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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학민 Mar 07. 2023

반대편에 사는 사람

에세이 앤솔러지 《너와 나의 야자 시간》

이번에도 봄은 올까요? 종일 걷다 보니 알겠습니다. 봄은 이미 오고 있었습니다. 이 말은 겨울이 가고 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저는 겨울을 좋아하지만, 이번 겨울은 예외입니다. 유난히 춥고 길어서 작별을 부추겨 보았습니다. 결과는 그대로더군요. 이번에도 겨울은 필요한 만큼 머물다 떠나가는 듯합니다. 그 후론 점점 더워지겠고요. 생각해 보면 인생이란 더위와 추위를 번갈아 겪는 일 같기도 합니다. 더울 때는 추위를, 추울 때는 더위를 그리워하면서요. 그런 마음이 돌고 돌아 바퀴처럼 구를 때 세월이 가는 것일 테지요.

     

계절의 순환은 허기와 비슷해서 기다릴 필요는 없겠습니다. 다만 준비는 해야 합니다. 밥 지을 기운이 남아 있을 때 밥을 지어야 하는 것처럼, 춥거나 더워지기 전에 대비해야 할 일들이 있으니까요. 다음 주부터는 봄옷을 세탁하고 긴 청소를 시작하려고 합니다. 네, 아직 실행하지 않고 머뭇댑니다. 3월 초의 일들 앞에서 저는 매번 이럽니다. 선생님은 어떠신지요. 봄 준비를 시작하셨는지. 아직이라면 봄을 닮은 책으로 미리 봄 기분을 느껴보시는 건 어떨는지요. 오늘 가져온 책의 제목은 저 위에 쓰여 있듯이 《너와 나의 야자 시간》*(책폴, 2022)입니다.

      

여덟 저자가 함께 쓴 이 에세이 앤솔러지는 (서점의 분류에 따르면) 청소년 에세이입니다. 저자 중 청소년은 없습니다. 지나지 않고는 전할 수 없는 시간이 있지요. 그것을 담기 위해 기획한 책이라고 짐작해봅니다. 저는 고작 어른이라는 이유로 청소년기를 다룬 이 책이 멀게 느껴졌습니다. 그랬는데 책을 펴자마자 과거를 살게 되었습니다. 첫 편부터 빠져들고 만 것입니다. 해서, 선생님께 책의 첫 원고를 소개해보려고 합니다. 이 글이 무엇도 대표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새삼 안도하면서요. (이렇게 다른 저자분들께 양해를 구해봅니다)


     

첫 원고 〈아임 폴 인 러브 어게인〉은 김달님 작가가 썼습니다. 사랑에 관한 이야기이고요. 2005년. 고등학교 2학년이 된 저자는 야간 자율 학습을 시작합니다. 긴장감이 흐르는 교실은 조용했을 테지요. “그럼에도, 그 조용함 속에서도 일어날 일들은 야금야금 일어났다”(10쪽)는 문장 그대로 저자에게 일이 일어납니다. 마음에 봄이 온 것입니다. 좋아하는 대상은 우연히 인연을 맺게 된 친구의 친구인데요. 저자는 아직 그이를 실제로 만난 적이 없습니다. (당시 유행하던) 미니홈피에서 존재를 확인하고, 문자와 전화를 주고받은 게 전부거든요.

     

저자는 궁금해합니다. “한 번도 만나 본 적 없는 사람을 좋아할 수 있을까.”(12쪽) 그러나 이것은 질문이 아니라 확인에 가깝습니다. 이미 그에게 마음이 넘어지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저자에게 그는 “반대편에 사는 사람”(13쪽)입니다. 정말로 사는 곳이 멉니다. 저자는 산으로 둘러싸인 곳에서, 그는 바다 곁에서 삽니다. 저자는 “어쩌면 그 물리적인 거리감이, 쉽게 만날 수 없다는 안도감이 좋아하는 마음을 빠르게 키웠는지도 모르겠다”(같은 쪽)라고 말합니다. 멀어서, 가까워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만나자고 합니다.


저자는 덜컥 겁이 납니다. “나를 보면 실망할 거라는 확신에 가까운 마음이 그 애에게서 성큼 뒤로 물러서게 했다. 그리고 알고 있었다. 지금 내가 보내고 있는 시간이 얼마나 중요한 시기인지를.”(23쪽) 대학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지만, 시절마다 가장 중요한 목표는 있기 마련이지요. 수험생에게는 수능이 그러할 것입니다. 고민 끝에 만남을 미룬 저자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직접 얼굴을 보고 나면 이미 그 애 쪽으로 기울어진 마음을 돌이킬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같은 쪽) 이윽고 사랑은 천천히 희미해져 가고, 시간은 마음보다 빠르게 흘러가 버립니다.

      

저자는 “선명한 것은 오직 내 것이었던 내 마음뿐”(27쪽)이라고 말합니다. 이제 그는 마음 안에서만 살아가는 것일 테지요. 희미해진 한 시절의 마음 안에서. 두 사람 사이에 놓인 공간의 거리가 시간의 거리로 변하는 동안 저자는 어른이 되었습니다. 작가가 되었고요. 저는 이것을 다행스럽게 여깁니다. 덕분에 작가의 독자가 될 수 있었으니까요. 가끔 저는 현실의 인연보다 책의 목소리에 더 의지하곤 합니다. 그 존재가 더 귀해서라기보다는 누구도 줄 수 없는 것을 제게 주었다는 것. 동시에 제가 누구인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점 때문인 듯합니다.

     

책의 반대편에서 ‘들으며’ 살다 보니, 주변 일에 무심한 저도 책으로 말하는 이가 겪는 일에는 마음이 쓰이곤 합니다. 겨울 동안 두 번의 부고를 읽었습니다. 아무 말도 전하지 못했습니다.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요. 여전히 모르겠습니다. 사람마다 가진 내력과 내면의 계절이 각기 다르므로 타인의 마음을 함부로 짐작할 수 없겠습니다. 그래서 조심하는 마음으로 이렇게 편지를 쓰게 된 것입니다. 책을 가져와 에두르다 보면 그래도 조금은 진심을 전할 수 있으리라 믿고서요. 그런데 잘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아무리 쓰고 지워도 조심만 남는 것을 보면 말입니다.

     

가끔 나이 듦에 대해 생각합니다. 누군가를 떠나보낼 때마다 시간은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합니다. 더 많은 시간이 지날수록, 나이를 먹어갈수록 원치 않는 작별이 점점 더 많아지겠지요. 생각해 보면 인생이란 작별과 그리움을 번갈아 겪는 일 같기도 합니다. 겪다가 더는 새로이 그리워할 존재가 없을 때 비로소 그리운 이들이 사는 반대편으로 가게 되는지도요. 먼저 떠난 이들의 계절은 언제나 봄이었으면 합니다. 자유롭게 세상을 거닐기에 좋은 계절이기를. 그래서 이곳의 봄보다 더 지낼 만하기를. 오늘은 달님에게 그런 소원을 빌어보았습니다.



일러스트 임나운


(2023. 03. 07.)

(@dltoqur__)



*《너와 나의 야자 시간》(김달님·조우리·전성배·최지혜·서윤후·장한라·장도수·황혜지 저, 임나운 그림, 책폴,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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