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가끔 밤늦게 집으로 돌아와 현관 앞에서 도어락을 더듬을 때, 나는 살아있음과 존재함을 구분한다. 숨 쉬고 움직이는 일만으로는 어딘가 모자른 느낌. 불이 켜진 집 안으로 들어갔을 때 내 이름을 불러줄 목소리가 있는지, 오늘의 나와 어제의 나를 이어줄 문장이 있는지, 누군가에게 건넬 대답이 남아 있는지. 그리고 그때서야 비로소 나는 사람으로서 존재한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을 사람으로 있게 하는 근거는 무엇일까. 첫 번째는 감각을 느끼는 몸이다. 우리는 손끝으로 겨울의 차가운 금속을 만진다. 빗방울이 목덜미를 타고 스며드는 것을 알아차리고, 누군가의 등줄기 온도를 기억하기도 한다. 세계는 우리에게 감각으로 먼저 도착하고, 우리는 그 감각을 통해서 자신에게 닿는다. 몸은 단순한 기계가 아니라, 세계와 나 사이의 창이며 증거다. 누군가를 안고서야 비로소 알게 되는 진실이 있다. 이는 말로는 다 다루지 못한다. 몸으로, 감각으로만 건넬 수 있는 것들이 사람을 사람답게 만든다.
그러나 감각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사람 사이의 소통에 가장 중요한 언어. 사람은 언어를 통해 자신을 다시 묶는다. 하이데거가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 했던가. 말을 건넬 때 우리는 그날의 두려움과 기대, 부끄러움과 다짐을 한 자리에 앉힌다. 설명이 아니라 머묾으로서 이어지는 대화는, 서로의 말이 끝나는 지점을 서둘러 채우지 않는다. 빈 공간을 비어 있게 두는 예의. 그 여백에서 타인의 마음이 늦게 도착할 시간을 허락하는 일은 언어의 가장 인간적인 사용법이다. 말과 침묵 사이의 호흡을 지킬 줄 아는 자만이 타자를 상처내지 않고 자신을 드러낼 줄 안다.
그럼에도 핵심은 결국 타자다. 레비나스가 말했듯이 타자는 이해의 대상이 아니라 그 자체로 존중받아야 할 낯섦이다. 사랑이든 우정이든 우리는 상대를 내 방식으로 정의하고 소유하려는 유혹을 끊임없이 느낀다. 나는 너를 위한다고 말하면서도 사실은 내가 상대에게서 보고 싶은 역할을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사람을 사람으로 존재하게 하는 것은 이 유혹을 자각하고 멈추는 능력이다. 섣불리 해석하지 않고, 기다리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인정하는 태도. 상대의 얼굴 앞에서 스스로의 손아귀를 느슨하게 푸는 순간, 비로소 두 사람의 세계가 서로의 경계를 보존한 채 맞닿는다.
시간도 사람의 조건이다. 시간은 시곗바늘처럼 잘려 흐르지 않는다. 어제의 실패와 오늘의 결심, 내일의 불안이 한 덩어리가 되어 우리의 속으로 흘러들어간다. 기억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방식을 바꾸어 남고, 애도는 잊는 기술이 아닌 견디는 기술이다. 끝난 관계에서조차 우리는 흔적을 지우기보다 서서히 의미를 갈아 끼운다. 버리지 못한 선물과 지우지 못한 사진이 오래 우리의 곁에 머무는 까닭은 그 물건들이 과거의 나를 증언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시간에 책임지는 일. 어제의 나를 배반하지 않으면서도 내일의 나에게 길을 남기는 일. 그러한 꾸준함이 사람을 단단하게 만든다.
그리고 책임. 사르트르는 인간을 자유에 내던져진 존재라 했다. 선택은 언제나 불완전하고, 결과는 대개 예측보다 거칠지만, 우리는 그 결과를 타인에게 전가하지 않으려고 애쓴다. 사소한 약속을 지키고, 잘못을 미루지 않고, 늦었다면 늦었다고 말하며, 미안하다와 고맙다를 제때 건네는 소소한 윤리들. 거창한 신념보다는 이러한 일상의 책임이 안전한 세계를 만든다. 사람다움은 결국 누군가가 믿고 기댈 수 있는 작은 표면을 제공하는 일에서 증명되는게 아닐까.
부끄러움 역시 사람의 증명이다. 더 잘할 수 있었는데 그러지 못했던 순간에 나의 얼굴은 뜨거워지며 그로부터 눈을 돌리곤 한다. 하지만 부끄러움이란 감정은 스스로를 혐오하기 위한 장치가 아니다. 오히려 타자에게 미치지 못한 나의 결을 자각하는 신호이다. 부끄러움을 느끼고, 그로 인해 다음 번에는 조금 다른 선택을 하려는 의지. 그 둘이 함께 작동하며 우리는 천천히 나아진다. 완벽함이 아닌 수정 가능성, 한 번 더 시도하려는 재귀가 우리를 윤리의 쪽으로 끌어당긴다.
결국 사람을 사람으로 존재하게 하는 것은 관계 안에서 자기 자신을 과장하지도 삭제하지도 않는 균형감각이다. 몸으로 세계에 닿고, 언어로 자신을 묶고, 타자 앞에서 기다리며, 시간 속에서 책임을 이어가고, 부끄러움으로 자신을 갈아 넣는 일. 이러한 얇은 판은 겹겹이 쌓여 하루를 지탱하게 도와준다.
나는 이제 이렇게 믿는다. 사람은 혼자서는 완성될 수 없음을, 사람은 서로의 시간을 조금씩 빌려 완성되는 것임을 말이다. 누군가 나의 이름을 불러주고, 내가 누군가의 이름을 부를 때. 그때서야 존재는 개인의 내부에서부터 타인의 방향으로 확장된다. 문득 떠오르는 누군가의 얼굴 때문에 한 줄 더 조심스레 쓰게 되는 문장이라든지, 늦은 밤 메세지를 보낼지 말지 망설이다가 결국 내일 아침에 안부를 묻는 선택. 앉을 자리를 반 뼘 물려주는 몸짓. 그런 사소한 결이 모여 사람을 만든다.
그러니 묻는 방식을 바꿔보자. "나는 무엇으로 사람인가?"가 아니라 "나는 누구에게 사람인가?"라고 말이다. 내 존재는 나 혼자로 닫히지 않고, 나와 너의 사이에서 열린다. 누군가에게 상처가 되지 않으려 천천히 다가가고, 모르는 것을 배울 시간을 청하고, 실패를 함께 견디는 마음. 그 마음이 아직 내 안에서 미약하게나마 작동한다면, 우리는 이미 사람인 것이다. 오늘도, 내일도. 그리고 누군가가 우리의 이름을 잊어버리는 날까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