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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학민 Mar 26. 2023

누구도 바라면 안 되는 것

영화 《미스 슬로운》

다음 세 가지 경우는 통념에 가깝다. 첫 번째, 과정이 올바르고 결과도 좋다면 최고이다. 두 번째, 과정이 올바르지 않았는데 결과마저 나쁘면 최악이다. 세 번째, 과정은 정당했으나 결과가 좋지 않으면 최선을 다했다고 말할 자격을 얻는다. 그런데 다음의 경우―비윤리적인 과정을 통해 좋은 결과를 얻을 때―엔 의견이 분분하리라. 윤리를 중요하게 보는 이들은 과정이 올바르지 않다면 결과를 따질 필요도 없다며 평가절하한다. 반대로 결과만 보고 판단하는 이도 있다. 그렇게 해서라도 이기면(이루면) 그만 아니냐는 관점이다. 과정이 올바르면 결과는 중요하지 않은가. 혹은 결과가 좋으면 과정은 아무래도 상관없는가.

      

새삼 해묵은 논쟁을 하려는 건 아니다. 어느 쪽이 정답인지, 어떻게 해야 우리에게 더 이로운지는 따지지 않을 것이다. 모두 잘 알고 계시리라 믿는다. 여기서는 조금 다른 경우에 관해 말해보려고 한다. 개인이 법을 어겨서라도 공동체에 이익을 가져다주는 경우.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판단해야 할까. 존 매든 감독의 영화 《미스 슬로운》(Miss Sloane, 2016)을 보다가 떠올린 의문이다. 영화의 주된 갈등은 법안 통과 여부이다. 총기 구매 시 신원 조사를 강화(의무화)한다는 내용의 (가상의) 법안 앞에서 입장이 다른 두 집단이 대립한다. 한쪽은 통과를, 다른 한쪽은 저지를 원한다.

     

양측은 미국의 방식대로 로비스트를 고용한다. 상황은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저지하려는 쪽이 더 유리하다. 더 많은 돈과 권력을 가졌기 때문이다. 막대한 자금력을 가진 총기 회사와 그 회사들로부터 로비를 받은 국회의원이 존재하는 한 법안 통과는 어려워 보인다. 그런데 져 본 적 없는 로비스트 ‘엘리자베스 슬로운’(제시카 차스테인)의 선택이 결과를 바꾼다. 그가 법안을 통과시키는 편에 서자 판세가 뒤집힌 것이다. 결국 법안이 통과되는데, 슬로운 자신은 위증죄로 감옥에 간다. ‘나’는 지더라도(복역) ‘나의 일’은 지지 않는다(법안 통과)는 태도로 자신조차 도구화하여 거둔 승리이다.

     

슬로운이 ‘그렇게까지 해서’ 얻은 승리는 공동체에 분명한 이익을 제공했다. 여기서 이익이란 단순히 법안의 통과를 말하는 게 아니다. 법안만 놓고 보면 논쟁의 여지가 있다. 총기 산업에 악영향을 미쳤다고 말하는 이도 있을 테고, 총기 소지가 오히려 시민의 안전을 지켜준다고 믿는 사람도 존재할 테니 말이다. 사회 안에는 다양한 가치관이 상존하며 그러므로 모두에게 이로운 해답을 찾기란 어렵다. 그러나 (슬로운의 표현대로) ‘자기 보전에만 급급하여 시민에게 등을 돌린 배부른 쥐’들이 처벌받은 결과는, 가치관과 관계없이 공동체의 승리이자 이익이리라. 다만 궁금한 것. 슬로운은 왜 불리한 편에 섰는가.

      

신념으로 보기엔 묘사가 희미하고, 정의감을 운운하는 건 앞뒤가 맞지 않는다. 선택지가 없었다고 말하기엔 최초의 요구를 받아들였으면 될 일이었다. 승리만을 욕망하던 그가 질 것 같은 승부에 모든 것을 건 이유는 무엇인가. 혹 멈추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승리밖에 없던 인생의 공허를 말이다. 실제 수의를 입은 그의 표정은 편안해 보이기까지 했다. 마치 원하는 바를 이루었다는 듯이. 가장 강한 권력과 대립하게 되면 이기든 지든 자신은 추락하게 될 것이며 그것을 얼마간 바란 것이 아니겠냐는 의견이다. 지나친 이 상상을 그대로 인정한다면 그가 원하는 결말을 맞이하게 된 셈인데, 나는 이 결말에 얼마쯤 무력감을 느꼈다.

     

해피엔딩인 것 맞다. 부도덕한 이들이 처벌을 받았고, 영화는 슬로운이 출소하는 장면에서 막을 내렸으므로. 다만 내가 무력감을 느낀 이유는 그것이 개인의 능력과 희생에 기댄 결과이기 때문이다. 책임 또한 개인이 감당한 모양새이다. 그러지 않으려고 사회를 구성하는 것 아니던가. 슬로운이 최선을 다한 것은 문제가 아니며 잘못에 책임을 진 것 역시 당연한 일이다. 다만 공동체의 문제를 개인에게 전가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결과가 좋더라도 이런 과정이라면 나는 반대한다. 낙관과 희망에 기댄다고 하여도 영웅을 바라는 건 곤란하다. 권력자들이 제멋대로 굴 때마다 슬로운이 등장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을 바라서도 안 될 것이다. 


(2023. 03. 26.)

(@dltoqur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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