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나는 더 이상 너를 사랑하지 않아. 하지만 너에게는 아마 영원히, 무한토록 애틋함을 느낄 거야."
문장을 입 안에서 굴려본다. 혀끝에 무언가 맛이 느껴진다. 사랑이 끝났을 때 남는 건 공허뿐일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정작 남은 것은 공허보다 더 조용하고, 더 형체가 분명한 어떤 온도였다. 그 온도를 애틋함이라 부를 수 있을까. 사랑은 나를 너에게로 밀어붙이던 힘이었다. 그러나 서로를 놓아준 뒤에도 온도가 남아있다면, 아마 나는 평생토록 너를 그리워하겠지.
나는 너를 용서했다. 너가 나를 용서하지 않더라도. 용서는 내가 너에게 베푼 것이 아니다. 오히려 나를 너에게서 풀어내는 기술이었다. 너를 무죄로 선언하고 판단하겠다는 뜻이 아니라, 더 이상 내 삶을 네 판결문으로 살지 않겠다는 결심. 어떤 날은 이 결심이 무너져 울컥했고, 어떤 밤은 너무 무덤덤해서 내가 무정해진 건 아닌지 의심했다. 그러다 점점 알게 되었다. 용서는 잊어버리는 일이 아니라, 가지고 있던 기억을 새로운 장소로 옮겨두는 일이라는 것을. 너를 내 안에서 영원히 추방하는 대신, 영원히 추억할 수 있는 장소로 말이다. 그 방의 문은 닫혀 있지만, 열린 창으로는 바람이 드나든다. 그 바람이 바로 애틋함이다.
사랑이 사라진 자리에서 어떻게 애틋함이 생기는 걸까. 아마 일상의 잔흔 때문일 것이다. 네가 처음 웃던 모서리, 툭 던지던 농담의 높낮이, 언제든 한걸음에 달려오던 너의 태도. 그런 것들이 내 삶의 냄새가 되어버렸기에, 사랑이 끝났다고 하더라도 그 냄새는 당분간, 아니 어쩌면 오래도록 남는다. 나는 그 냄새를 지우려고 노력하지 않기로 했다. 향수처럼 온몸에 뿌리지도 않기로 했다. 그저 그곳에 있구나, 하고.
사랑과 애틋함의 차이를 말하라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다. 사랑은 오늘을 불태우는 말이고, 애틋함은 내일을 보존하는 말이라고. 사랑은 함께 쓰는 시간의 총량을 늘린다. 애틋함은 가끔, 떠오를때면 머무르게 두고, 행복하길 바라고. 혼자서도 너를 떠올렸을 때 미소가 지어지는 것. 그러니까 내가 너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은, 너를 향한 갈망의 동선을 접겠다는 뜻이고, 그럼에도 너가 애틋할거란 말은, 그 동선을 접은 손으로 네 안녕을 오래 빚겠다는 뜻이다. 끝내지 못한 사랑은 파괴가 되고, 놓지 못한 애틋함은 집착이 되기에. 나는 사랑을 놓고, 애틋함을 품기로 했다.
어느 날 문득, 우리가 함께 쓰던 컵을 다른 사람과 나눠 마실 수 있을까 생각해본다. 처음에는 배신처럼 느껴지겠지만, 언젠가는 컵이 단지 컵으로 돌아올 날이 있지 않을까. 사물은 제자리로 돌아가고, 사람은 각자의 시간으로 귀환한다. 그때도 아마 나는 드물게, 일상을 살아가다 아주 드물게, 어떤 오후의 빛을 통해 너를 떠올릴 것이다.
나는 더 이상 너를 사랑하지 않아. 하지만 너에게는 아마 영원히, 무한토록 애틋함을 느낄 거야. 그 애틋함이 나를 뒤로 끌어당기지 않기를. 너를 앞으로 밀어붙이지도 않기를. 우리가 각자의 길을 걷다 잠시 만났다는 사실만으로 조용히 밝혀주는 빛이기를. 잠시 빌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