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이라는 슬픔으로부터 도망가는 중입니다
꿈 없는 시대다. 이루기 힘든 것은 둘째고 자신 있게 말하는 사람마저 별로 없다. 눈물 셀카나 감성적인 글귀를 올리면 ‘퍼가던’ 싸이월드는 문을 닫았다. 타인의 꿈을 희망으로 퍼 나르던 기사도 좀처럼 볼 수 없다. 꿈처럼 오글거리고 희미한 빛을 입에 담는 사람은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거나 유별나게 낭만적인 사람이 된다.
꿈이 뭐냐는 질문에 설레던 시절도 있었다. 머릿속에 그리고 단어와 표현을 고르는 것만으로도 가슴 벅차던 순간들. 꿈은 이룰 때보다 꾸는 동안 더 현실감 있게 느껴졌는데, 모든 비현실이 그렇듯 현실화하지 못하자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그러니 꿈은 결핍의 다른 말이다. 꿈이란 적어도 생의 어느 한때 그것을 누리고 싶다는 희망 사항이고, 그것은 지금 내게 없거나 누리지 못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니까. 어쩌면 지금은 결핍의 시대인지도 모른다. 가질 수 없는 것이 ‘보통’이 될 때, 우리는 보통을 말하지 않으니까. 보통 일이 아니다.
내 눈앞만 그런 거라면 다행이겠다. 서른 중반에게 꿈을 묻는 게 어색한 것은 사실이다. 내가 열 살이거나 열두 살이면 여전히 “너는 꿈이 뭐니?” 물어 올 테다. 이 질문은 “너 커서 어떤 직업을 갖고 싶니?”와 같은 의미다. 꿈과 직업을 동일시하는 것은 이상하지 않다. 일도 일상의 한 부분이고, 하루 중 일하는 시간이 가장 길 때가 많으니까. 무엇이 되는 것은 무엇을 하고 사는지와 다르지 않다.
꿈이 목표일 때도 있다. 고시생에게는 합격이, 영업인에게는 영업왕이 꿈이겠다. 조금 더 구체적인 목표를 지닌 사람도 있다. 어떤 강연자는 TED에서 강연하는 것이 일생의 꿈이라 말하기도 한다. 지금 하는 일이 헛되지 않기를 바라고, 더 빛나길 원하는 바람은 모두 꿈이라 말한다. 이러한 꿈은 존중받아 마땅하다. 과거에는 자주 묻고 말하며 응원을 주고받았다. 그런데 요즘은 말하는 쪽이나 듣는 입장에서나 꿈은 부담스럽게 느껴진다.
반면 꿈을 가져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은 있다. 오프리 윈프리는 “당신이 할 수 있는 가장 큰 모험은, 당신이 꿈꾸는 삶을 사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니까 꿈은 모험이긴 한데, 할 수 있는 모험이니 꿈을 꾸라는 의미겠다. 꿈만큼 희망적인 메시지다. 나는 어떤가. 꿈꾸는 현실주의자라고 썼다. 7년 전 쓴 한 책에서 나를 표현한 문장이다. 꿈을 버리지 않아야 숨 쉴 수 있다고도 덧붙였다. 어쩌자고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한 것인지.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나는 변한 게 없다. 여전히 수만 가지 꿈을 마음에 숨겨 놓고 산다. 내 허파는 꿈으로 만든 것일까.
꿈을 숨겨둔 이유는 슬프기 때문이다. 여전한 결핍과 꿈인 채로 지나간 것들이 현실과 충돌해서 문제다. 뭐든 부딪치면 아프다. 실제로 꿈을 담은 노래를 들으면 눈물이 나와서 난감하다. 꿈이라는 슬픔에서 벗어나는 나만의 방법은 일상에서 꿀을 찾는 것밖에 없다. 꿀이란 지금 나를 달콤하게 하는 것을 말한다. 의외로 일일 때도 있고, 영화나 음악, 축구 같은 취미도 포함된다. 좋아하는 사람들과 만나거나 술 먹을 때도 빼놓으면 섭섭하다. 볕 좋은 날 빨래 널 때는 또 어떤가. 꿀은 액체라서 그런지 꿈보다 유연하다. 형체가 시시때때로 바뀐다. 그때그때 꿀이 되는 것들을 찾으면 꿈이 주는 슬픔도 이겨낼 수 있다.
요즘 내 꿀은 소설과 마블 영화다. 아마 현실 회피 본능 때문일 테다. 그러나 문화 콘텐츠를 꿀로 두면 현실로 돌아오는 순간이 있다. 영화가 끝나거나 책장을 덮으면 그 순간부터 다시 나로 살아가야 한다는 슬픔이 밀려온다. 한때 그게 버거웠는데 이제는 나로 살아가는 게 슬프지 않다.
이제는 내가 좋아하는 것을 마주하며 좋아하는 그 장면을 나는 가장 좋아한다. 내가 내 눈에 차지 않아 슬픈 날이 많았지만 내가 나여서 다행인 적도 많으니까. 어차피 이번 생애 동안 나를 빌려 써야 하는 데 나와 다툴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어쩌면 나만큼 나를 잘 쓰는 인간도 드물 것이다. 이 같은 사실은 꿀을 통해 깨달았다. ‘달콤한 기쁨을 만끽하는 나’를 자주 보니 의외로 괜찮은 인간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꿈이 뭐니?” 같은 철 지난 질문 대신 “너의 꿀은 뭐니” 같은 질문이 유행했으면 한다. “너는 무엇이 되고 싶니” 말고 “너를 달콤하게 하는 것은 무엇이니?” 그리고 ‘먼 미래’를 묻는 질문보다 ‘요즘’을 물어봐 주면 더 좋겠다. 이런 질문이라면 누구나 머릿속에 그리고 단어와 표현을 고르는 것만으로도 기분 좋지 않을까. 슬플 일도 심각할 일도 부끄러울 일도 없을 테니까. 어쩌면 떠올리는 동안 입가에 미소가 실실 새어 나올지도 모른다. 사람을 웃게 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 질문 하나로 설렘을 줄 방법은 흔치 않다. ‘요즘 꿀’을 물으면 그게 될지도 모른다.
여기까지 온 마당에 내 꿈을 한 가지 정도 고백하는 게 이 길고 흐리멍덩한 글을 읽어준 사람에 대한 답례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미래에 서툰 노인이 되고 싶다. 무얼 하더라도 허둥지둥하는 노인 말이다. 그래서 미리 뭐든 다 잘하지 않으려고 한다. 원래 잘할 수 있는 것도 못하려고 한다. 진짜다. 그래야 외롭지 않을 테니까. 손이 많이 가는 어른이 되고 싶어서 애써 서툴 게 사는 중이다. 물론 어느 날 갑자기 이 꿈이 변할 수도 있겠다. 능숙한 어른이 목표가 될 수도 있을 터. 그래도 나를 원망하지 않았으면 한다. 꿈은 미래의 일. 미래에 내가 좋아할 것을 지금 내가 어떻게 알겠는가.
한 치 앞도 모르는 인생이지만 슬프지는 않다. 꿀이 있는 사람은 꿈을 가진 이보다 즐거우니까. 한때는 내일이 오는 게 두려웠는데 이제는 나름 견뎌낼 자신이 있다.
나는 이제야 준비가 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