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통의 손편지는 그 무엇보다 값진 선물이다
어릴 적 나의 가장 큰 취미는 편지를 주고받는 것이었다. '펜팔' 이라고 일컬어지는 이 행위는 열 살 남짓한 꽤 어린 나이였음에도 내게 큰 만족감을 주었다. 같은 반 여자아이들과 편지를 주고받았던 것은 고등학교 시절까지 계속되었던 기본 중의 기본이었지만 나는 그보다 장거리 펜팔을 더 즐겼다.
우표와 소인이 찍혀 풀로 봉해진 상태의 편지봉투를 여는 것은 마치 귀중한 보물상자를 처음 여는 것과도 같은 짜릿함이 있었고 편지와 함께 동봉되는 말린 꽃잎이나 나뭇잎은 그렇게 낭만적일 수가 없었다.
내 첫 펜팔 상대는 어린 시절 우리 가족이 살던 신촌의 어느 작은 단칸방 집 주인 딸이었던 언니로 시작되었다. 그 후 엄마 친구 딸들을 거쳐 동급생들과 그 언니, 여동생들로 점점 늘어갔고 심지어는 만화 잡지 펜팔해요 코너에서 소개되는 얼굴도 모르는 또래 여학생들로까지 확대되었다. 내용은 지금 보면 정말 별 거 없겠지만 정성은 가득 담긴 편지들이었다. 편지지 색에 맞춘 몇 가지 펜으로 한 줄 한 줄 색을 바꿔 쓰기도 하고 편지지를 아예 그림을 그려 직접 만들기도 했었다. 또는 큼지막한 종이에 깨알만한 글씨로 가득 채워 적기도 하고, 직접 지은 시나 유행하는 노래 가사를 적어 넣기도 했다. 스티커나 작은 메모지 따위를 동봉하는 건 우리들 사이에서는 하나의 예의였다.
고등학생이 되자 국제 펜팔에 로망이 생겼다. 테두리에 빨간색과 파란색이 번갈아가며 칠해져 있는 살짝 바랜 봉투에 찍힌 AIR MAIL 이라는 글자는 왜 그리 멋져 보이던지! 국제 펜팔은 내 펜팔 생활의 끝판왕 같은 기분이 들었고 외국에서 온 편지는 나에게 마치 바다 위로 둥둥 떠내려 온 유리병 속의 쪽지처럼 신비롭기까지 했다. 열일곱 되던 봄, 나는 첫 국제 펜팔 친구를 만들었다. 일본의 마쓰야마(松山)라는 시골 마을에 사는 동갑내기 소녀였던 그녀는 내 첫 상대로 더할 나위 없었다. 친절하고 성실했으며 글씨가 아주 예뻤다. 그녀와 나는 5년 정도 펜팔을 지속했고 두 번 만났다. 그 후 그녀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게 되면서 이삼 년 연락이 뜸했었지만 다시 연결되었고, 현재는 이메일과 카카오톡으로 연락을 주고받고 있다. 작년 여름에는 한국으로 여행을 왔던 그녀와 그녀의 가족들을 내 집으로 초대해 저녁을 대접했는데 그것은 나의 아주 소중한 추억거리 중 하나가 되었다. 이외에도 나는 다양한 나라의 사람들과 펜팔을 했지만 아쉽게도 그녀 이외에는 현재 대부분 연락이 끊긴 상태다.
친구에게 조만간 우체국 공무원 시험이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얘기를 들었다. 우려했던 일이었다. 실제로 몇몇 국제 펜팔 사이트에 가보면 대부분 채팅 어플로 연락하기를 원한다. 이메일로 연락을 주고받는 것도 시간이 걸리니 더 빠르고 즉시 답변이 가능한 쪽을 선호하는 것이다. 나는 거절한다. 가능한 한 편지를 주고받기를 원하는 사람을 찾으려 하고 여의치 않으면 이메일을 이용한다. 바로바로 대화하는 편리함보다는 생각해서 글을 쓰는 쪽이 좋고, 그 글도 컴퓨터 키보드로 작성한 것 보다는 손글씨로 쓴 것이었으면 하는 조금은 시대에 뒤떨어졌을지도 모를 고집 때문이다.
이제 막 29개월에 접어든 아이를 온종일 돌보며 펜팔을 지속하기란 생각처럼 쉽지 않다. 내 아이가 교육 기관에 가게 되거나 자신만의 시간을 즐길 수 있을 만큼 자라면 바로 펜팔을 다시 시작하고 싶다. 나는 지금도 빨간 우체통을 보면 설렌다. 열 살의 어느 날 신촌에서 온 첫 편지를 뜯어볼 때의 그 두근거림은 아직도 내 안에 오롯이 살아 있으니까.
지금까지 내게 온 수많은 편지들은 지금도 방 한켠에 보관되어 있다. 엄마의 모진 구박에도 필사적으로 지켜낸 내 보물상자다.
그 노란 상자 안에는 내 어린 시절이, 내 추억이, 내 첫사랑이, 내 잃어버린 동심이 고스란히 간직되어 있다.
언제부터인가 그 상자 안에 들어가는 편지의 양이 현저하게 줄긴 했지만 앞으로도 꾸준히 모아 보관할 생각이다. 나이를 더 먹어 머리가 희끗희끗한 할머니가 되면 나는 내 노란 상자를 열어 하루하루 조금씩 나의 지나온 시간들을 꺼내 보려고 한다. 할머니가 된 내가 펼쳐 보는 나의 첫 연애편지는 어떤 느낌으로 다가올까. 어쩌면 세월 속에 잊혀져 간 내 안의 소녀가 다시금 살짝 고개를 내밀지도 모르겠다. 벌써부터 조금 설렌다 히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