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보다 더 사랑 같은 우정

에세이

by 이재 다시 원


사랑이 무너질 때마다 나를 붙들어 준 건 너였다.
불꽃 대신 체온으로, 고백 대신 꾸준함으로.


너가 이성이었다면, 나는 분명 너와 사귀었을 거야. 나를 소중히 여겨주고, 배려해주고, 존중해주는 너를. 그걸 내가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보고 싶다며 두 시간 넘는 거리를 달려와주는 너. 조금 서툴면서도 그게 귀여운 너. 그래서 나는 우정도 결국 사랑의 또 다른 얼굴이라고 믿는다.


우정은 서로 소유하려 하지 않는다. 그래서 더 깊다. 우리는 서로의 시간을 빼앗지 않고, 서로가 필요할 때 조용히 문을 두드린다. 답장이 늦더라도 서운함을 빌미 삼아 상처를 내지 않는다. 그저 괜찮다고. 네 방식대로 하고 오라고하며 자리를 남겨둔다. 사랑이 종종 '나의 것'이라는 말로 흔들릴 때, 우정은 끝까지 '너의 것'을 지켜주는 태도에서 단단해진다.


우정은 침묵을 견딜 줄 안다. 카페 구석, 창밖으로 비가 스치던 날. 우리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침묵은 허전함이 아니라 이해의 모양이었다. 설명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마음. 울음을 말로 번역하지 않아도 되는 순간. 그게 우리의 언어였다.


너는 나의 계절을 통째로 통과시킨다. 여름의 끈적한 습기와 겨울의 시린 바람을 함께 건너며, 서로의 어제와 내일을 조금씩 알아간다. 사랑이 어떤 계절에 치우쳐 기억된다면, 우정은 사계절의 변주로 남는다. 기념일 대신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자라는 우정. 같은 자리에서 같은 커피를 마시면서도 조금씩 달라진 얼굴을 서로 알아차리는 일.


우정에는 질투가 없다. 아니, 전혀 없다고는 못하겠다. 가끔은 너의 다른 행복들이 나 없이 이루어질 때, 문득 멀어진 듯해 가슴이 쿡쿡 쑤실 때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질투를 소유로 바꾸지 않는다. 부럽다고 솔직히 말하고, 축하한다고 더욱 크게 외친다. 그렇게 말한 뒤에도 우리의 사이는 조금도 줄지 않았고, 조금도 늘지 않았다. 안정된 궤도를 그리며 공전하는 달과 지구처럼.


우정은 상처를 대신 맡기지 않는다. 내가 무너진 날, 너는 해결사가 아닌 동행인이었다. 조언을 무기로 휘두르지 않았고, 판단을 빌미로 우월해지지 않았다. 그저 물을 끓이고, 따뜻한 국을 데우고, 자리를 내어줬다.

"언제든 너가 준비될 때 얘기해."

나를 믿고 기다리는 일. 너의 기다림은 우리 관계의 품격이 되었다.


우정은 경계가 있는 사랑이다. 경계가 있으니 안전하고, 안전하니 진실하다. 우리에게는 키스 대신 무너질 때 의자를 끌어다 주는 손이 있다. 무릎을 꿇는 청혼 대신 다시 걷자고 말해 주는 발걸음이 있다. 우리는 서로의 집이 아니라, 서로를 향한 길이었다. 집은 오래 머무르면 답답해지지만 길은 걸을수록 시야가 넓어진다.


가끔 생각한다. 사랑이란 말은 너무 낭만적으로 소비되어 그 무게를 감당하지 못할 때가 많다고 말이다. 그럴 때 우정은 조용히 무게 중심을 낮춘다. 높이 날아오르는 대신, 넘어지지 않게 붙들어 준다. 사랑이 나를 주인공으로 세웠다가 대사를 잃게 할 때, 우정은 조명 뒤편에서 내 숨을 고르게 만든다.


그래서 나는 안다. 사랑보다 더 사랑 같은 우정이 있음을. 고백 대신 꾸준함으로, 불꽃 대신 체온으로, 영원 대신 오늘의 성실함으로 이어지는 관계가 있다는 것을. 그 우정 앞에서 나는 드디어 안심한다. 언젠가 우리가 서로의 인생에서 한 챕터만 남게 되더라도, 그 챕터는 결코 얇지 않을 것이다. 짧은 문장들로 빽빽하더라도 읽을수록 따뜻해지는 페이지로 남을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사랑이 또다시 내 앞에서 흔들리며 나를 위태롭게 할지라도, 난 너와의 우정으로부터 사랑을 배운다. 침묵을 견디는 법, 소유하지 않고도 가까워지는 법, 계절 전체를 통과하는 법. 그러니 말하자면, 우리의 우정은 사랑을 대신하지 않으면서도 사랑을 더 잘 사랑하게 만드는 것이다. 사랑보다 더 사랑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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