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 “하림지구의 철거”
S# 17. 하림지구 4블록 펜스 앞 / 3월 9일, 새벽 6시
화면에 자막이 뜬다.
‘3월 9일. 새벽 여섯 시.’
하림지구 4블록.
정민이 펜스 앞에 서 있다.
눈 밑이 어둡다. 그늘이 져 있다. 잠을 못 잔 얼굴.
손으로 눈을 한 번 비빈다.
펜스에 현수막이 걸려 있다.
‘하림지구 4블록 재정비 사업’
‘미래구 도시재생본부’
정민의 시선이 '미래구 도시재생본부’에서 멈춘다.
포클레인이 멀리 서 있다. 노란색.
아직 움직이지 않는다. 새벽이라서. 사람이 없다.
크레인이 접혀 있다.
S#18. 철거 구역 바깥 - 김씨 철물점 / 아침
철거 구역 바로 바깥.
건물이 하나 있다. 2층짜리. 낡은 것.
외벽에 금이 가 있다. 페인트가 벗겨져 있다.
원래 크림색이었던 것 같다. 지금은 회색에 가깝다.
1층에 셔터가 있다. 반쯤 올라가 있다.
안에 불이 켜져 있다. 형광등. 깜빡거린다. 불규칙하게. 지지직. 지지직.
셔터 위에 글씨가 있다. 페인트로 쓴 것.
‘김씨네 철물’
글씨가 바래 있다. '김’의 'ㄱ’이 거의 안 보인다.
정민이 셔터 앞으로 간다.
안에서 소리가 난다.
물건 옮기는 소리. 쿵. 쿵. 무거운 것이 바닥에 닿는 소리.
안을 들여다본다.
가게 안이 보인다. 좁다. 10평쯤.
선반이 벽을 따라 있다. 물건이 가득하다.
못. 나사. 망치. 드라이버. 렌치. 전선. 테이프. 페인트통. 사다리.
30년치 물건. 먼지 냄새. 기름 냄새. 쇠 냄새. 뒤섞여 있다.
남자가 있다.
육십 대쯤. 작업복을 입고 있다. 회색. 낡은 것.
페인트 자국이 여기저기 묻어 있다. 빨간색. 흰색. 노란색. 마른 것. 오래된 것.
박스를 들고 있다. 큰 것. 무거워 보인다.
안에 공구가 들어 있다. 금속끼리 부딪히는 소리가 난다. 찰랑. 찰그랑.
남자가 정민을 본다.
남자 : 뭐요.
정민 : 안녕하세요. 현장 확인하러요.
남자 : 현장? 다 부쉈잖아요. 뭘 확인해요.
남자가 박스를 바닥에 내려놓는다. 쿵. 바닥이 울린다. 장판이 출렁인다.
남자 : 구청이요?
정민 : 네.
남자 : 도시재생?
정민 : 네.
남자가 웃는다. 웃음 같지 않다. 코웃음에 가깝다. 숨이 코로 새는 소리.
남자 : 재생. 그래요. 재생.
남자가 선반으로 간다.
뭔가를 집는다.
드라이버. 오래된 것. 손잡이가 나무다. 닳아 있다. 반들반들하다.
수천 번 잡아서 그렇게 된 것. 손가락 자국이 패여 있다.
남자 : 이거요. 아버지 때부터 있던 거예요. 40년 됐어요.
드라이버를 선반에 내려놓는다. 딸그랑. 나무와 쇠가 부딪히는 소리.
남자 : 아버지가 이 가게 시작했어요. 내가 스물두 살 때 물려받았고. 30년 했어요. 여기서. 근데 이제 나가래요.
정민 : 보상은요?
남자 : 보상? 3천이요. 3천만원. 30년을 3천으로 바꿔요? 그게 보상이에요?
남자가 박스를 다시 든다. 허리가 휜다. 무릎에서 소리가 난다. 뚝.
남자 : 이탈이라고 하던데요. 서류에. '이탈’이라고 쓰여 있던데.
정민 : …
남자 : 이탈이 아니에요. 축출이에요.
S#19. 철물점 내부 - 장판 조각 / 아침
정민이 가게 안을 둘러본다.
바닥에 장판이 깔려 있다.
오래된 것. 꽃무늬. 색이 바랬다.
빨간 꽃이 분홍이 되어 있다. 노란 잎이 크림색이 되어 있다.
모서리가 들떠 있다. 접착제가 마른 것. 끝이 말려 있다.
정민이 쪼그려 앉는다.
들뜬 모서리를 만진다. 손가락으로.
장판이 바스락거린다. 마른 소리.
장판 조각이 떨어져 나온다.
손가락 세 개 크기. 꽃무늬.
정민이 그것을 집어 든다.
가볍다. 먼지가 손가락에 묻는다. 회색.
표면을 문지른다. 거칠다. 닳아 있다. 수십 년 밟혀서 그렇게 된 것.
멈춘다.
본다. 2초.
남자 : 그거요. 아버지가 깔았어요. 내가 어릴 때. 40년 됐어요.
남자가 장판을 본다. 바랜 꽃무늬를.
남자 : 가져가요. 어차피 버릴 거예요. 여기 다 부수면.
정민이 장판 조각을 손에 쥔다.
손바닥에 먼지가 찍힌다. 회색.
손을 오므린다. 장판 모서리가 손바닥을 누른다. 날카롭지 않다. 닳아서.
S# 20. 버스 정류장 / 아침
정민이 버스 정류장으로 걸어온다.
벤치에 누가 앉아 있다.
하린이다.
하린이 고개를 든다.
정민을 본다.
놀란 표정. 눈이 커진다. 금방 사라진다.
하린 : 여기 왜 왔어요. 이 시간에.
정민 : 현장 보러요.
하린 : 현장.
하린이 웃는다. 입꼬리만 올라가는.
하린 : 나도요. 여기 사람들이 어디 갔나 보려고요. 다 갔더라고요. 이탈이래요. 서류에는.
정민 : 축출이래요.
하린이 고개를 돌린다. 정민을 본다.
하린 : 뭐라고요?
정민 : 거기 주인이요. 철물점. 축출이래요.
하린이 대답하지 않는다.
멀리서 포클레인 소리가 들린다. 쿵. 쿵. 무언가 무너지는 소리.
버스가 온다.
S# 21. 버스 안 / 아침
버스에 탄다.
하린은 앞쪽에 앉는다.
정민은 뒤쪽에 앉는다.
나란히 앉지 않는다.
버스가 출발한다.
창밖으로 하림지구가 지나간다.
낮은 건물들. 셔터 내린 가게들. 펜스. 포클레인. 먼지.
버스가 마나브리지를 건넌다.
정민이 주머니 속 장판 조각을 만진다.
모서리가 날카롭다. 닳은 표면.
창밖.
하림지구가 멀어진다.
프래그먼트가 있던 골목은 보이지 않는다. 건물에 가려서.
이 시나리오의 지문은
시각과 청각 너머의 감각을 포함합니다.
촉각, 후각, 온도, 질감. 촬영 지시가 아니라
이 공간이 어떤 감각으로 존재해야 하는지를 정한 것입니다.
감정 지문대신
배우의 손에 사물을 주고,
장면에 물리적 시간을 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