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일

편집자 없이 글쓰기

by 이학민

언젠가 ‘노란 달을 품은 안개가 프라이팬 위로 굴러 퍼지고 있다’*는 문장을 쓴 적이 있다. 내 글을 자주 봐온 이들은 참신하다거나 인상적인 표현이라고 반응했다. 더 적극적인 사람도 있었다. 유명한 일본 작가 이름을 거론하며 그 작가가 생각났다며 메일을 보내온 거다. 그러나 내가 신경 쓴 반응은 따로 있다. 한 친구가 자못 진지한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도대체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어!



*이학민 《음이 없는 소리들⟫에서 참조.



노란 달은 노른자, 안개는 흰자를 표현한 거야. 그러니까 이건 계란후라이를 조리하는 장면이지. 겸연쩍은 마음을 숨기고 의미를 설명했더니 친구가 대답한다. 도대체 왜 계란후라이라고 쓰지 않은 거야?


나는 시 같은 문장을 좋아한다. 따라서 시인이 쓴 산문을 즐겨 읽는다. 모든 책이 그렇듯 시인들의 산문집도 저자마다 고유한 스타일이 있으나 대체로 문장이 아름답고 표현이 독창적이다. 읽다 보면 마음이 얇아져서 손끝마다 말이 고인다. 아, 나도 나만의 표현으로 문장을 써야지 다짐한다. 그러나 그렇게 쓴 글은 더 멀리, 더 정확히 날아가지 못할 때가 많다.


읽는 사람이 쓰는 사람의 의도를 알아차리는 것은 쓰는 일보다 더 어려운 일이다. 바탕은 불공평에 있다. 쓰는 사람은 글에 남기지 않은 감정이나 사실, 맥락까지 다 알지만, 읽는 사람은 알 수 없다. 또한 같은 언어를 사용해도 저마다 느끼는 의미나 뉘앙스는 천차만별이고 관습적인 표현조차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 이렇다 보니 자신만의 표현을 중시한 글은 정확히 공유되기가 어렵다. 언어적 보편성이 필요한 이유다. 나는 그것을 번역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번역이란 표현과 전달 사이에서 언어를 동기화하는 일을 뜻한다. 개인의 언어를 공공의 언어로, 특수한 언어를 일상 언어로 바꾸는 이 작업은 편집의 영역이다. 편집자의 일이기도 하다. 번역만이 편집자의 일이 아니나 오직 편집자만이 유의미한 번역을 해낼 수 있는 존재다. 하지만 처음 글을 쓰는 사람은 전문 편집자와 함께하기 어렵다. 더군다나 글쓰기는 인간의 일이고 편집은 신의 일이다.* 인간은 신이 될 수 없다. 다만 좌절할 필요는 없다. 흉내 내는 것은 가능하기 때문이다.



*스티븐 킹 《유혹하는 글쓰기》에서 참조


8.png Ⓒ 이학민


한 월간지에 투고한 원고가 선정된 적이 있다. 간단한 문자 인터뷰를 한 지 두 달이 지나고 작업실에 책이 도착했다. 기꺼운 마음으로 상자를 열었다. 책을 열어 목차를 보았다. 내 글이 담긴 페이지를 펼쳤다. 그곳에는 내 원고가 없었다. 내 이름이 있고 내가 보낸 내용은 맞는데 문장은 전혀 달랐다. 독자 투고 원고인 만큼 편집이 개입되리라 예상했으나 개입의 범위는 예상을 아득히 뛰어넘었다. 표현이 달라진 것은 물론이고, 분량도 절반가량 줄어 있었다. 아예 구조가 달랐다. 나는 글을 보낸 게 아니라 사연을 보낸 거구나. 월간지와 라디오가 크게 다르지 않음을 수긍했으나 지금도 그 원고가 내 원고라는 생각은 안 든다. 다만 그것이 반드시 필요한 작업이라는 점에는 동의한다.


타인의 원고를 편집자 역할로 번역한 적이 있다. 월간지 투고 이후의 일이다. 글쓴이의 글이 더 많은 사람에게 가닿길 바라는 마음으로 번역에 임했다. 개성을 존중해 가능한 한 손대지 않으려 했다. 문장마다 빨간 줄을 그어 수정 요청 메일을 보낼 생각도 없었다. 나는 전문 편집자도 아니고, 우리가 책을 만드는 것도 아니니까. 막상 번역을 시작하고부터 나의 태도는 달라졌다. 소리 내 읽고 또 읽으며 날이 저물도록 수정을 이어갔다. 입장이 바뀐 순간, 누구보다 꼼꼼한 번역가가 된 것이다.


편집은 의미 있는 경험이었다. 우리가 글을 쓰고 공개하는 이유 ⎯내가 배운 것 혹 느낀 것을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의무⎯ 를 이루기 위해서는 누구든 알아볼 수 있게 쓰는 것이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날 이후 나는 가능한 모든 표현을 의심하고 더 알아보기 쉽게 바꾼다. 이는 글을 쓰는 일보다 어려운 일이라서 편집자를 동경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 후로 편집자의 책을 찾아 읽는다. 편집자 인터뷰도 자주 본다. 어쩌면 나는 저자보다 편집자에 더 관심이 많은지도 모른다. 따지고 보면 놀랄 일은 아니다. 인상적인 산문집을 낸 시인 중에는 출판사에서 편집자로 일하는 경우가 많다. 편집자는 어디에나 있고, 우리는 늘 편집자의 글을 읽어 왔다.


다만 어떤 책을 누가 편집했는지 찾기는 쉽지 않다. 온라인 서점만 봐도 편집자의 이름을 검색하면 그가 저자로 출간한 책만 나온다. 손바닥만 한, 아니 그보다 더 작은 판권지를 찾아보지 않으면 편집자의 이름을 알 수 없다는 기묘한 사실에 나는 가끔 놀란다. 책의 모든 부분에 관여하는 유일한 한 사람을 논하지 않고 그 책을 설명할 수 있을까.


전문 편집자의 관여 없이 글을 써온 지도 십 년쯤 되었다. 나는 여전히 글을 마무리할 때마다 편집자를 흉내 내는데, 그때에는 창작자 자아가 아닌 생활인 자아를 활용하는 편이다. 내 글이 더 많은 사람에게 가닿길 바라는 의도를 창작자 자아는 별로 신경 쓰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창작자 자아를 매번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이따금 번역 없이, 창작자 자아로만 글을 쓸 때가 있다. 자유로운 표현의 기쁨을 주지 않고, 생활인 자아로만 글을 쓰면 창작의 동력을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공개하는 글은 공공성을 가졌으나 모든 글이 공공의 목적을 가진 것은 아니다. 때로는 한 사람을 위한 글도 있다. 만나지 못할 한 사람을 향해 우리만 아는 표현으로 연서를 쓰기도 한다. 연서는 수신인에게 가닿지 않으면 끝내 아무도 해독하지 못한 암호문으로 남는다. 나의 연서가 한 사람에게 가닿는 것이, 많은 사람에게 전해지기보다 어렵다는 사실을 나는 모르지 않는다. 그럼에도 마음을 전하는 일은 쉽게 멈추지 못한다.


그런 사람이 있다. 만나면 아무 말이나 꺼내 놓게 되는. 의미를 알지 못해도 안다고 말하게 하는. 어떻게든 대화를 이어가고 싶게 만드는. 그러나 이제 만날 수 없는 사람. 그 사람에게 마음을 전하는 일은 이제 나의 일이 아니다. 오직 신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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