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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학민 Jun 03. 2023

만 개의 의미, 만개의 주황

오은 시집 《없음의 대명사》

온다 간다 말없이 와서

오도 가도 못하게 발목을 붙드는,

손을 뻗으니 온데간데없는


오은 〈그것〉(37쪽) 전문.

     

‘그것’이란 무엇인가. 잡을 수 없는 슬픔의 기억인가. 계절 혹은 시간인가. 아니, 종잡을 수 없는 날씨일 수도 있겠다. 비라고 생각해 보자. 예고 없이 많은 비가 내릴 때 우리는 어딘 가에 갇힐 수도 있다. 섬이든 건물이든, 그곳에 발목이 붙들리는 것이다. 다만 야수처럼 쏟아지던 비라도 그친 뒤 손을 뻗으면 아무것도 잡히지 않는다. 그것은 눈도 마찬가지이다. 말없이 와서 우리를 멈추게 하며, 차마 만질 수 없는 의미의 낱말이라면 무엇이든. 무엇이든 ‘그것’이 될 수 있다.

     

시를 읽고 의미를 파악할 때 흔히 하는 말. “정답은 없다.” 다만 이 시 앞에서는 이렇게 말해야 할 것 같다. “사람마다, 또 그 사람의 순간마다 ‘그것’의 의미는 달라질 수 있다.” 만 명이 읽으면 만 개의 의미로 해석되는 이 시는 오은 시인이 썼으며, 시가 담긴 집은 《없음의 대명사》(문학과지성사, 2023)이다. 이십 년 넘게 절륜한 ‘말놀이’를 이어온 시인은, 5년 만에 펴낸 새 시집에서도 유감없이 그것을 선보인다. 눈길이 가는 것은 시의 제목이다. 앞서 소개한 시는 시집 속 열여섯 개의 ‘그것’ 중 다섯 번째 ‘그것’이다. 그것뿐만 아니라 모든 시가 다른 제목 없이 대명사로 쓰여 있다.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시집의 1부 ‘범람하는 명랑’은 지시대명사, 2부 ‘무표정도 표정’은 인칭대명사로 구성돼 있다. 시인은 왜 시에 고유한 이름을 주지 않았을까. 읽어 보니 알겠다. 대상을 구체적으로 명시하지 않을 때. 우리는 그 시가 불러온 대상을 편견 없이 바라보게 된다. 수수께끼처럼 정답을 맞혀 보고, 스스로 명사를 넣어 온전히 자신만의 시로 읽을 수도 있다. 의미가 꽃이고 읽는 이가 만 명이라면 이 시집은 만 개의 꽃송이이며, 꽃송이가 주황색이라면 이것은 만개(滿開)의 주황인 셈이다. 덕분에 새로운 시 읽기를 체험한 나는 자유를 느꼈고 시인의 의도를 조금은 알 수 있었다.

     

다만 해소되지 않는 의문 한 가지. 왜 시집 제목이 많은 대명사 가운데 하필 “‘없음’의 대명사”인가. 없음. 즉, ‘있었다’를 의미하는 시의 모음이라는 의미일까. 과거에는 있었고, 지금은 없는 것에 대하여 말한다는 뜻인가. 이러한 추측만으로는 부족하리라. 아무래도 시 한 편을 더 읽어봐야겠다. 수록된 시 한 편으로 시집 전체를 파악할 수는 없겠지만. 또 아래의 시가 시집의 대표성을 가진 것은 아닐 테지만, 대명사로 쓰인 시를 함께 읽으며 자신만의 ‘없음의 명사’를 찾아보자.


          

난 날은 같은데 간 날은 다른

사람 둘

     

남은 자는 먼저 간 자를 생각한다

왜 이렇게 빨리 떠났느냐고

저세상을 향해 울부짖는다

     

난 날은 다른데 간 날은 같은

사람 둘 

    

먼저 난 자는

한창때인데 왜 따라왔느냐고

나중에 난 자에게 역정을 낸다   

  

오은 〈그들〉(72~73쪽) 부분(1~4연).    

 

1연과 2연에서 말한 둘은 누구일까. 난 날이 같다고 했으니 친구 또는 쌍둥이일까. 의미를 더 확장해 보면 부모(중 하나)와 자식인지도 모른다. 인간은 세상에 태어나며 생을 얻지만, 부모는 아이가 태어나면서 부모가 된다. 따라서 부모로서 ‘난 날’은 아이가 태어난 날과 같다. 그런데 그중 하나가 먼저 떠나고, 한 사람만 남았다. 누가 떠나고 누가 남았는지는 알 수 없으리라. 누구라도 떠난 이 앞에서 하는 말은 다르지 않을 테니까. 왜 이렇게 빨리 떠났어.


이어진 3연과 4연에서는 무대가 바뀌었다. 현실이 아니라 사후 세계인 듯하다. "왜 따라왔느냐"라는 표현으로 보건대, 먼저 난 자가 조금이나마 세상을 먼저 떠난 듯하다. 그러므로 나중에 온 자는 먼저 간 자보다 나중에 난 자인데, 그 아직 ‘한창때’이다. 그가 한창때에 숨을 거두자 먼저 간 자가 나중에 온 자를 나무라며 시는 계속된다.


난 날과 간 날이 같은

사람 하나

     

남은 자는

박수하다가 기도하다가

축하하다가 애도하다가

     

생일이 기일일 때

나고 간 것은 다름 아닌 너인데

눈물 나고 맛 간 것은 왜 나인지

도무지 모르겠다며

     

남은 자의 몸은

이기기를 포기한다 

    

주저 없이 주저앉는다

 

오은 〈그들〉(72~73쪽) 부분(5~9연).

     

5연부터 끝까지 하나의 사연이 이어진다. 생일과 기일이 같은 사람이 있고, 남은 사람이 있다. 오늘은 떠난 이의 생일이자 기일이다. 남은 사람은 할 일을 한다. 떠난 일을 복잡하게 견디는 일. 박수와 기도와 축하와 애도라는, 온도가 다른 명사들을 온몸으로 견디던 남은 자는 그러나 “이기기를 포기”하고 “주저 없이 주저앉는다”. 왜 그런가. 한 인간이 한 인간을 잃었다. 과거의 일이다. 그런데 그것을 다시 떠올릴 때 ‘있었다’라는 기억이 돌아오는데, 그때마다 함께 오는 것이 있다. 중력이다. 인간을 무릎 굽히는 슬픔과 상실이라는 이름의 중력. 아마도 그것을 이길 수 있는 인간은 없으리라.

     

돌이켜 보면 항상 그랬다. ‘잃었다’라는 사실보다 그것을 실감케 하는 ‘있었다’라는 상실이 더 아프게 다가왔다. 그리하여 나는 이 시를 읽고서 나에게 있어 ‘없음의 명사’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그것은 시 속의 ‘남은 자들’이 겪은 고통과 다르지 않은 의미의 명사이다. 시집을 가득 채우기도 한 그것은, “‘잃었다’의 자리에는 ‘있었다’가 있었다”라는 시인의 말속에도 자리한 듯하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은, 그러니까 그것에 대해 설명하자면 이렇다. “온다 간다 말없이 와서 / 오도 가도 못하게 발목을 붙드는, / 손을 뻗으니 온데간데없는” (〈그것〉(37쪽) 전문.)







(2023. 06. 02.)

(@dltoqur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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