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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까망물고기 Mar 28. 2019

가슴 이야기

A컵이든, F컵이든, 혹은 무컵이든

예쁜 내 속옷들. 이젠 하나도 맞지 않는다.


나는 목욕을 참 좋아한다. 스트레스가 쌓였거나 몸이 찌부둥할 때 가장 먼저 생각나는 건 뜨끈뜨끈한 물과 사우나다. 두세 시간 동안 땀을 쫙 빼고 나면 거짓말처럼 기분이 좋아지고 또 피로도 풀린다. 그런 나에게 있어 아이를 임신했을 때 가장 힘들었던 것 중 하나는 목욕탕에 가지 못했던 것이었다. 정확히는 임신 중기에 몇 번 갔던 것 같다. 탕 안에 들어가지 못했을 뿐.. 들어가는 사람들도 있다지만 다소 늦은 나이에 첫아이를 임신했던 나는 책에서 알려주는 작은 사항 하나도 쉽게 거스르지 못했고, 아이를 낳고 나서도 한참 후에나 목욕탕에 갈 수 있었다.

목욕탕은 참으로 원초적인 곳이 아닐 수 없다. 모두가 나체로 있는 건 당연하거니와 어쩌면 조금 민망하거나 적나라한 포즈 또한 나올 수도 있는 곳이다. 어디선가 여자들은 무리를 만드는 습성이 있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그 말이 맞는다면 목욕탕에서 또한 적용될 수 있는 말이 아닐까 싶다.

대체적으로 목욕탕에 자주 오는 단골손님들끼리 삼삼오오 무리가 형성된다. 이는 대부분 사우나 안에서의 대화로 한껏 빛을 발한다. 나는 아직 그 무리에 끼어들기엔 내공이 부족하여 보통 구석에서 조용히 경청하는 쪽이다. 다 같이 와하하 웃어야 할 주제라면 그저 빙긋이 웃는 정도랄까. 누군가 내게 어떤 질문을 하면 대답을 하는 정도랄까.




몇 주 전의 일이다. 그날도 어김없이 사우나 안에서는 대여섯 명으로 구성된 무리가 형성되어 있었다. 나는 언제나처럼 한쪽 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아 혹시나 민폐가 될세라 무릎을 가슴 쪽으로 모아 세웠다. 시답지 않은 이야기가 오가던 중 무리의 중심축으로 보이는 여자가 들어왔다.

그녀는 사우나 중심에 턱 자리를 잡고 앉아 허리를 곧게 펴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시작했다. 사십 대 후반 정도 되었으려나. 성격도 호탕하고 목소리도 큰 전형적인 여장부 스타일의 여자였다. 그때 다른 한 여자가 말을 꺼냈다.

"어머 언니 가슴 너무 예쁘다."

그러자 사우나 안의 모든 시선이 여장부 여자의 가슴으로 향했다.

"그래요? 나 이거 수술한 건데. 몇 년 됐어요."

"정말요? 하나도 티가 안 나네. 어쩜 그렇게 자연스러워요?"

"요새는 기술이 좋아서 티가 많이 안 나요. 그리고 나처럼 살집이 좀 있는 여자들은 마른 여자보다 더더욱 티가 안 나고."

"어머 그렇구나. 진짜 예쁘네~"

나는 슬쩍슬쩍 그 여자의 가슴을 훔쳐보며 조용히 듣고 있었다. 얘기는 계속해서 가슴 얘기로 흘러갔다. 비용이 얼마고, 또 얼마나 아프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수술을 하고 등등..

그때 나와 반대쪽 구석에 앉아있던 한 여자가 슬며시 일어나 밖으로 나갔고 문이 닫히는 순간, 주제는 나간 여자의 가슴으로 바뀌었다.

"방금 나간 여자 가슴 봤어요?"

"봤어요 봤어요. 수술 안 한 거 같은데 크고 예쁘네. 근데 엉덩이가 좀 없다."

"그러게. 엉덩이만 좀 있었어도 진짜 예쁜 몸매일 텐데.."

"아유 우리가 봐도 저렇게 가슴이 크면 너무 예쁜데, 남자들이 보면 오죽하겠어요."

"그러지~ 그래서 내가 수술한 거라니까요. 그래도 뭐가 만질 게 있어야 남자들이 좋아하지 오호호호~"

"맞지~ 가슴 없는 여자들 정말 볼품없잖아요. 남자들이 정말 싫어한대요."




내 가슴은 아이를 낳기 전엔 소위 말하는 꽉 찬 B컵이었다. 큰 가슴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불만도 없었다. 전체적으로 마른 체형인 내게 적당한 크기라고 생각했고 가슴 크기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임신을 하고 아이를 낳아 모유 수유를 하면서 내 가슴은 F컵까지 커졌다. 나는 내 가슴이 그렇게까지 커질 거라고는 상상조차 못했었다. 거짓말 안 보태고 아기 머리만 한 크기까지 커졌으니까. 나는 유난히 모유 양이 많아서 초유가 나온 지 이틀 만에 젖양을 줄이는 크림을 발라야만 했었다. 지긋지긋한 유선염과 싸우며 16개월간 모유 수유를 하고 단유 마사지를 끝내고 왔더니 내 가슴은 A컵보다도 더 작아져 있었다.

임신 전에 입었던 속옷들이 맞지 않아 난처했지만 작아진 가슴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거나 하진 않았었다. 그저 자연의 섭리려니 생각했고 나중에 내가 필요하다고 생각이 되면 수술을 고려해볼 수도 있겠지 막연하게 생각했었다. 하지만 목욕탕 사우나 안에서 나는 만질 게 없어 볼품없는 남자들이 싫어하는 여자가 되어 있었다. 16개월간 내 아이를 배불리 먹인 내 가슴은 사우나에서 나가려 일어설 때 나도 모르게 수건으로 가리고 나오게 되어 버린 부끄러운 콤플렉스로 전락했다. 묘한 패배자의 느낌이었다.

오랜 외국 생활을 하고 돌아온 지인이 있다. 그녀는 한국으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가슴수술을 결심하고 바로 실행했다. 그녀는 내게 외국에서 사는 십여 년의 시간 동안 단 한 번도 가슴이 콤플렉스라고 느껴본 적이 없었다고 했다. 큰 가슴은 큰 가슴대로, 작은 가슴은 작은 가슴대로 매력적이라 여기는 곳에서 생활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한국에 돌아오고 조금 지나자 A컵인 자신은 남자들이 아닌 오히려 여자들 때문에 상처를 받았다고 말했다. 가슴이 작은 여자가 가슴이 파인 옷이나 딱 달라붙은 옷을 입고 지나가면 가슴도 없으면서 무슨 저런 옷을 입었냐며 수군거렸다 한다. 볼 것도 없는데 뭘 보여주려 하냐며 노골적으로 조롱했다 한다. 그것이 마치 그들이 그녀에게 하는 말같이 느껴졌던 그녀는 참지 못하고 수술을 감행했고 자신감을 되찾았다.

가슴이 성적 매력을 나타내는 가장 큰 신체 부위 중 하나라는 것은 많은 사람이 공감할 것이다. 더구나 최근 가슴 수술을 하는 여성들은 생각 이상으로 참 많다. 그녀들의 가슴은 정말 예쁘다. 목욕탕에서 보면 나도 모르게 눈길이 계속 갈 정도니까.

하지만 가슴수술이 그녀들의 선택이듯이, 작은 가슴을 가진 여성들이 수술을 하지 않는 것 또한 그녀들의 선택이다. 각자 자신의 신체에 만족하는 기준의 정도에 따라 결정을 하는 것이다. 대세가 C컵을 가장 예쁜 가슴이라고 할지라도 어떤 사람들은 A컵인, 또 어떤 사람들은 F컵인 자신의 가슴이 가장 예쁘다고 생각하는 미의 기준을 가졌을지도 모른다. 수술을 해서 예뻐진 가슴을 예쁘다고 칭찬해주는 거기까지만 하면 어떨까. 굳이 수술을 하지 않은 작은 가슴을 끌어들여 비교하며 패배자로 만들 필요가 있을까. 굳이 F컵인 큰 가슴을 끌어들여 처졌다느니 예쁘지 않다느니 본인의 미의 기준이 절대적인 양 떠들어댈 필요가 있을까.

A컵이든 F컵이든 혹은 무컵이든, 각자에겐 다 소중한 가슴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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