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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학민 Jul 17. 2023

앙다문 입술로 지켜내는 것

클레어 키건 소설 《맡겨진 소녀》

소설 《맡겨진 소녀》(클레어 키건 저, 허진 역, 다산책방, 2023)는 평단의 호평을 받은 작품이다. 특히 ‘타임스’에서는 ‘21세기 출간된 최고의 소설 50권’ 중 하나로 선정했으며 저자 클레어 키건을 “한 세대에 한 명씩만 나오는 작가”라고까지 극찬했다. 작가나 작품에 엄청난 찬사가 쏟아질 때 호기심을 갖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의심부터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나는 후자일 때가 많다. 먼저 읽은 이들의 평가를 못 믿어서가 아니다. 오히려 좋은 작품이겠거니 짐작한다. 다만 그것이 내게도 필요한 작품인지는 알 수 없으므로 일단, 의심한다. 이번에도 그랬다. 그런 마음으로 책을 펼쳤다.

     

소설은 한 ‘소녀’가 먼 친척에게 맡겨지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아이가 많고 가난한 집에 살던 소녀가 위탁된 곳은 ‘킨셀라’와 ‘에드나’의 집. 그곳에서 소녀는 태어나 처음으로 진실한 보살핌을 경험한다. 한 번도 손잡아 준 적 없는 아빠와 매일 지쳐 있는 엄마는 희미해지고, 점점 더 새 부모에게 감화된다. 소녀의 감정 변화를 따라가다 보니 소설은 금세 끝나 있었다. 얇고 깊으며 아름다운 책을 덮으며 나는 이 작품을 향한 언론의 찬사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단어 하나조차 낭비 없이 쓰인 이 소설을 겪고서 마음에 남은 것이 여럿이다. 그중 자꾸만 곱씹게 되는 두 개의 단어에 관해 말해보려고 한다.

     

먼저, 필요. 킨셀라와 에드나에게도 아이가 있었다. 불의의 사고로 잃었다. 이미 사랑을 주는 법을 배웠는데. 그 힘으로 살아왔을 텐데. 소녀와의 관계에도 작별은 예정돼 있다. 소녀는 동생이 태어나면 집으로 돌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맡겨진 소녀를 성심껏 보살피고 사랑한다. 소녀와 함께 바닷가를 산책하던 킨셀라는 사구 위에서 먼바다의 불빛을 바라보며 말한다. “보렴, 저기 불빛이 두 개밖에 없었는데 이제 세 개가 됐구나.” 그러나 하나의 빛은 멀어질 것이다. 둘만 남게 될 킨셀라와 에드나는 소녀를 그리워하리라. 사랑의 대상이 떠나면 누구라도 그러하듯이. 둘에게는 소녀가 필요하다.

     

소녀라고 다를까. 동생이 태어났다는 소식을 들은 소녀는 슬픔을 느낀다. “그 자리에 선 채 불을 빤히 보면서 울지 않으려고 애쓴다. 울지 않으려고 애쓰는 건 정말 오랜만이고, 그래서 울음을 참는 게 세상에서 제일 힘든 일이라는 사실이 이제야 떠오른다.” 언니들과 동생들처럼 보살핌과 사랑을 겪지 못했다면 소녀도 몰랐을 것이다. 킨셀라와 에드나의 집을 떠나면 무엇을 잃게 될지. 그것이 자신에게 얼마나 필요한 것인지. 다만 소녀의 의지만으로는 그곳에 머물 수 없다. 엄연히 친부모가 있고, 친부모는 어떤 이유에서건 소녀를 곁에 둘 것이다. 킨셀라와 에드나와 소녀. 그들이 아무리 필요를 말한들.

     

그래서 두 번째 단어는 ‘침묵’이다. 소설 원제는 ‘foster’. 위탁과 양육을 뜻한다. 소설을 바탕으로 만든 영화의 제목은 ‘An Cailín Ciúin’(The Quiet Girl). 아일랜드어로나 영어로나 ‘말 없는 소녀’를 의미한다. 소설 제목이 소녀가 처한 사정을 말하고 있다면, 영화 제목은 소녀의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리라. 낯선 집에 맡겨진 소녀는, 말하지 않음으로써 말한다. 침묵의 의미는 서서히 변한다. 태어나고 자란 집에서는 기대할 수 없어서 말하지 않았다. 무기력한 침묵. 그것이 다정한 보살핌 없는 곳에서 체득한 생존법이었으리라. 위탁된 집에서는 다른 의미의 침묵을 배운다. 

    

“넌 아무 말도 할 필요가 없다 / (…) 입 다물기 딱 좋은 기회를 놓쳐서 많은 것을 잃는 사람이 너무 많아.” 집으로 돌아온 소녀는 배운 대로 침묵한다. 무슨 일 있었느냐는 엄마의 물음에 아무 일도 없다고 답한다. 설명하지 않는 침묵. 그것으로 소녀는 한여름 밤의 꿈 같던 시간을 지켜낸다. 기시감이 든다. “해야 하는 말은 하지만 그 이상은 안” 하는 사람. 그이가 앙다문 입술로 지켜내는 것. 눈으로 보이지 않으나 지켜냈으므로 남은 것. 남아서 결국 보이는 것. 언젠가 그것을 본 적 있기 때문이리라. 새삼스럽지만 우리에게는 때로 침묵이 필요하다. 아니, 적시에 필요한 침묵이 있다.


(2023. 07. 17.)

(@dltoqur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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