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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학민 Feb 23. 2023

보이지 않을 거라는 착각

영화 《올빼미》

 안태진 감독의 영화 《올빼미》(2022)를 보았다. 가장 눈길을 끈 것은 과거의 재현보다는 상상의 틈입이었다. 소현세자의 죽음을 병환(학질)이 아닌 암살로 그린 설정이 새롭지는 않더라도 그것을 담아낸 전개는 참신하게 다가왔다. 조명의 밝기 변화, 화면 전환, 배경 음악, 배우들의 연기도 인상적이었다. 여기까지가 감상 후기라면 다음은 영화에서 발견한 질문이다. 과거의 사건에 상상을 덧댄 이 가상의 역사극은 미래의 우리에게 어떤 말을 건네고 있는가. 해석은 제각각일 수밖에 없는데, 나는 이 영화가 불안과 선택에 관해 말했다고 생각한다. 정확히는 권력 앞에서 불안을 겪은 두 인물의 선택.    

 

 여기서 두 인물은 ‘인조’(유해진)와 ‘천경수’(류준열)을 뜻하며 나는 이들을 각각 권력자와 시민의 은유로 보았다. 왕과 침술사라는 신분 차이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이 느낀 불안의 본질은 다르지 않은 듯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느껴봤을 불안. ‘내가 가진 것을 잃을지도 모른다.’ 인조의 불안은 권력을 잃는 것. 왕의 자리를 보존하길 원했다. 천경수의 불안은 자신의 부재(不在)였다. 자신이 죽으면 아픈 동생을 돌볼 사람이 없으므로. 저마다 소중한 것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휩싸인 두 인물은, 그러나 다른 선택을 한다. 그것은 하나의 사건으로부터 비롯된다. 바로 ‘소현세자’(김성철)의 죽음.     


 인조는 오랜 볼모 생활을 끝내고 고국으로 돌아온 아들 소현세자와 대립한다. 삼전도에서의 굴욕과 자신이 벌인 반정을 기억하는 그는 명분에 집착하고 있었다. 나라가 아닌 자기 안위를 위해서였다. 소현세자의 신념은 달랐다. 나라를 위해 변화를 주장했다. 그러자 인조는 ‘이형익’(최무성)을 시켜 아들을 독살한다. 천경수가 그 장면을 목격한다. 힘없는 이들은 봐도 못 본 척해야 안전하다고 믿던 천경수는 당면한 위기 앞에서 진실을 발설한다. 탈출을 포기한 채 한 세계의 최대 권력자 앞에서 외친다. “제가 보았습니다.” 그러나 권력 없는 진실은 무력하다. 왕을 심판대에 새우지 못한다.     


 목숨을 부지한 천경수는 시간이 흐른 뒤 피폐해진 왕을 다시 만난다. 침을 놓는다. 이윽고 인조가 죽는다. 천경수는 왕의 사인이 학질이라고 말한다. 결말까지 거칠게 적어 놓은 이 글에는 한 가지 중대한 설명이 빠져 있다. 천경수가 주맹증 환자라는 사실. 이 사실 없이는 극화될 수 없었으리라. 그로 인해 천경수가 소현세자의 독살을 목격할 수 있었으므로. 그보다 의미심장한 점이 있다. 천경수가 진실을 밝히기 위해 자신의 비밀(어둠 속에서 앞이 보인다는 것)을 세상에 드러냈다는 점이다. 그것은 현실과 닮아 있었다. 일상을 지키려고 눈 감던 시민조차 권력의 횡포 앞에서는 ‘보았다’ 말하기 때문이다.     


 이는 인류의 역사가 증명한다. 시민이 항상 무력한 존재일 리 없고, 왕이 영원히 왕일 수 없다는 건 진실이다. 과거만의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왕이 사라진 시대에도 사회 곳곳에 왕처럼 군림하는 권력자가 없다고는 누구도 말하지 못할 테니까. 자신을 왕으로 착각하는 이들에게는 믿음이 있다.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스스로 행하는 폭력이 보이지 않을 거라는 믿음. 힘없는 시민은 볼 수 없거나 보아도 어쩌지 못할 거라는 확신. 전부 착각에 불과하다. 권력에 눈이 먼 그들만 모른다. 대다수 평범하고 선량한 시민은 보았고, 보고 있으며, 볼 것이다. 일상과 가족을 지키는 일에 매진하느라 모른 척하고 있을 뿐.     


 국가의 권력이란 시민이라는 공동체가 만든 것이다. 대표자에게 잠시 맡겨두었을 뿐 권력의 주인 역시 시민이다. 누구도 시민 위에 군림할 수 없으며 방자한 권력 놀음이 지속되면 시민은 보고만 있지 않으리라. 그것 역시 역사가 증명한다. 권력을 결국 주인에게 돌아오기 마련이다. 더디고 어렵더라도. 반드시. 너무 낙관적인가. 그러면 희망이라고 불러도 되겠다. 이쯤에서 돌아보자. 우리가 맡겨둔 권력은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가. 그렇지 않으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예상에는 상상의 틈입이 필요하다. 그러나 어둠 속에서도, 밝은 빛 아래서도 누군가는 진실을 본다. 이것만큼은 상상이 필요 없는 불변의 진리이리라.


(2023. 02. 23.)

(@dltoqur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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