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시선들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학민 Jan 26. 2023

비극을 공부하는 일

애플TV+ 시리즈 《블랙 버드》

마약 사범으로 체포돼 10년 형을 받은 ‘제임스 킨’(태런 에저턴, 이하 ‘지미’)은 FBI로부터 한 가지 제안을 받는다. 살인 혐의로 수용돼 있으나 항소 중인 사이코패스 살인마 ‘래리 홀’(폴 월터 하우저, 이하 ‘래리’)에게 자백을 끌어내면 즉시 석방해주겠다는 제안. 달콤한 동시에 위험천만한 이 사법 거래 제안을 애써 외면하던 지미는 아버지가 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형기대로라면 임종조차 지키지 못할 처지에 놓인 것이다. 결국 그는 FBI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그렇게 《블랙 버드》(Black Bird, 애플TV+, 2022)의 본격적인 서사가 시작된다.

      

결말을 말하자면 래리는 종신형을 선고받는다. 그러나 주인공(지미)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이 서사는 비극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미 스무 명 넘는 인간이 살해되었기 때문이다. 수많은 삶을 강탈한 래리는 ‘고작’ 옥살이를 한다. 그가 사회로 돌아가지 못했다는 것은 추가 범죄를 막아냈다는 의미겠으나 나는 이것(종신형)으로 충분한 결말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피해자들의 시신을 찾지 못했다는 것. 그리고 이 결말이 실화라는 점을 안다면, 누구든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까. 지나친 짐작이 아닐 것이다.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비극은 지켜보는 이들까지 고통스럽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 시리즈를 고통에 무감한 작품으로 보지는 않는다. 오히려 섬세한 편에 속하리라. 시신 대신 ‘인간’의 얼굴을 좇는 카메라의 시선에서 보이듯 이 시리즈는 흥미를 돋우기 위해 자극을 전시하지 않는다. 시각적 잔혹함보다도 그 사건으로 인해 우리가 잃은 것이 무엇인지를 명확히 전달한다. 다만 이것은 비극의 서사이기에 고통은 피할 수 없었다. 래리가 사건을 자세히 묘사(이야기)할 때 나는 그것(자백을 받아내는 것)이 목표이던 지미와 마찬가지로 고통을 느꼈다. 곧 이런 의문이 들었다. 나는 왜 이 고통을 감내하며 이 시리즈를 보고 있는가.

     

분명한 것은 잔혹함을 즐기기 위해서 이 시리즈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는 것. 극에 나온 사건을 현실에서 예방하기 위함도, 당연히 아니다. 그럴 수도 없다. 보는 것만으로 범죄자에 대한 분노가 해결되지도 않았다. 이 같은 극화로 특정 범죄자가 ‘종신 기록형’이라는 형벌을 하나 더 받는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이쯤이면 고통을 감수하면서까지 이 시리즈를 볼 이유가 없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러면 질문을 뒤집어볼까. 이 시리즈를 보며(고통을 느끼며) 무엇을 느꼈는가(배웠는가). 이에 관해서라면 다음과 같은 두 가지를 공부하는 심정이었다고 답해야 하겠다.

     

첫째. 보편 감수성에 관한 공부. 비극은 삶의 일부이며 그것을 직시한다는 건 인간으로 남기 위한 사소한 노력 중 하나일 것이다. 물론 양과 질이 같은 고통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아서 ‘보편적인 고통’ 따위 운운하기 어렵다. 그런데 몰라서는 안 된다. ‘퍽 당연해 보이는’ 고통조차 배우지(느끼지) 않으면 인간으로 남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시리즈로 나는, 다만 듣는 것만으로도 전해지는 고통을 배웠다. 둘째. 예외적 존재에 관한 공부. 사이코패스 범죄자를 배워야 할 이유는 간명하다. 그들이 현실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제임스 팰런은 《사이코패스 뇌과학자》(더퀘스트, 김미선 역, 2020)를 통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어느 집단이든 2퍼센트는 사이코패스이며, 그들 역시 사회에 필요한 존재라고. 그러면서 자신이 사이코패스와 유사한 특질을 지녔으나 부모의 세심한 보살핌 덕분에 사회 구성원이 될 수 있었음을 고백한다. 《블랙 버드》속 래리의 사정과는 정반대인 셈이다. 래리는 어린 시절부터 낮은 지능과 사이코패스 기질을 드러내는데, 부모로부터 보살핌이 아니라 폭력성이 강화되는 방식으로 양육되었다. 윤리가 아니라 병리에서 시작된 비극이라는 말이다. 결국 일(납치, 강간, 연쇄살인)은 벌어졌고, 무엇도 되돌릴 수 없다. 되돌릴 수 없을 때 인간은 다음을 기약한다.

      

나는 이 시리즈를 보며 늦기 전에 예외적 존재들을 공부해야 한다는 사실을 배웠다. 배제하기 전에 공존하기 위해서. 그런데 양육은 ‘일단’ 개인의 문제다. 어떤 사회라도 그렇다. 보편적이지 않은 인물이 괴물로 성장하는 일에 공동체 혹은 타인이 개입할 수 없다는 것. 그래서 사건이 벌어진 후에야 비슷한 후회를 반복한다는 것. 이는 비극이다. 설사 막아낸다고 하더라도 이미 벌어진 고통은 되돌릴 수 없다. 이 또한 비극이다. 비극을 공부하는 일은 이처럼 비극적이다. 이 비극을 간신히 견뎌내는 이유는, 이것이 공동의 비극, 인간의 비극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2023. 01. 25.)


(@dltoqur__)





매거진의 이전글 한 사람의 선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