메모장을 덮었다.
창밖을 봤다.
센강 쪽으로 불빛이 보였다. 다리. 반사. 물결.
마나브리지가 떠올랐다. 마나시의 다리. 미래구와 하림지구를 잇는.
연결처럼 보이지만 경계였던 것.
파리의 다리는 달랐을까.
정민은 모르겠었다.
눈을 감았다.
장의 손이 떠올랐다. 책등을 쓸던 손. 계약서를 접던 손.
37년. 72년. 책장. 사다리. 먼지 냄새.
그 손이 지킨 것.
도장이 지킨 것.
마나시에선?
하린의 손이 떠올랐다. 스위치를 내리던 손.
도장은 있었다. 책임은 없었다.
그래서 손이 스위치를 내렸다.
정민은 눈을 떴다.
창밖. 파리의 밤. 불빛.
다시 눈을 감았다.
잠이 오지 않았다.
-계속-
"말은 사라져요. 종이는 남아요."
"우리 도장은 스미지 않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