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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학민 Jul 24. 2023

무의미한 죽음, 무의미한 고통

영화 《서부 전선 이상 없다》

이야기 매체에서 죽음은 흔한 소재이다. 흔한 것 앞에서 우리는 놀라지 않는다. 작품 속 등장인물의 죽음을 목격할 때를 떠올려 보자. 처음 겪을 때는 고통스럽지만 반복될수록 무감해진다. 점점 더 대수롭지 않게 느껴진다. 나 역시 그렇다. 이제는 작품 속 죽음을 봐도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 예외는 있다. 전쟁 영화 속 죽음을 보는 일. 그것은 여전히 예외 없이 고통스럽다. 왜 그런가. 첫째, 그 죽음이 현실처럼 보여서. 둘째, 그 죽음의 형태가 참혹해서. 셋째, 그들의 죽음이 거의 무의미해 보일 때가 많아서다.

     

《서부 전선 이상 없다》(Im Westen nichts Neues, 2022) 속 죽음도 그렇게 느껴졌다. 1차 대전을 배경으로 한 이 영화는 죽음의 장면으로 시작한다. 한 소년 병사가 죽는다. 이윽고 등장한 네 명의 십 대 소년은 자신들이 권력의 장기 말이 될 것을 모른 채 군에 자원한다. 새 군복을 지급할 여력조차 없던 독일군은 전사자의 옷을 세탁해 신병에게 주는데, 네 명의 소년은 천진한 얼굴로 재활용 군복을 받는다. 그중에는 영화 시작과 동시에 죽은 소년 병사의 군복을 받은 인물도 있다. 주인공 ‘파울’(펠릭스 카머러)이다.

     

권력자들의 허황한 선동에 휩쓸린 파울은 아직 죽음을 모른다. 부모가 입대를 허락하지 않자 서명을 위조해 참전할 만큼 무구하다. 그러나 죽음을 알기까지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는 곧 전장에서 친구를 잃는다. 길지 않은 세월 동안 전부 잃는다. 처음 친구를 잃고 오열하던 파울은 눈앞의 죽음이 반복되자 점점 무표정하게 변해간다. 슬픔의 표출은 슬픔을 느끼게 하는 사건(혹은 대상)과 ‘나’ 사이에 거리가 있을 때만 가능한 일일 것이다. 슬픔과 ‘나’ 사이의 간격이 더는 남아 있지 않을 때 ‘나’는 슬픔 그 자체가 되어버린다.

     

슬픔은 표정을 짓지 않는다. 슬퍼하는 것, 그것을 표현하는 것. 그조차 허망해진 탓이리라. 파울의 죽음 역시 ‘어이없고 허무’(허망)하긴 마찬가지였다. 휴전이 못마땅한 프리드리히 장군은 휴전 20분을 남겨두고 공습 명령을 내린다. 세상에서 가장 의미 없고 허무하며 잔혹한 20분이 지나간다. 그러는 동안 참호 안에서 파울이 죽는다. 아니 파울도 죽는다. 한 권력자의 명예와 자존심 때문에 피아와 관계없이 수많은 병사가 목숨을 잃는다. 그들을 죽인 것은 프리드리히의 덧없는 욕망이었다. 그러므로 나는 그들의 사인을 권력사(權力死)라고 주장한다.

     

근거는 영화의 대사에도 있다. “개에게 뼈다귀를 던져주면 뼈다귀를 물어뜯지. 인간에게 권력을 주면 그 인간은 짐승이 돼.” 그러니까 범인은 권력의 짐승이 된 인간이다. 어처구니없는 일이지만 유일한 일은 아니다. 우리의 역사를 돌아봐도 그렇다. 혹 권력이란 그 자체가 유해한 것인가. 그게 사실이라면 권력을 가진 인간이 짐승이 되지 않을 방법은 없는가. 해결책은 모르나 한 가지는 확신할 수 있으리라. 최소한, 권력이 범하는 유해를 최소화하는 것. 그것을 최우선 순위에 두는 것. 그게 권력자가 할 일이라는 사실. 이것은 권력자의 자격이기도 하다.

     

1929년에 발표된 동명의 원작 소설*은 나치 집권 후 분서(焚書)되었음에도 오늘날까지 살아남았는데, 서문에 이렇게 적혀 있다. “이 책은 고발도 고백도 아니다. 비록 포탄은 피했다 하더라도 전쟁으로 파멸한 세대에 대해 보고하는 것일 뿐이다.” 그러나 세대가 파멸하는 이유가 전쟁에만 있다면 이 소설이 세 번이나 영화로 만들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전쟁 밖에서도 인간은 쉽게 권력의 짐승이 된다. 그리고 권력의 짐승이 함부로 힘을 휘두를 때마다 무의미한 죽음이 발생한다. 그러한 죽음을 막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짐승을, 내몰면 될까. 

    

글쎄. 짐승을 내몰면 또 다른 짐승이 그 자리를 차지하지 않을까. 이러한 비관의 뒤편에는 내가 권력자가 아니라는 안도가 숨어 있는 듯하다. 나와 관계없는 일로 여기고 무관심해지는 것이다. 무관심은 자유를 주는 일과 다르지 않다. 달리 말하면 허락이다. 그러므로 권력의 짐승에 의해 무의미한 죽음이 발생할 때마다 ‘나’ 역시 책임을 피할 수 없으리라. 한 가지 더. 질문을 바꿔보자. 나는 모두에게 무해한가. 그렇다고 대답할 자신은 없다. 권력은 힘이며 힘은 상대적인 것. 나 또한 나보다 힘없는 타인에게 함부로 권력을 휘두른 적 많았으리라.


내가 가진 한 줌의 힘을 함부로 휘두르지 않기 위해서, 또 권력의 위해를 잊지 않기 위해서 내가 선택한 방법은 전쟁 영화 속 죽음을 보는 것이다. 전쟁 영화만큼 권력의 위해를 정확히 재현한 장르는 드물며, 전쟁 영화 속 죽음을 바라보는 고통 안에서만 마음에 새길 수 있는 게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고통스러워도 보는 것이 아니고 고통을 겪기 위해서 화면 앞에 나를 앉힌다. 다만 시청을 반복하더라도 무감해지지 않으려고 애쓴다. 권력에 의한 무의미한 죽음을 보면서도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면 우리의 현실은 무의미한 고통이 되고 말 테니까.


(2023. 07. 24.)

(@dltoqur__)




*《서부 전선 이상 없다》(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 저, 홍성광 역, 열린책들,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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