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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학민 Jan 18. 2023

한 사람의 선의

《나의 아저씨》 대본집과 드라마

tvN 드라마 《나의 아저씨》(2018)를 ‘인생 드라마’로 꼽는 분들이 많다. 나 또한 이 드라마를 각별하게 여긴다. 인간과 인생을 말하는 작품이라면 대체로 선호하지만, 이 작품만큼 인간의 결을 충실히 재현해 낸 작품은 드물다고 느껴서다. 종영한 지 오래인 이 작품을 새삼스레 꺼내 온 까닭은, 최근에서야 이 드라마의 대본집을 만났기 때문이다. 세계사 출판사가 기획한 ‘인생 드라마 작품집 시리즈’의 첫 책으로 출간된 《나의 아저씨 세트 (박해영 대본집)》(박해영, 세계사, 2022)를 보면서 나는 처음 드라마를 보던 그때처럼, 처연함과 위안을 동시에 느끼고 말았다.


대본집에서 눈길이 가장 오래 머문 곳도 드라마를 볼 때와 마찬가지로 마지막 장면이었다. 우연히 길에서 재회한 ‘동훈’(이선균)과 ‘지안’(이지은)은 마주 보며 악수한다. 짧은 대화가 끝나고 돌아선 두 사람. 미소 띤 동훈의 얼굴 위로 다음과 같은 문답이 오간다. “지안. 편안함에 이르렀나.”, “네. …네.” 지안의 대답이 왜 두 번인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기로 한다. 다만 지금 말하고 싶은 것은 이 장면이 없었더라면 나는 이 작품을 이토록 오래 기억하지 않았으리라는 것. 이 한 장면을 보기 위해 드라마와 대본집을 봤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만큼 인상적인 결말이었다.


이번엔 드라마와는 조금 다르게 표현된 장면을 말해보겠다. 결말에서 조금만 거슬러 올라가 보자. 집에 혼자 남은 동훈은 억지로 먹은 밥을 게워내고 TV 앞에 앉는다. 이윽고, 운다. 기년 전 드라마를 볼 적에 나는 이 울음에서 두 가지 의미를 짐작했다. 첫째. 동훈은 상처에 고통받고 있다. 둘째. 인간은 비로소 혼자가 된 순간에야 슬픔을 토해낸다. 이렇게 짐작에만 머문 의미가 대본집에는 제법 정확하게 표현돼 있었다. 동훈의 울음 위로 다음과 같은 이펙트(Effect, 효과음)가 적혀 있던 것이다. “그날 처음, 나를 끌어안고 울었다. / 한 번도 안아본 적 없는 나를. 끌어안고 울었다.”


그러므로 동훈의 울음은, 이전 장면에서 ‘기훈’(송새벽)이 말한 ‘인간의 자가 치유’로 봐야 할 것이다. 그런데 동훈이 어떻게 울었던가. 어떤 소리로, 얼마나 울었던가. 궁금증을 참지 못한 나는 넷플릭스를 켰다. 드라마를 정주행하기 시작한 것이다. 대본집을 덮고, 드라마를 다시 보자, 일전에 보이지 않던 것들이 얼마쯤 보였는데, 이 드라마에 관한 훌륭한 해석과 의견이 담긴 글이 수없이 많으므로 나는 한 가지만 말해보려고 한다. 한 사람의 선의가 소외된 이들에게 보여준 것에 관하여. 그것을 말하려면 두 사람과 하나의 장소가 필요하다. ‘춘대’(이영석), ‘기범’(안승균) 그리고 지안의 할머니를 보낸 장례식장.


지안 곁에 있던 유일한 어른, 그러나 지안의 삶을 바꿔줄 힘은 없던 춘대는 할머니의 장례식을 둘러보다 말한다. “할머니가 복이 있으시다.” 다음은 기범. 지안의 경제적 공동체이자 유일한 친구, 기범은 장례식장에서 동훈에게 말한다. “고맙습니다.” 나는 이 두 사람의 반응을 보다가 뜻밖에도 눈물을 흘렸다. 이내 두 사람의 마음을 상상하기에 이르렀다. ‘드디어’ 평범한 일상의 장면(장례식) 안에 놓인 지안을 보면서, 그에게 복되고 고마운 일이 벌어진 광경 앞에서, 그들은 세상과 인간을 긍정하게 되지는 않았을까. 상상하다가 한 사람의 선의에서 비롯된 위안의 범위에 새삼 놀라고 말았다.


동훈이 거대한 선의를 베풀었다는 의미는 아니다. 함께 회식을 가자고 말한 작은 선의. 그것이 한 인간의 생의 궤도를 바꿔놓았고, 그 광경을 지켜본 이들에게도 희망과 위안을 전해주었음을 말하고 싶다. 확인할 수 없으나 춘대와 기범의 마음도 편안함에 이르지 않았을까. 그랬다면, 한 어른의 작은 선의가 만든 가장 커다란 변화이리라. 어떤 어른이 좋은 어른인지 나는 알지 못한다. 다만 어른이란, 살아온 세월의 숫자가 아니라 타인에게 베푼 작은 선의의 횟수로 만들어진다는 사실을, 이 작품을 통해 믿게 되었다. 그래서 이 드라마는, 내게 인생 드라마이다. 인생에 두고, 오래도록 인생을 배울 드라마이다.




(2023. 01. 18.)


(@dltoqur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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