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에 가면 내가 즐겨 마시는 커피를 알아서 주문해주는 지인이 있다. 식당에서는 왼손잡이인 내게 왼쪽 자리를 양보하고, 모임에서 내가 보이지 않으면 제일 먼저 연락하는 사람. 어디 그뿐인가. 간만에 휴가를 얻어 쉬려다가도 내가 감기에 걸렸다고 하면 한달음에 달려와 약봉지와 귤을 내밀며 반나절 말동무가 되어주기도 한다.
그 사람을 보며 가까운 사이에서의 다정함은 관찰과 기억에서 나온다는 것을 배웠다. 그런데 정작 그의 취향이나 원하는 바를 몰라 실수한 적이 꽤 있다. 식당에서 매운 음식을 주문하며 “매운 거 좋아하지 않았나?” 헛짚고(그는 매운 음식을 잘 먹지 못한다), “좀비물 좋아하잖아?” 확인한 적도 없는 취향을 넘겨짚곤 했다.(그렇다. 그는 좀비물을 싫어한다) 그럴 때에도 그는 웃으며 자신의 취향을 정정해주었다.
그런 그가 다른 누구 말고 자신과 가장 친했으면 좋겠다고 나는 자주 생각했다. 자신을 입히고 먹이고 재우는 본인에게 잘해주지 않다가 혹여 탈이라도 나면 그의 손이 간절한 내가 곤란해질까 봐서다. 이처럼 나는 이기적이고 그는 이타적이라서 우리가 잘 맞는 것 아니겠냐고 변명할 수 있겠으나 나라고 미안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늘 받기만 하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한 번은 그에게 말했다.
다른 사람 말고 스스로 좀 잘 챙겨줘.
그는 답변 대신 마냥 웃었다. 그런 것 따위 개의치 않는다는 듯이. 어쩐지 편해 보이는 웃음이었다. 이유 없이 친절하면 다른 목적이 있을 거라고 의심받는 세상이다. 바꿔 말하면 이유 없는 친절은 없다는 의미겠다. 다정함도 그렇다. 모든 다정함에는 이유가 있다. 때론 위장 전도처럼 좋지 않은 목적일 때도 있고, 단지 사랑일 수도 있다. 나의 지인은 어느 쪽일까.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만 다정한 것을 보면 아마 사랑일 테다.
이기적인 나는 여전히 누군가를 챙겨주고 보살피는 일에 서툴다. 다정한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다짐해도 쉽지가 않다.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하루아침에 바뀔 수 있다면 그건 다른 목적이 있어서 일 거라고, 빈약한 음모로 나의 서툶을 가리다가 요즘에는 연습을 시작했다. 다른 사람을 향한 다정함은 아직 어려워서 ‘나에게 다정하기’를 시작했다.
남을 챙기지 못하는 사람은 대체로 자신도 챙기지 못한다. 하늘 아래 자기밖에 없는 고약한 안하무인이 아니라면 대체로 그렇다. 타인을 다정하게 대하지 못하는 나는 나를 대할 때도 곰살맞지 못했다. 못하는 게 있으면 화를 내고, 안 하는 게 보이면 욕을 했다. 자책과 자괴에 빠져 허우적대는 동안 꽤 불행했다.
그러나 ‘나에게 다정하기’를 연습하고부터는 달라졌다. 이제 더는 내 부족함을 스스로 몰아세우지 않는다. 게으르거나 한심할 때도 욕은 조금 하지만 금방 다시 나를 안아준다. 마치 가장 친한 친구를 대하듯 나를 관대하게 바라본다. 일상이 조금 편해졌다. 연습의 효과다.
누구나 자신과 가장 많이 다툰다. 나를 가장 못난 사람으로 여기는 사람도 자신이다. 때로는 내가 너무 지겹고 지루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취급주의’ 대상이다. 함부로 던지면 누구든 망가진다. 던진 사람이 자신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내가 미워지고 눈에 차지 않는 순간에도 잊지 말자. 내일도 나는 나로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