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보내도, 꿈에서 다시 불러내는 이름

에세이

by 이재 다시 원


미워해도 잊히지 않는다. 싫어해도 끝내 그리워한다. 사랑은, 결핍이 남긴 가장 인간적인 흔적이니까.


그의 연락을 기다리며 흘려보내는 하루가 점점 지겹게 느껴진다. 나를 피하는 듯한 태도는 귀찮고, 무심한 말투는 신경을 긁는다. 그럼에도 나는 핸드폰을 손에 쥐었다가 놓기를 반복한다. 화가 나서라도 단호히 말해볼까 싶다가도, 그것마저도 또다시 내가 먼저 관계를 이어보려는 몸짓일까 싶어, 자존심을 지키듯 쓰던 메세지를 지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꿈속에서의 나는 여전히 그와 함께였다. 오래전 웃던 장면들이 다시 피어나고, 무의식 속의 나는 그를 미워하기보다 그리워하고 있었다. 현실에서는 분노로 등을 돌리면서도 꿈에서는 다시 그와의 시간을 바란다. 나는 너를 미워하면서도 여전히 널 그리워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플라톤은 『향연』에서 사랑을 "결핍에서 비롯된 욕망"이라 했다. 그 말은 내 마음 속의 모순을 기막히게 설명해준다. 그는 나를 채워주지 못한다. 기대를 거두게 만들고, 곁에 머물러 주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 빈자리가 나를 더욱 집요하게 묶는다. 채워지지 않으니 더 갈망하게 되고, 쥐지 못했으니 더욱 애절하게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사랑은 결핍을 먹고 자라며, 그 결핍은 나를 무너뜨리는 동시에 살아 있게 한다.


프로이트는 사랑과 증오가 함께 존재한다고 말했다. 우리는 애착의 대상을 향해 본능적으로 애정과 공격성을 동시에 품는다. 하지만 그것을 드러내지 못하고 억누르면 무의식 속에서 다른 얼굴로 발현된다. 나의 경우 그 무의식의 발현은 꿈으로 나타났다. 미워하면서도 그리워하는 마음은 무의식의 장면으로 흘러나와 그를 다시 불러냈다. 결국 나의 꿈은 애증의 다른 이름이었을지도 모른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인물들은 자기파괴적인 사랑을 자주 보여준다. 『죄와 벌』의 라스콜리니코프와 소냐는 특히 내 마음을 흔들곤 한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살인을 저지른 죄인이지만, 동시에 소냐를 향한 사랑 속에서 구원을 갈망하는 인물이다. 그는 그녀를 의지하면서도 밀어내고, 그녀 앞에서 무너져내리면서도 다시 그 품을 찾는다. 그 모순된 진폭은 내 마음의 풍경과 닮아있다. 나 역시 미워하면서 의지하고, 놓으려 하면서 다시 붙잡는다. 사랑은 언제나 파멸과 구원의 경계 위에서 흔들린다.


나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왜 미움조차 사랑의 또 다른 얼굴이 되는 걸까? 혹시 미워한다는 것은 여전히 그 사람을 마음에 두고 있다는 방증이 아닐까. 싫다는 감정이 깊을수록, 오히려 그만큼 사랑의 흔적도 짙게 남아있는 건 아닐까.

내가 사랑이라고 부르는 이 감정은 과연 사랑일까, 아니면 단순한 의존일까. 자존심 때문에 보내지 못한 메세지조차, 어쩌면 닿고 싶다는 욕망의 다른 표현 아니었을까. 사랑은 단순히 기쁨만이 아니라, 고통과 불안, 결핍과 집착을 함께 동반한다. 그렇다면 내가 지금 느끼는 이 모순은 사랑이 본래 지닌 진실일지도 모른다.


플라톤의 결핍, 프로이트의 양가감정, 그리고 도스토예프스키가 보여준 자기파괴적 사랑. 그 모든 것들이 지금의 나를 비춘다.


그는 나를 채워주지 못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나는 그를 원망하고, 자존심을 세우며 등을 돌린다. 그러나 동시에 나는 그를 꿈꾸며, 그리워하며, 사랑한다.

사랑은 단순히 달콤하기만한 기쁨이 아니다. 그것은 결핍과 불안, 미움과 집착이 얽힌 복합적인 체험이다. 사랑은 나를 소진시키면서도 다시 일으켜 세우는 역설이다. 그래서 나는 그를 미워하면서도 여전히 사랑하고, 떠나보내려 하면서도 끝내 내 안에 붙들어둔다.


애증, 그것은 결국 사랑의 가장 인간적인 얼굴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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