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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학민 Mar 12. 2023

가장 사적이고 사회적인

아니 에르노 소설 《남자의 자리》

2022년 노벨문학상의 주인공은 아니 에르노였다. 스웨덴 한림원은 “사적 기억의 근원과 소외, 집단적 구속의 덮개를 벗긴 용기와 해부학적 예리함”을 선정 이유로 꼽았다. 해석이 나뉠 문장은 아닐 것이다. 다만 상징과 수사로 쓰인 글이 대개 그렇듯 의미는 저마다 조금씩 다르게 다가오리라. 나는 이렇게 받아들였다. ‘아니 에르노는 문학을 통해 사적 기록이 사회적 증언이 될 수 있음을 증명했다.’ 근거의 근거는 형식에서 찾아보려고 한다. 아니 에르노는 주로 자전 소설(auto-fiction)로 분류되는 작품을 발표해왔으니 작품 속 ‘나’를 그 자신(작가)으로 인식해도 크게 무리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나’는 단순히 한 사람을 뜻하지 않는다. 사회 속 ‘나’를 말한다. 그의 소설은 자신만의 개별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사회적 맥락 안에서 체험한 이야기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삶을 복원한 《남자의 자리》(신유진 옮김, 1984Books, 2021)에도 사회적 증언이 담겨 있다. ‘아버지’의 장례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기차 안에서 “이 모든 것을 설명해야 한다”라는 충동에 휩싸인 ‘나’는 선언한다. “아버지와 그의 인생에 대해 그리고 사춘기 시절 그와 나 사이에 찾아온 이 거리에 대해 말하고 쓰고 싶었다. 계층 간의 거리나 이름이 없는 특별한 거리에 대해.”

      

자전 소설에서 세상을 떠난 아버지의 인생을 되짚어보는 것은 그리 특별해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계층’이라는 단어가 등장하는 순간, 이 소설은 특별해진다. 계층이란 ‘나’의 존재만으로는 성립할 수 없는 사회 구조적 위치이기 때문이다. 이후부터 소설은 개인의 이야기가 아니라 사회적 이야기로, 나아가 계층에 관한 체험담으로 읽히기 시작한다. 정서적 공감을 넘어 시대적 보고로 다가온 것이다. 알려진 대로 가난한 노동자의 딸로 태어나 부르주아의 일원이 된 아니 에르노는 소설의 거의 끝에서 ‘나’의 입을 빌려 말한다. “내가 교양 있는 부르주아의 세상으로 들어갈 때, 그 문턱에 두고 가야 했던 유산을 밝히는 일을 마쳤다.”

      

노동자와 부르주아의 일상, 계층 이동, 이동 후 남은 양가감정(수치와 자부심, 그리움과 이질감), 차마 이동하지 못한 근원적 태도(교양). 이와 같은 ‘문턱에 둔 유산’을 기록하기 위해 아니 에르노는 대상(그것이 자신일지라도)과 정서적 거리를 두었으며 건조한 문체를 통해 감정을 절제했다. 책에서 확인할 수 있는 내용이다. 다시 기차 안으로 가보자. 아버지의 인생을 쓰기로 다짐한 ‘나’는 이렇게 덧붙인다. “아버지의 말과 제스처, 취향, 아버지의 인생에 영향을 미쳤던 사건들, 나 역시 함께 나눴던 한 존재의 모든 객관적인 표적을 모아보려 한다. 시처럼 쓴 추억도 환희에 찬 조롱도 없을 것이다.”

      

이어진 소설의 내용을 보면 이 선언이 거짓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기차 안’에서 발견할 수 있는 건 객관적 사실이 아니라 단호한 의지이다. 그러니까 가장 사적이고 사회적인 이야기는 특별한 작법이나 명백한 증거가 아니라 강인한 의지로부터 출발한다는 의미이리라. 문학이 아니라 삶에서는 어떤가. 일단, 인간은 객관적일 수 있는가. ‘객관’의 정의는 ‘자기와의 관계에서 벗어나 제삼자의 입장에서 사물을 보거나 생각함’(표준국어대사전)이다. 그러나 ‘나’라는 뚜렷한 자아를 가진 인간은 타자가 될 수 없다. 다만 가정하거나 상상할 뿐. 그러므로 인간은 객관을 추구할 수 있으나 완벽히 도달하진 못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문학에서와 마찬가지로 객관 추구(의지)는 중요하다. 제삼자의 입장에서 세상을 보기 위해서는 상상이 필요한데, 스스로 타자가 되는 상상을 할 때 인간은 성장하기 때문이다. 상상과 성장 사이에 있는, 혹은 그것을 잇는 능력을 우리는 감수성이라고 부른다. 감수성이 높을 때 상상(가정)과 현실(실제 타자의 감정)의 차이는 최대한 줄어든다. 그래서 나는 ‘감수성’과 ‘사회적 지능’이 거의 같은 단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이렇게도 말해볼 수 있겠다. “감수성을 공부하는 이유는 ‘나는 특별하나 나만 특별하진 않다’라는 객관적 사실을 배우기 위해서이다.” 물론 이 글 자체는 (하)나의 주관에 지나지 않을 테지만 말이다.



(2023. 03. 12.)

(@dltoqur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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