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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학민 Mar 22. 2023

편집자 봄동씨의 일일

봄동이 에세이 《편집하는 삶》

사람들의 욕망을 확인할 수 있을까. 그것이 가능하다고 믿는다면, 도서 베스트셀러 순위도 (여전히) 참고할만한 자료라고 말할 수 있으리라. 책을 선택하는 일이 내가 가진 욕망의 이름을 확인하는 것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같은 이유로 한 시기에 많은 사람이 찾는 책에는 그 시기 사람들의 결핍이 담겨 있다고 믿어봄 직하다. 요즘은 어떨까. 종합 베스트셀러를 보니 부자나 투자에 관한 책이 빠지지 않고 들어 있다. 바꿔 말하면 사회 구성원 대다수가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의미이리라. 그런데도 나는 돈에 관한 책에는 손이 가지 않는다.

     

학문적인 접근(경제학)이든, 실용서(재테크)든, 기업의 철학을 담았든(경영서) 사정은 같다. 다만 취향이 그럴 뿐인데 예외는 있다. 출판 경영서인 경우. 이유는 간명하다. 재미가 있어서다. 책이나 영화를 보고 코멘터리나 인터뷰를 찾아보는 사람이면 알만한 재미. 거기엔 내가 본 세계를 만들고 유지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담겨 있는데, 나는 그것을 들으며 공감하거나 영감을 얻는다. 그런데 읽다 보면 안타까움이 느껴질 때가 있다. 다시, 돈에 관한 이야기이다. 출판계 종사자가 쓴 경영서에는 ‘언제나’ 경제적인 어려움이 기록돼 있다.

      

출판사 ‘책나물’의 대표가 쓴 《편집하는 삶》(2023)도 그렇다. 저자 ‘봄동이’는 문학 편집자로 오래 근무하다가 퇴사 후 1인출판사를 만든 3년 차 출판 경영인이다. 책에는 “즐거움과 괴로움이 함께하는 편집하는 삶”이 더함도 뺌도 없이 진솔하게 담겨 있다. 형식은 일기 혹은 업무 일지에 가깝다. 어느 편집자의 일일을 읽고서 나는 안타까움을 느끼기보다는 이 책을 다른 분들에게 알리고 싶어졌다. 추천 이유는 두 가지이다. 첫째, 삶을 대하는 저자의 태도가 우리에게 도움이 될 것 같아서. 둘째, 그러한 태도를 독자로서 오래 지켜보고 싶어서.

      

책의 제목과 달리, 나는 ‘책을 편집하는 삶’ 대신 ‘삶을 편집하여 담은 책’이라고 소개하고 싶다. 여기서 삶의 편집이란 시간의 쓰임을 의미한다. 저자는 출판사 대표이자 프리랜서 편집자이다. 프리랜서라고 하면 ‘시간의 주인’처럼 보인다. 오해다. 시간의 주인이 되는 것은 소속과 관계없이 어려운 일이다. ‘시간표의 주인’ 정도가 적당하리라. 시간표 안에는 일과 휴식과 생활이 있고 이것을 얼마나 ‘낭비 없이’ 분배하느냐가 삶의 질을 결정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가장 좋은 편집은 낭비 없는 편집이지 않던가. 더할 것도 뺄 것도 없는.

     

나는 그것을 편집의 진리로 여기는데, 저자가 편집한 삶도 이와 다르지 않아 보였다. 저자는 출판사 운영(책의 기획, 편집, 디자인 의뢰, 마케팅 등)은 물론 출판사 유지와 생활을 위해 교정·교열 아르바이트까지 한다. 바쁜 와중에도 휴식과 취미 생활도 게을리하지 않는다. 동네 도서관에 가거나 야구를 보고, 초등생 조카와 시간을 보내는데 인색하지 않다. 필요하면 달력의 검은 날을 빨갛게 칠한다. “마음 가는 것에는 무휴의 끈질긴 마음으로, 그래도 밑바탕에는 휴무의 즐거운 마음이 함께하는 삶을 지향하면서” 일하기 때문이리라.

     

저자는 하루가 아니라 순간의 소중함에 대해서도 말한다. “우리가 주어진 24시간을 온전히 다 우리 맘대로 할 수는 없겠지만, 다만 한두 시간이라도 오롯이 자신의 뜻대로 만들어간다면, 삶이 조금은 더 풍요롭고 아름다워지지 않을까.” 이처럼 ‘느슨한데 꽉 찬 하루’를 보내는 저자는 1인출판사의 대표이자 유일한 직원으로 일하면서도 외로움을 토로하지 않는다. 마치 혼자가 아니라는 듯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세상일 중 오롯이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얼마나 되겠는가. ‘1인’출판사지만, 저자에게 ‘1인’은 고립된 점이 아니라 뻗어나가는 시작점처럼 보인다.

      

혼자라는 시작점은 여러 갈래로 향한다. 첫 번째 점은 독자에게로 간다. 책의 기초 원고는 저자가 온라인에 남긴 (비격식) 업무 일지이다. 이 기록은 그대로도 흥미롭지만, 기능적으로도 탁월해 보인다. 알리기와 친해지기. 즉, 홍보와 관계 형성이라는 출판사-독자 간의 연결을 시도한 것이기 때문이다. 다음 점은 편집자-작가로 이어진다. “마음에 와닿는 작품과 마음 맞는 작가와 연결되어, 함께 책을 만든다는 감각이 계속 이 일을 하게 만드는 것 같다.” 이 문장에서 방점은 ‘연결’과 ‘함께’에 찍어야 하리라.

      

마지막 점은 같은 길을 걷는 이에게로 향한다. 혼자 일하는 사람에게 선배의 기록이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나는 조금 안다. 그래서 책에 담긴 ‘에폭시’ ‘투명홀로그램박’ 같은 전문 용어와 부록처럼 담긴 1인출판사 운영에 관련한 문답이 어쩐지 다정하게 느껴졌다. 미래의 동료를 위해 경험을 나누는 선배의 모습 같아서. 저자의 모토는 ‘미지근하게 오래오래, 열심히 즐겁게’라고 하는데, 한 줄을 더 추가해도 좋을 것 같다. ‘소중한 사람과 함께.’ 한 사람에게서 출발한 점이 독자, 작가, 동료들에게 이어졌다는 점에서.

     

책을 읽다가 생각난 창작자가 있었다. 일본의 만화가이자 수필가 마스다 미리. 문체가 유사하다는 말은 아니다. “자신이 언제 힘든지, 힘들 땐 어떻게 회복할 수 있는지 잘 아는 것은 중요해.”라거나 “나도 아직 젊은데, 젊은 친구들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짓게 되는 걸 보니 나이 들어가는 게 느껴지네.” 같은 문장을 읽으며 단단하고 명랑한 ‘어른 일기’를 떠올린 것이다. 생각난 김에 마스다 미리의 책을 찾아보니 못 본 사이, 출간 저서가 추가돼 있었다. ‘편집자 봄동씨의 일일’을 담은 흔적도 그랬으면 한다. 더 오래, 더 자주 만나볼 수 있기를.

     

그러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그는 그의 일을 할 테니, 우리는 독자의 일을 하면 되겠다. 요컨대 내게 도움이 되고 사회적으로도 좋은 영향을 주는 창작자 혹은 작품을 지켜가는 일. 방법은 간단하다. 저자가 쓴 그대로. “좋아하는 창작자가 있다면 그들이 만든 작품에 계속 돈을 써야지. 그래야 그들은 창작을 계속할 수 있고, 우리는 그의 새로운 창작물을 계속 즐길 수 있을 테니까!” 서두에 언급했듯이 출판사는 ‘언제나’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는 듯하지만,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고, 우리가 그렇게 두지는 않을 거라고 자신해 본다.

     

(2023. 03. 21.)

(@dltoqur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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