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림픽대로. 밤 11시 17분.
택시 안은 차가웠다. 여름인데.
라디오에서 뭔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무슨 노래인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흘러나오고 있었다는 것만.
왼쪽 창밖으로 한강이 지나갔다.
수면 위에 도시 불빛이 번졌다.
그 위로 뭔가가 올라오고 있었다.
열기인지 습기인지.
유리 깨지는 소리가 먼저였다.
아니면 라디오가 꺼진 게 먼저였나.
아니, 비명이 먼저였나.
핸들이 꺾이는 감각.
온몸이 오른쪽으로 쏠렸다.
왼쪽 귀에서 시작된 이명은
지금도 가끔 찾아온다.
이것들은 선명하다.
사고 직전, 우리는 싸우고 있었다.
그건 확실하다.
나는 왼쪽 창밖을 보고 있었다.
서연은 오른쪽을 보고 있었다.
무엇 때문인지는 모른다.
서연은 말한다.
내가 소리 질렀다고.
나는 기억한다.
조용히 말했다고.
서연은 그날 밤 더웠다고 기억한다.
나는 추웠다.
우리는 같은 택시에 타고 있었다.
그게 문제다.
병실에서는 계절을 알 수 없었다.
창밖에 코스모스가 없었다면 영영 몰랐을 것이다.
어머니가 깁스에 서명하시다 물었다.
"서연이랑 무슨 일 있었어?"
"택시가 답답해서 세워달라고 했어요."
어머니는 아무 말 없이
깁스에 삐뚤빼뚤한 하트를 그렸다.
며칠 뒤 서연에게서 전화가 왔다.
"사고 직전 기억나요?"
"응. 차 세워달라고 했지."
3초.
5초.
"...그게 다예요?"
"응."
서연이 전화를 끊었다.
안녕이 한 번도 없었다.
10월이었다.
상담실 창문이 열려 있었다.
나는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들고 들어갔다.
계절과 상관없는 습관.
"서연 씨는 다르게 말씀하셨어요.
지우 씨가 소리를 지르셨다고."
기억을 더듬었다.
안개만 있었다.
3일 뒤,
서연도 같은 상담실에 앉았다.
창문은 닫혀 있었다.
서연은 가방에서 작은 가위를 꺼내
손톱 밑 거스러미를 잘랐다.
긴장하면 손을 만졌다.
"지우 씨는 조용히 말했다고 기억하시던데요."
"아니에요. 분명히 소리 질렀어요."
"어떻게 확신하세요?"
"선명하게 기억나니까요."
상담사가 펜을 내려놓았다.
"두 분 다 선명한 거 맞아요.
붙잡은 것이 다를 뿐이에요."
잠깐 사이를 뒀다.
"기억은 저장보다 꺼낼 때 조립이 돼요.
그런데 조립할 때 쓰는 재료가 달라요.
서연 씨는 그 순간의 분위기를,
목소리의 온도를.
지우 씨는 말의 내용을.
그래서 서연 씨는 소리를 질렀다고 확신하고
지우 씨는 조용히 말했다고 확신해요."
서연이 물었다.
"그럼 진짜는 뭐예요?"
상담사가 창밖을 잠깐 봤다.
"뇌는 빈칸을 싫어해요.
그래서 이야기를 지어냅니다.
진짜인 줄 알고요."
"두 분은 같은 사고를 겪었지만,
다른 작가가 됐어요."
"다음 주에 뵙죠."
그날 밤 서연은
열 손가락 손톱을 모두 물어뜯었다.
가위로는 부족했다.
(사고 3년 전)
도서관 3층.
에어컨이 과했다.
나는 반팔 위에 카디건을 입고 있었다.
시집을 읽다가 코를 훌쩍였다.
옆자리 여자가 티슈를 건넸다.
"비염이세요?"
"아니요. 시가 슬퍼서요."
그게 서연이었다.
서연은 반팔 차림이었다.
나중에, 침대에서 그 얘기를 했다.
"우리 첫 만남 기억나요?"
"당연하지. 내가 시 읽다가 울었잖아."
"안 울었어요. 코 훌쩍거렸죠."
"그게 우는 거지."
"완전히 다른 건데."
같은 에어컨 아래.
나는 추웠고 서연은 괜찮았다.
12월이었다.
새벽에 창에 성에가 끼어 있었다.
서연에게서 메일이 왔다.
제목: 우리 기억 정리
첨부: memory_log.xlsx
--
상담 받으면서 이상한 걸 발견했어요.
사고 때문에 기억이 달라진 게 아니라,
처음부터 우리 기억이 안 맞았던 것 같아요.
A열엔 내 기억을, B열엔 당신 기억을 써요.
C열은 우리가 동의한 것들을 쓰려고 했는데.
일단 비워둘게요.
파일을 열었다.
Row 1 | 첫 만남
A열(서연): 지우 씨가 코를 훌쩍거렸어요. 비염인 줄 알았어요.
B열(지우): 내가 울었어. 시가 슬퍼서.
새벽 6시.
성에가 조금씩 녹고 있었다.
47개의 기록을 모두 채웠다.
불일치: 47.
일치: 0.
저장하고 회신했다.
서연아. 우리 정말 같은 사람 만난 거 맞아?
1월이었다.
히터를 켰다.
오래 꺼뒀던 먼지가 열을 받아
잠깐 타는 냄새가 났다가 사라졌다.
서연의 메일.
Row 78 | 한강 피크닉
A열: 돗자리가 바람에 날아갔어요. 지우 씨가 뛰어갔어요. 넘어졌어요. 나는 그냥 서 있었어요.
B열: 서연이가 "잡아와!" 하고 내 등을 톡 쳤어. 넘어졌을 때 달려와서 무릎에 호호 불어줬어.
5월의 강변이었다.
나는 더웠다.
서연은 바람이 시원했다고 한다.
새벽 3시에 전화를 걸었다.
"나 거짓말 안 했어."
"나도요."
"그럼 뭐야, 이게."
서연이 한참 있다가 말했다.
"둘 다 선명하면 어떡해요?"
겨울이 거의 끝났다.
바람이 건조했다.
Row 347 | 사고 당일
A열(서연): 11시 15분쯤. 지우 씨가 소리 질렀어요. "차 세워!"
내가 "여기서 내리면 만오천 원 더 나와요"라고 했어요.
지우 씨가 더 크게 소리쳤어요. "너는 항상 돈 타령이야!"
B열을 쓰려다 멈췄다.
나는 조용히 말했었다.
서연은 요금을 말했다.
그렇게 기억한다.
그런데.
서연이 손을 잡으려 했던 것 같기도 하다.
내가 뿌리친 것 같기도 하다.
누군가 "미안해"라고 말했다.
누가?
B열을 비워뒀다.
파일명을 바꿨다.
memory_log.xlsx
→
우리가_영원히_모를_것들.xlsx
3월 초.
서촌 카페.
매화가 지고 있었다.
문이 열릴 때마다
차갑고 축축한 것이 들어왔다.
얼었다 녹기 시작하는 흙에서 나는 것.
서연의 손이 차가웠다.
카페 안은 따뜻한데도.
서연이 노트북 화면을 돌렸다.
A열 (서연) : 코를 훌쩍거렸어요
B열 (지우) : 내가 울었어
A열 (서연) : 가만히 서 있었어요
B열 (지우) : 무릎에 호호 불어줬어
"C열은 왜 비워뒀어요?"
"모르겠어서."
"진실을요?"
"응."
서연이 창밖을 봤다.
꽃잎이 바람에 떨어지고 있었다.
"내 기억만 보면 난 너무 차가운 사람이에요.
당신 기억만 보면 난 너무 따뜻하고."
서연이 C열의 빈칸을 가리켰다.
"C열이 채워지면
우리 중 하나는 틀린 거잖아요."
"그래도 무섭지 않아?
우리가 같은 걸 본 적이 없다는 게."
"무서워요."
서연이 내 손을 잡았다.
사고 후 처음.
"근데 두 개면
우리 둘 다 진짜일 수 있잖아요."
꽃샘추위였다.
황사가 비에 섞여 공기가 텁텁했다.
모래인지 흙인지, 먼 데서 온 것 같은.
Row 210 | 화이트데이
A열: 지우 씨가 편의점 사탕 하나 줬어요. "미안, 깜빡했어"라고 했어요.
B열: (공백)
기억이 없었다.
그 하루가 통째로.
"화이트데이 기억나?"
"네. 당신이 사탕 줬잖아요."
"나는 기억 안 나."
"...뭐라고요?"
서연이 말했다.
편의점 문을 열었을 때
히터 위 먼지가 타는 뜨거운 바람이
정수리에 닿았다고.
그 온기가 지금도 기억난다고.
나는 없다.
온기도.
사탕도.
그날도.
B열을 스크롤했다.
비어있는 칸들.
Row 89.
Row 156.
A열도 봤다.
서연이 비워둔 칸들.
Row 134.
Row 298.
파일은 어느새 300행을 넘어 있었다.
우리는 같은 3년을 보냈다.
그런데 다른 날들을 살았다.
새벽 4시.
서연에게 문자를 보냈다.
"그럼 우리가 함께한 날은 몇 개나 되는 거야?"
30분 뒤 답장이 왔다.
"하나도 없을 수도 있어요."
한 달간 연락이 없었다.
벚꽃이 피고 졌다.
아무도 그걸 서로에게 말하지 않았다.
엑셀 파일은
버전 52에서 멈춰 있었다.
5월 말,
저녁부터 비가 왔다.
서연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목요일인데."
"응."
"카페 갈래요?"
서촌.
평소 자리.
젖은 우산들이 입구에 서 있었다.
Row 210. 화이트데이.
"이 날, 제가 말해드릴까요?"
"응."
"당신은 그걸 당신 기억이라고 생각할 거예요?"
"아니."
"그럼요?"
"너의 기억 속 나."
서연이 말했다.
비 오는 날이었다고.
사탕을 건넸다고.
미안, 깜빡했어, 라고 했다고.
서연은 괜찮다고 했다고.
나는 B열에 썼다.
(서연의 기억) 내가 사탕을 줬다고 한다.
저장.
"계속할 수 있을까요? 이거."
"모르겠어."
"솔직하네요."
"근데 해보고 싶어."
"왜요?"
"너의 기억 속 내가 궁금해서."
서연이 속눈썹을 깜빡였다.
"나도요.
당신 기억 속 내가."
우리는 목요일마다 만나기로 했다.
며칠 뒤, 서연에게서 메일이 왔다.
Row 312 | 첫 번째 이별 통보
A열(서연): 카페였어요. 창가 자리. 지우 씨가 뭔가 말했어요. 목소리가 낮고 조용했어요. 저는 그 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 같아요.
B열(지우): 카페 창가였어. 내가 "우리 좀 쉬자"고 했어. 서연이 아무 말도 안 했어. 눈을 안 마주쳤거든.
일치: 카페. 창가.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는 것.
불일치: 서연이 이미 알고 있었는지, 아무 말도 못 했는지.
메일 아래에 서연이 한 줄을 더 썼다.
C열에 뭘 써야 할지 모르겠어요.
사실 확인이 안 되는 게 아니라 둘 다 맞는 것 같아서요.
나는 한참 그 문장을 읽었다.
8월이 돌아왔다.
아카시아는 이미 석 달 전에 다 졌다.
카페에서 나오자
열기가 쏟아졌다.
1년 전 그 밤과 같은 공기.
Row 589 | 사고 1주기
A열: 올림픽대로를 지나갔어요. 손을 잡았어요.
B열: 서연이 떨고 있었어. 내가 먼저 손 잡았어.
C열: (공백)
또 다르다.
누가 먼저 손 잡았는지.
평생 모를 것이다.
"C열 채워질까요?"
"글쎄."
"채우고 싶어요?"
"아니."
"왜요?"
"채워지면 다시 외로워질 거잖아."
노트북을 덮었다.
카페를 나왔다.
서연이 손을 내밀었다.
나는 잡았다.
아니.
내가 먼저 잡았나?
모르겠다.
서연의 손이 따뜻했다.
8월이어서인지.
아니면 원래부터인지.
매주 목요일.
두 개의 반구 사이에서.
파일명:우리가_영원히_모를_것들_v89.xlsx
공동 편집자: 이서연, 한지우
C열: 공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