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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학민 Apr 05. 2023

아닐지도 모른다

애플TV+ 시리즈 《제이컵을 위하여》

의심에는 하나의 조건이 필요하다. 진실을 몰라야 한다. 의미 자체가 ‘확실히 알 수 없어서 믿지 못하는 마음’이기 때문이다. 알지 못해 생긴 의심은 때로 인간을 무너뜨리기도 한다. 이번에도 조건이 있다. ‘알지 못하나 알기 두려운 마음’ 안에 의심이 자랄 때. 《제이컵을 위하여》(애플TV+, 2020)에서 만난 의심도 이와 다르지 않아 보였다.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이 작품은 완벽해 보이는 부부 ‘앤디’(크리스 에반스)와 ‘로리’(미셸 도커리)에게 찾아온 뜻밖의 시련으로 시작한다. 그들의 아이 ‘제이컵’(제이든 마텔)이 살인 용의자로 지목된 것이다. 증거는 피해자의 옷에서 발견된 제이컵의 지문이 유일하다. 목격자도, 완벽한 물적 증거도 아직 없다. 그러므로 앤디는 확신한다. ‘나의 아들은 범인이 아니다.’ 진실 규명을 끝낸 앤디의 다음 할 일은 무엇인가. 이쯤에서 원제를 보자. 한국어 제목은 ‘제이컵을 위하여’이지만 원제에는 ‘for’가 아닌 ‘Defending’이 쓰여 있다. Defending Jacob.

     

아시다시피 ‘Defend’의 뜻은 두 가지이다. ‘방어(수비)한다.’ 그리고 ‘(피고를) 변호한다.’ 제목대로 앤디는 제이컵을 변호한다. 변호사가 아니라 아버지로서, 진실보다 더 소중한 것(아들과 자신의 현실)을 지키기 위해서. 이 대목에서 봉준호 감독의 영화 《마더》(2009)가 떠오르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리라. 영화 속 ‘엄마’(김혜자)가 ‘도준’(원빈)의 무고를 밝히기 위해 애쓴 것처럼 앤디도 아들을 지키기 위해 수사 기관과 대립하기 때문이다. 다만 영화 속 도준의 엄마가 법을 잘 알지 못하는 인물인 것과 달리 앤디의 직업은 법조인이다. 앞으로 벌어질 일에 대해 알고 있다는 의미이다.

     

물론 안다고 달라지는 건 없다. 제이컵의 혐의를 벗기려면 진범이 나타나야만 한다. 앤디의 간절함이 통한 걸까. 정말로 진범이 등장하고 만다. 앤디가 의심하던 인물이 자백 유서를 남겨두고 세상을 떠난 것이다. 결국 제이컵은 혐의를 벗는다. 그러나 그들이 되찾은 일상을 그리 오래가지 못한다. 앤디에게 당도한 하나의 진실로 인해서다. 앤디의 아버지 ‘빌리’(J. K. 시몬스)가 사람을 시켜 (가짜) 범인에게 자백 유서를 쓰게 하고 그를 살해했다는 진실. 그것을 알게 된 앤디는 의심의 심연 속에 빠진다. 아마도 이런 의심이리라. ‘아들이 범인이 아니라는 나의 확신은 진실이 아닐지도 모른다.’

     

분노하는 앤디에게 빌리는 선택을 요구한다. 좋은 사람이 될 것인지 아니면 좋은 아버지가 될 것인지. 앤디가 이 사실을 세상에 알리면 자신은 윤리적(혹은 사회적)으로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지만, 제이컵은 다시 고통받게 될 것이다. 결국 앤디는 침묵을, 그러니까 고통을 감당하는 선택을 하고 만다. 반면 로리는 충동적인 파멸을 선택한다. 제이컵을 차에 태운 채 질주한다. 속도가 너무 빠르다는 아들의 만류에도 그는 속력을 늦추지 않는다. 그러다 사고가 난다. 제이컵은 깨어나지 못하고 로리도 크게 다친다. 숨을 거둔 이는 없지만, 그들은 더 이상 과거로 돌아갈 수 없게 된 것이다.

     

로리는 왜 그런 선택을 한 것일까. 부모라면 자식의 허물조차 가리려 하지 않던가. 극단적인 예이기는 하나 영화 《공공의 적》(2003)에서 살인자의 어머니는 자신을 죽인 아들의 손톱을 삼킨다. 현장에서 증거가 나올 것을 염려한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범행의 증거가 되어버린 점이 애처롭다) 반면 로리는 아들과 자신을 심판한다. 살인자일지도 모르는 아들을 자신의 과오이자 사회의 위협이라고 여긴 걸까. 그 선택에 조짐이 없던 건 아니다. 다시 이야기의 시작으로 가보자. 아들이 살인 용의자가 되었다. 법정 공방이 익숙한 남편과 달리, 모든 게 처음이던 로리는 커다란 혼란에 빠진다.

      

재판과정에서도 언론과 사람들로 인해 고통받는다. 존재조차 모르던 남편의 아버지가 살인자이며 복역 중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후부터는 누구도 믿지 못하게 된다. 그때부터 제이컵이 어린 시절 보여준 행동 하나가 자꾸 떠오른다. 지극히 폭력적인 장면. 어쩌면 내 아이는 타고난 살인자인가. 의심이 든다. 그런데 확인조차 할 수 없다. 방법도 어렵지만 진실을 마주하는 게 더 두렵다. 그리하여 로리는 믿음이 무너진 세계에 갇힌다. 진범의 등장으로 잠시 해방되나 사실이 아님을 알게 된다. 그렇다면 진범은 누구인가. 정말 내 아들인가. 로리는 의심의 심연에 빠진다. 이것이 사고의 원인이리라.

     

작품은 끝내 범인을 알려주지 않는다. 진실이 아니라 의심을 다룬 작품이기 때문일 테다. 범인은 알 길이 없으나 그들이 고통에서 해방될 수 없음은 알겠다. 평생 의심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면 사는 게 사는 게 아닐지도 모른다.

     

(2023. 04. 05.)

(@dltoqur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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