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 원그래프

소설 도시는 배우지 않았다. 3장: 하림지구의 철거

by 마나월드ManaWorld
main.png 1부 3장: 하림지구의 철거


3월 9일. 새벽 여섯 시.

정민은 하림지구 4블록 앞에 서 있었다.

어제 회의가 끝나고 잠을 못 잤다. 천장을 보았다.

형광등 잔상이 눈에 남아 있었다.

하린의 목소리가 귀에 남아 있었다.

“함께가 이렇게 외로운 단어였나.”

그 말이 계속 맴돌았다.

새벽 네 시에 일어났다. 버스를 탔다. 여기로 왔다.

왜 왔는지 정확히 몰랐다. 그냥 와야 할 것 같았다.

현장을 봐야 할 것 같았다. 숫자 말고. 그래프 말고. 진짜를.



아니 하린이었다 라면서펜스가 쳐져 있었다.

철망. 2미터 높이. 녹이 슬어 있었다. 군데군데.

펜스에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하림지구 4블록 재정비 사업’‘미래구 도시재생본부’

정민이 속한 부서 이름이었다.

정민이 만든 보고서에 들어가는 이름이었다.

현수막 모서리가 찢어져 있었다.

바람에 펄럭였다. 펄럭일 때마다 천이 젖은 소리를 냈다. 퍼덕. 퍼덕.

펜스 안쪽으로 포클레인이 보였다.

노란색. 크레인이 접혀 있었다.

아직 움직이지 않았다. 새벽이라서. 사람이 없었다.

건물이 있었다. 반쯤 무너진 것. 2층짜리. 1층 벽이 뚫려 있었다.

안이 보였다. 콘크리트. 철근. 먼지. 전선이 끊어져 매달려 있었다.

공기가 차가웠다. 하늘이 회색이었다.

해가 아직 안 떴다. 동쪽 하늘만 조금 밝았다.


정민은 펜스를 따라 걸었다.

발밑에 물웅덩이가 있었다. 어젯밤에 비가 왔다. 지금은 그쳐 있었다.

운동화 밑창이 젖은 땅을 밟았다. 찍. 찍. 소리가 났다.

펜스 한쪽 끝에 건물이 하나 있었다. 철거 구역 바로 바깥. 아직 안 무너진 것.

2층짜리. 낡은 것. 외벽에 금이 가 있었다.

페인트가 벗겨져 있었다.

원래 크림색이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회색에 가까웠다.

1층에 셔터가 있었다. 반쯤 올라가 있었다.

안에 불이 켜져 있었다. 형광등. 깜빡거렸다. 불규칙하게.

정민은 멈췄다.

셔터 위에 글씨가 있었다. 페인트로 쓴 것. 손으로 쓴 것.

‘김씨네 철물’

글씨가 바래 있었다. '김’의 'ㄱ’이 거의 안 보였다.


안에서 소리가 났다.

물건 옮기는 소리. 쿵. 쿵. 무거운 것이 바닥에 닿는 소리.

정민은 셔터 앞으로 갔다.

안을 들여다보았다.

가게 안이 보였다. 좁았다. 10평쯤. 선반이 벽을 따라 있었다.

물건이 가득했다.

못. 나사. 망치. 드라이버. 렌치. 전선. 테이프. 페인트통. 사다리.

30년치 물건.

남자가 있었다.

육십 대쯤. 작업복을 입고 있었다. 회색. 낡은 것.

페인트 자국이 여기저기 묻어 있었다. 빨간색. 흰색. 노란색.

남자가 박스를 들고 있었다.

큰 것. 무거워 보였다.

안에 공구가 들어 있었다.

망치. 드라이버. 렌치. 금속끼리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찰랑.

남자가 정민을 보았다.

멈췄다.

“뭐요.”


정민은 셔터 안으로 들어갔다.

“안녕하세요.”

“…”

남자가 박스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쿵. 바닥이 울렸다.

“뭐 하러 왔어요. 이 시간에.”

“현장 확인하러요.”

“현장?”

남자가 고개를 돌렸다. 펜스 쪽을 보았다.

철거 구역. 무너진 건물들.

“저기요? 다 부쉈잖아요. 뭘 확인해요.”

정민은 대답하지 않았다.

남자가 다시 정민을 보았다. 위아래를 훑어보았다.

코트. 정장 바지. 구두 아닌 운동화. 젖어 있는.

“구청이요?”

“네.”

“도시재생?”

“네.”

남자가 웃었다. 웃음 같지 않았다. 코웃음에 가까웠다.

“재생. 그래요. 재생.”


남자가 선반으로 갔다.

물건들 사이에서 뭔가를 찾았다. 손이 익숙하게 움직였다.

뭔가를 집었다.

드라이버. 오래된 것. 손잡이가 나무였다. 닳아 있었다. 반들반들했다. 수천 번 잡아서.

“이거요.”

정민에게 보여주었다.

“아버지 때부터 있던 거예요. 40년 됐어요.”

정민은 드라이버를 보았다.

손잡이에 금이 가 있었다. 작은 금. 그래도 부러지지 않은.

“아버지가 이 가게 시작했어요.

내가 스물두 살 때 물려받았고.

30년 했어요. 여기서.”

남자가 드라이버를 선반에 내려놓았다.

“근데 이제 나가래요.”

“…”

“재정비래요. 개발이래요.”

남자가 창밖을 보았다. 펜스. 포클레인. 무너진 건물.

“저것도 다 가게였어요.

국숫집. 이발소. 세탁소. 반찬가게. 다 있었어요.”

“…”

“다 나갔어요.”

남자가 고개를 돌렸다. 정민을 보았다.

“나만 남았어요. 아직.”


정민이 물었다.

“보상은요?”

“보상?”

남자가 눈을 가늘게 떴다.

“보상 받았죠. 이주비.”

“…”

“얼마인지 알아요?”

정민은 고개를 저었다.

“3천이요. 3천만원.”

남자가 손가락 세 개를 펴 보였다.

“30년을 3천으로 바꿔요? 그게 보상이에요?”

정민은 대답하지 않았다.

남자가 손을 내렸다.

“다른 데 가게 얻으려면 보증금만 5천이에요.

월세 200이에요. 어디서 나와요. 그 돈이.”

“…”

“그래서 접는 거예요. 그냥.”

남자가 박스를 다시 들었다. 무거웠다. 허리가 휘었다.

“이탈이라고 하던데요.”

“네?”

“서류에요. 구청 서류. '이탈’이라고 쓰여 있던데.”

정민의 손이 움직였다. 주머니 쪽으로. 수첩이 있는 쪽으로. 멈췄다. 손을 내렸다.

남자가 박스를 들고 정민을 보았다.

“이탈이 아니에요.”

“…”

“축출이에요.”


정민은 가게 안을 둘러보았다.

선반. 공구. 박스. 먼지. 형광등 깜빡임.

바닥에 장판이 깔려 있었다.

오래된 것. 꽃무늬. 색이 바랬다. 빨간 꽃이 분홍이 되어 있었다.

노란 잎이 크림색이 되어 있었다. 모서리가 들떠 있었다. 접착제가 마른 것.

정민은 쪼그려 앉았다.

들뜬 모서리를 만졌다. 손가락으로.

장판 조각이 떨어져 나왔다. 손가락 세 개 크기. 꽃무늬.

정민은 그것을 집어 들었다.

가벼웠다. 먼지가 묻어 있었다. 뒷면에 접착제 자국이 있었다. 누렇게 마른 것.


“그거요.”

남자가 말했다.

정민이 고개를 들었다.

남자가 박스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쿵.

“아버지가 깔았어요. 내가 어릴 때.”

“…”

“40년 됐어요. 그 장판.”

남자가 장판을 보았다. 바랜 꽃무늬를.

“여기서 걸었어요. 아버지가. 어머니가. 나도. 우리 애들도.”

“…”

“다 걸었어요. 이 바닥.”

정민은 장판 조각을 보았다.

손바닥 위에 올려져 있었다. 가벼웠다. 40년치 치고는.

“가져가요.”

“네?”

“어차피 버릴 거예요. 여기 다 부수면.”

남자가 고개를 돌렸다. 다시 박스를 들었다.

“가져가요. 쓸 데 있으면.”


정민은 일어섰다.

장판 조각을 코트 주머니에 넣었다. 조심스럽게.

“감사합니다.”

“뭐가요.”

남자가 박스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

셔터 밑으로. 트럭이 서 있었다.

작은 것. 1톤 트럭. 짐이 반쯤 실려 있었다.

정민은 가게 안에 서 있었다.

선반. 공구. 먼지. 형광등 깜빡임. 빈자리들. 물건이 빠진 자리들.

밖에서 포클레인 소리가 났다. 쿵. 멀리서. 철거가 시작된 것 같았다.


정민은 가게를 나왔다.

셔터 밑을 지났다.

남자가 트럭에 박스를 싣고 있었다. 정민을 보지 않았다.

큰길로 걸었다.

버스 정류장이 보였다.

벤치에 누가 앉아 있었다.

하린이었다.



하린이 고개를 들었다.

정민을 보았다.

놀란 표정. 눈이 커졌다. 금방 사라졌다.

“여기 왜 왔어요.”

“…”

“이 시간에.”

정민은 벤치 옆에 섰다. 앉지 않았다.

“현장 보러요.”

“현장.”

하린이 웃었다. 어제 그 웃음. 입꼬리만 올라가는.

“나도요.”

“…”

“여기 사람들이요. 어디 갔나 보려고요.”

하린이 철거 구역 쪽을 보았다.

펜스. 포클레인. 무너진 건물들. 먼지.

“다 갔더라고요.”

“…”

“이탈이래요. 서류에는.”

정민은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장판 조각이 손가락에 닿았다.

모서리가 날카로웠다.

“축출이래요.”

정민이 말했다.

하린이 고개를 돌렸다. 정민을 보았다.

“뭐라고요?”

“거기 주인이요. 철물점. 축출이래요.”

하린은 대답하지 않았다.

정민도 말이 없었다.

포클레인 소리가 들렸다. 쿵. 쿵. 무언가 무너지는 소리.


버스가 왔다.

150번. 미래구행.

하린이 일어섰다. 버스에 탔다.

정민도 탔다.

나란히 앉지 않았다. 하린은 앞쪽. 정민은 뒤쪽.

버스가 출발했다.


창밖으로 하림지구가 지나갔다.

낮은 건물들. 셔터 내린 가게들. 펜스. 포클레인. 먼지.

골목이 스쳐 지나갔다.

프래그먼트가 있던 골목은 보이지 않았다. 건물에 가려서.

버스가 마나브리지를 건넜다.

강이 보였다. 마나강. 회색 물. 아침 빛이 수면 위에서 흔들렸다. 반짝거렸다.

다리를 건너자 미래구가 나타났다.

유리 건물들. 높은 것들. 깨끗한 것들.

정민은 주머니 속 장판 조각을 만졌다.

닳은 모서리. 꽃무늬의 돌기. 접착제 자국의 거친 면.

버스 창문에 물방울이 맺혔다. 언제 비가 왔는지 몰랐다.

아니, 안 왔다. 창문 안쪽이었다. 입김. 누군가의.

정민은 손가락으로 창문을 닦았다.

밖이 선명해졌다.

미래구가 보였다. 높은 건물들. 유리. 반짝임.

뒤로 하림지구가 멀어지고 있었다. 낮은 건물들. 먼지. 포클레인.


-계속-



"이탈이 아니에요."

"축출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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