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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학민 May 24. 2023

로켓은 너구리가 아니다

영화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Volume 3》 (2/2)

*이 글에는 작품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어떤 슬픔은 감히 아름답다. 아름다워서 더 슬프다. ‘라일라’(린다 카델리니), ‘티프스’(아심 차우다리), ‘플로어’(미카엘라 후버) 그리고 ‘로켓’(브래들리 쿠퍼)의 우정이 그렇다. 철창 안에 갇혀 이유도 모른 채 실험당하던 그들은 고통의 공동체로서 연대한다. 각자 이름을 짓고, 서로를 부르며, 함께할 미래를 약속한다. 슬프고 아름다운 이 우화는 그들을 가두고 개조한 ‘하이 에볼루셔너리’(추쿠디 이우지)에 의해 산산이 조각난다. 셋은 그곳을 떠나지 못한 채 숨을 거두고, 홀로 탈출한 로켓은 친구들과 함께 보려던 영원하고 아름다운 하늘을 혼자 바라보며 눈물 흘린다.

     

세월이 흐르고. 여하한 이유로 로켓은 죽음의 문턱에 다다른다. 그 순간 그는 환영에 빠지고, 그곳에서 친구들과 재회한다. 함께 하늘도 보며 잘 지내고 있다는 라일라에게 로켓은 묻는다. “나도 가도 될까?” 라일라는 당연히 된다면서도 지금은 아니라고, 아직 너에게는 할 일이 있다고 대답한다. 그러자 로켓이 호소한다. 자신은 쓸모없는 실험체일 뿐이라고. 이에 라일라는 로켓을 달래며 그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일깨워 준다. 그 과정에서 ‘My beloved raccoon’이라는 표현을 쓰자, 로켓은 평소처럼 자신은 라쿤이 아니라고 부정한다. 일순간 환영이 사라지고 정신이 든다. 다시, 살아난 것이다.


     

다시는 물러서지 않기로 다짐한 로켓은 과거 자신이 갇혀 있던 장소로 간다. 그곳에서 본인과 똑 닮은 새끼 라쿤들을 만난다. 그들을 보며 비로소 자신의 본질을 깨닫는다. 그때 하이 에볼루셔너리가 등장해 외친다. “89P13!” 또다시 실험체로 불린 로켓은 말한다. “The name is Rocket. Rocket, Raccoon.” 스스로 쓸모없고 불완전하다고 여기던 자신을 인정하고, 과거의 어둠을 극복하는 대사이다. 이 특별한 대사의 자막을 보니 이번에도 ‘라쿤(Raccoon)’은 ‘너구리’로 번역돼 있었다. 오역임을 모르는 분은 없겠지만, 새삼 어색한 기분이 들었다. 영화의 메시지 탓이리라.

      

이 영화는, 아니 어쩌면 이 시리즈는 우리에게 시종일관 하나의 목소리를 들려주었는지도 모른다. 있는 그대로 사랑하자고. 그러니까 스스로든 타인이든 억지로 바꾸려 하지 말고, 미워하지도 말고, 부족하고 이상해도 있는 그대로 사랑하자고. 시리즈 결말에 이르러 로켓도 이를 실행한다. 자신이 누구인지, 어디에서 왔는지, 얼마나 가치 있는 존재인지 확인한 순간, ‘완벽한 몸’에 관한 욕망과 그렇지 못한 자기에 대한 혐오를 버리고 스스로 사랑하게 되었다. 그런데 정작 우리는 아직도 로켓을 (그것도 공식적으로) 라쿤과 전혀 다른 종인 너구리라고 부르고 있다. 아직도 그가 누구인지 모르는 듯이.

     

라쿤은 ‘미국너구리’이다. 그러니 ‘미국’ 정도는 생략해도 되지 않을까, 생각한 적이 있다. 그건 ‘너구리’와 ‘라쿤’이 같은 종인 줄 알고 있을 때나 하던 착각이다. 제작진이 이를 모를 리 없으므로 로켓을 너구리로 번역한 것이 단순히 오류는 아닐 것이다. 차라리 라쿤과 너구리는 비슷하게 생겼고, 사람들에게 훨씬 익숙한 쪽은 너구리이니 그렇게 쓰기로 한 것처럼 보인다. 이유가 무엇이든 나는 앞으로도 로켓을 ‘로켓 라쿤’이라고 부를 것이다. 스스로 명명한 그대로 부르지 않을 이유가 없으므로. 현실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우리는 누구든 스스로 원하는 대로 불릴 자격이 있다.

     


자기 의지와 관계없이 인간의 말을 하게 된 로켓의 첫마디는 이렇다. “아파(Hurts).” 유독 마음 아픈 장면이 많은 로켓의 서사 중에서도 가장 보기 힘들던 그 장면 앞에서 이런 생각을 했다. 인간과 동물이 대화할 수 있다면 우리가 가장 자주 듣게 될 말도 이렇지 않을까. 인간이, 인간이 아닌 생명체에게 준 것은 거의 고통밖에 없으므로. 물론 나도 인간이며 가해의 일원이다. 그래서 생각해 보건대 우리는 진화해야 한다. 그러니까 자연과 환경과 동물과의 공존만이 우리의 유일한 목표이자 정답임을 인정해야 한다. 그것이 상식이 될 때 인류는 조금이나마 나아질 수 있다고 믿는다.     



(2023. 05. 24.)

(@dltoqur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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