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장의 호출
재택근무 날, 파자마 차림에 눈곱도 떼지 않은 채 노트북 앞에 앉아 업무를 보고 있던 평범한 오전이었다.
갑작스레 작업 표시창 메신저 아이콘 옆에 빨간색 불빛과 함께 1이란 숫자가 생겨난다. 누군가 메시지를 보냈다는 뜻이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실장이다.
내 상사의 상사인 실장은 매사 그냥 넘어가는 법 없는 꼼꼼한 성격의 소유자로, 같이 일하기 쉬운 타입은 아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인간미라곤 1도 없는 우리 회사에서 관계적인 측면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로, 업무상 참석한 한 박람회에서 내 이름과 동일한 상회의 스티커가 있어 내 생각이 났다며 가져다주거나, 아주 가끔이지만 뜬금없이 커피를 사주면서 일상의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얼마나 우리 회사가 인간미가 없는지 이 사례로 알 수 있을 것이다.) 커피를 마시거나 밥을 먹자는 의미가 '당신과 함께 일하는 동료에 대해 정보를 내놓아라.'라는 것을 뜻하는 본부장과는 다른 유형의 사람이다.
다만, 꼼꼼한 성격 때문에 부하 직원들의 업무를 세세하게 검토하고 피드백을 하는 데다가 종종 책임을 회피하는 모습을 보여 주어 부하 직원들이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완벽한 상사는 없다는 게 내 지론이라서 내게는 이 정도면 꽤 괜찮은 사람 축에 들어가는 상사였다. 나와는 직접 일하는 관계가 아니다 보니 소통이 많지 않아 특히나 메신저로 연락할 이유가 거의 없는 편인데 그런 그녀로부터 메시지가 온 것이다.
“네, 안녕하세요.”
잔뜩 긴장한 채로 답을 보냈다. 무슨 일일까 궁금해하면서.
“혹시 오늘 시간 되시는지요?”
급한 일은 없어 시간이 된다고 대답하자 서로 재택 중이고 집이 멀지 않으니 점심 식사 후 집 근처 카페에서 보자고 답이 왔다.
카페에 들어가니 가장 안쪽 창가석에 앉아 있는 실장이 보인다. 인사를 나누고 음료를 주문한 뒤 실장의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항상 사무실에서만 보다가 카페에서, 게다가 내가 종종 들르는 익숙한 곳에서 만나니 약간은 어색함이 감돈다. 더구나 상사에게 퇴사하겠다고 했으니 실장도 알고 있을 게 뻔했다. 오늘 갑작스레 보자고 한 이유가 내 퇴사와 관련이 있을 것 같다는 강한 직감이 들어 괜히 나 혼자 더욱 어색해져 버렸다.
말을 먼저 꺼낸 것은 그녀였다.
“퇴사하신다고 들었어요. 건강이 많이 안 좋아지셨다고요.”
‘역시, 이 이야기하려고 만나자는 거였군.'하고 속으로 생각했다.
“네, 그렇게 결정했습니다.”
퇴사를 하지 말라고 회유하려는 걸까? 아님 퇴사하는 마당에 그간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해보라며 본부장처럼 정보를 캐려는 걸까? 오만 가지 생각에 머리는 더 복잡해진다.
그녀는 애써 태연한 척지만 마음은 한껏 불안해 동공 지진 중인 내 눈빛은 읽지 못한 것 같았다. 내 대답이 끝나자마자 빠르게 묻는다.
“퇴사 대신 병가를 쓰시면 어떠세요?”
예상했던 여러 시나리오 중 하나였던 병가 이야기가 나오자, 떨렸던 마음은 차분히 가라앉았다. 그리고 역시 여러 번 머릿속으로 돌려 본 시뮬레이션에 맞게, 정중하지만 곤란한 듯한 표정을 지으며 답했다.
“병가를 쓰면 다시 돌아와야 한다는 생각에 맘 편히 쉬지 못할 것 같아요. 저는 퇴사해서 회사 생각은 더 이상 하지 않고 건강 관리에만 집중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제가 떠나 있을 동안 다른 동료들이 제 업무를 분담해야 한다는 것도 부담이 되어서 마음이 편치 않을 것 같아요. 그냥 퇴사하는 게 맞을 것 같습니다.”
내 단호한 답변에 그녀는 조금은 당황한 것 같았지만 다시 뭔가 마음먹은 듯한 표정으로 입을 뗀다.
“다른 팀원들 걱정은 선생님이 할 필요는 없어요. 선생님이 책임감이 강하고 깔끔하게 일을 처리하다 보니, 이 건도 병가가 아니라 퇴사가 적절하다고 생각하시는 것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그게 선생님한테 가장 좋은 선택인지 생각해 보면 좋겠어요.” 그리곤 말을 계속 이어간다. “혹시 업무를 변경하는 건 어때요? 병가 다녀와서 말이에요.”
이 제안은 내가 예상했던 시나리오에 없었기에 흠칫 놀라 물었다. “업무 변경이요? 무슨 말씀이세요?”
지금 하는 일은 내가 직접 팀을 꾸려가면서 성과를 내고 있어 팀원들 채용부터 성과 관리까지 모두 담당하고 있다. 기획부터 예산 관리, 팀 운영, 보고까지 많은 업무를 담당하다가 과부하가 걸린 것 같으니 직접 관리하는 팀이 아닌 이 일을 대신 진행하는 협력 업체를 관리하는 업무로 변경해 보면 어떻겠냐고 제안한 것이다. 생각지 못한 제안에 적절한 답변이 떠오르지 않았다.
“지금 당장 대답하지 마시고, 시간을 갖고 생각해 봐 주세요. 팀에는 선생님같은 인재가 꼭 필요해서 저는 선생님을 잡고 싶은 거예요. 병가를 쓰시고 돌아오지 않으셔도 되세요. 꼭 돌아와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에 잘 쉬지 못할 것 같다 생각하지 마시고, 돌아오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고 병가를 쓰시는 방향으로 생각해주세요.”
그녀의 생각지 못한 제안과 간곡한 요청에 나는 좀 더 고민해보겠다고 대답했다. 집에서 나오기 전에만 해도 내가 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대답이었다.
그렇지만 돌아오지 않아도 된다니, 말은 저렇게 하지만 내가 정말로 돌아오지 않았을 때 괜찮을까? 희대의 사기꾼이자 배신자가 되어서 퇴사하는 것보단 지금 퇴사하는 게 낫지 않을까? 고민은 조금 더 해보겠지만 역시 퇴사하는 게 맞을 것 같은데... 나의 마음은 여전히 퇴사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나와 그녀는 내 퇴사 주제에서 벗어나 한 시간 가량 더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야기는 주로 그녀가 이끌어 나갔는데, 본인이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하게 된 계기, 그게 당시 대부분의 대학 동기들 및 친구들과는 다른 방향의 결정이었다는 것과 결혼부터 아이를 낳고 일을 할 수 있었던 자신의 운 좋은 여건까지, 묻지 않았지만 꽤나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정확한 나이는 알지 못하지만 늦게 가진 아이가 이미 스무 살이 넘었으니 그녀 또한 오십은 족히 넘었을 것이다.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니 무채색이던 내 앞의 그녀 모습이 점차 제 색을 띠는 것 같다. 그녀가 한 개인적인 이야기와 그 맥락이 내가 그녀를 더 이해하고 하고 나와 그녀의 심리적 거리감을 좁혀 주는 것 같았다. 이제야 그녀는 내게 '한 공간에서 같이 일하는, 큰 의미 없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만의 이야기를 가진 개성 있는 사람'으로 느껴졌다.
두 시간이 넘는 대화를 마치고 조심히 들어가라는 그녀의 따뜻한 인사를 뒤로 한 채 집으로 향했다. 몇 년 동안 채워지지 않았던 갈증이 방금 전의 대화로 아주 조금은 가신 것 같았다. 그것은 아마 '지금까지 허투루 일하지 않았다. 잘 해왔다.'라는 위로였으리라.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가볍다. '병가를 쓰는 게 나을까?' 생각이 드는 찰나, 나는 고개를 휘휘 젓고 다시 마음을 고쳐먹었다. 한 번 헤어진 연인이 만나면 다시 똑같은 이유로 헤어진다고 했던가? 나의 전 연인, 이제 안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