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1월 1일은 없다고

연말허망증후군으로부터 도망가는 중입니다

by 이학민

12월 말이면 ‘연말허망증후군’이 유행한다. ‘연말허망증후군’이란 “올해도 이룬 것 없이 나이만 먹었다”며 성취 없는 한 해를 한탄하고 “내년에는 달라져야 한다”는 내부 압박에 시달리는 질병이다. 감기처럼 치료약이 없어서 지나는 동안 견뎌야 한다. 다행인 것은 감기만큼 흔하고, 생명을 앗아가지 않는다는 점.


보통 12월과 1월 사이, 불안하고 막막한 기분을 잘 느끼는 사람이 이 질병에 걸린다. 한 해의 경계를 믿기 때문이다. 그런데 ‘해’는 목표나 일상의 유일한 단위가 될 만한 힘이 없다. 우리는 이미 안다. 12월 31일과 1월 1일이 다르지 않다는 것을. 목표나 성과에 있어, 해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것을.


해는 그저 달이 모인 것뿐이다. 4월의 다짐과 7월의 견딤은 똑같다. 결산 자격을 줄 이유가 없다. 한 달 계획을 돌아봐도 지키지 못한 것이 많은데, 열두 달을 한순간에 평가한다는 것은 무리다. 그런데 왜 연말마다 허무함에 자리를 내주는가. 이제부터라도 예방해야 한다. 예방법은 한 가지. 일상을 해를 중심으로 살지 않으면 된다. 열심히 사는 사람일수록 ‘중간 평가’나 ‘결산’에 관심을 기울인다. ‘내가 잘하고 있는 걸까’ 자주 따져보기 때문이다.


자신을 돌아보는 것은 발전을 위한 양분이지만 구태여 연말에 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연말은 피해야 한다. 연말은 모두가 손에 쥔 것을 확인하는 위험한 시간이기 때문이다. 다들 후회나 허망함에 사로잡혀 있을 때 자유롭고 싶다면, 내가 걸어온 길은 봄과 여름에 돌아보는 것이 더 안전하다. 그러나 ‘연말허망증후군’을 예방해도 고난은 이어진다. 1월 초에는 ‘새해계획신드롬’에 사로잡히기 때문이다.


계획 세우기 좋은 시기는 없다. 자신에게 맞는 시기에 하면 된다. 하지만 우리는 1월마다 시간 부자가 된 사람처럼 계획을 세운다. 계획을 충실히 이행하면 아무 문제없지만 한두 가지만 못 지켜도 한 해 내내 무기력해진다. “어차피 난 안 돼” 같은 비관 때문이다. 도미노가 따로 없다. 이러한 질병에 시달리지 않으면 근본적인 체질 개선이 필요하다. 시간에 쫓기는 체질을 개선하는 나만의 방법은 ‘내 시간의 주인 되기’다. 내 시간의 주인이 된다는 것은 흐르는 시간에 휩쓸리지 않고, 그 시간 안에 나의 할 일을 채우고 나의 속도로 행하는 것을 말한다.

뮤지션이자 작가이자 농부이기도 한 루시드 폴은 문화웹진「채널예스」와의 인터뷰에서 “서울에서 가장 힘들었던 건, 내가 살고 싶은 속도를 내가 제어할 수 없다는 사실이었어요. 내가 기어를 쥐고 있는 것 같지가 않았어요. 굉장히 많은 관계가 있으니까 내가 그 관계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어요. 내 속도로 살기 위해서는 이 관계들 속에서 떨어져 있어야겠다고 생각했죠. 적어도 핸들은 내가 쥐고 있어야겠다, 생각한 거예요”라며 자신의 속도로 살기 위해 제주도에 산다고 말했다.


수정됨_andy-cat-K4IgQ3CFIQ8-unsplash.jpg Photo by Andy Cat on Unsplash


내 시간의 주인이 되기 위해 나는 작업실이라는 부르는 원룸을 구했다. 가족과 한집에 살다 보니 일하기가 어려웠다. 자주 흐트러졌고 해가 지날수록 게으르고 무기력해졌다. 프리랜서라면 ‘영업의 문’을 열어 두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 해마다 연말이면 한 해 동안 더 열심히 하지 못한 것을 후회했고, 1월이면 갑자기 무리한 계획 세우기를 반복하다가 여름이면 와장창 무너졌다.


공동생활이라는 변명을 치우고 싶어서 무리해 작업실을 얻었다. 비단 일만을 위한 선택은 아니었다. 생활 전반에 걸친 자립이 목표였다. 한 소설가는 인터뷰를 통해 “글 쓰려고 작은 방을 구했는데 가서 열심히 청소만 하고 잤다”라고 말했다. 내가 작업실에 처음 입주했을 때도 그랬다. 처음 며칠은 쓸고 닦는 데에 정신이 팔렸다.

이미 깨끗한 방을 가꾸는 데에 힘 쏟은 이유는 나만의 시간을 가꾸기 위해서였다. 집을 흔히 ‘공간’이라 여기지만 나는 ‘시간’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비단 글 쓰는 일을 위해서가 아니더라도 자신(들)만의 시간을 만들겠다는 목표가 있다면 공간이 필요하다. 그런데 공간만 주어져서는 의미 없다. 집을 구해도 내 시간을 채워 넣지 않으면 집은 그저 공간에 머문다. 집 안에 나만의 루틴과 계획과 행동을 채워야 한다.


작업실에 입주한 지 좀 되었다. 과거에는 주로 새벽에 작업했는데 지금은 아침 일곱 시에 일어나 저녁 여섯 시쯤 퇴근하고 열두 시 전에 잠드는 생활을 이어간다. 모두 잠든 시간에 일해야 할 이유가 사라진 것이다. 12월에 시작하는 프로젝트도 계획했고, 내년 봄에 시작할 계획도 미리 정해 놨다. 내 시간의 주인이 되면 해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것이다. 요즘은 조금 더 의욕적으로 일한다. 내 공간을 지키기 위해서. 내 시간을 뺏기지 않기 위해서다. 비로소 나는 나로, 내 속도로 살고 있다. 청소는 처음보다 덜하지만 여전히 하나하나 탐구생활하듯 애착하며 산다.


이처럼 일상 공간을 바꾸어 시간을 사는 사람이 있지만, 모두에게 적용할 수 있는 방법은 아니다. 각자 처한 상황과 성격이 다르니까. 자신에게 맞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이직이나 퇴사처럼 업무 시간이나 형태를 변경하는 선택, 내 계획을 위해 일정 기간 주변 사람과 연락 멈추기 등을 통해 ‘내 시간의 주인’이 된다면, 나만의 속도로 살게 되고 세상의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 삶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연말허망증후군으로 괴로운 적도 있지만, 12월은 좋아한다. 거리가 예쁘고 사람들 눈에서 설렘이 보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연말과 새해를 핑계로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거나 마음을 새롭게 다지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니까 한해를 돌아보는 일은 터부시하고, 새해가 주는 이상한 희망만 받아 챙기면 될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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