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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학민 Sep 09. 2023

저도 많이 보고 있어요

안미옥 시집 《저는 많이 보고 있어요》

시집 속 화자는 여럿일 수 있다. 여러 편의 목소리(이야기)를 모은 것이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소리이리라. 다만 한집에 사는 사람들이 대개 그렇듯, 한 권의 시집에 기거하는 화자들 사이에도 닮은 점은 있지 않을까. 안미옥 시인의 시집 《저는 많이 보고 있어요》(문학동네, 2023)을 읽고서 나는 시집 속 화자들의 공통점을 찾아보았다. 결과는 이러하다. 무언가를 세심히 보고, 시로 말한다는 것.

     

화자들은 ‘옛날 나무’(〈하우스〉)와 ‘비눗방울을 터트리려는 아이들’(〈선량〉)과 ‘가장 작은 자세로 엎드린 개’(〈조율〉)처럼 지금 여기 있는 존재들을 본다. 시선을 옮겨 “창틀엔 무수한 손 / 의자 모서리엔 많은 무릎이 겹쳐”(〈지정석〉) 있음도 발견한다. 나아가 “나무 탁자에 생긴 / 아주 작은 홈”(〈홈〉)과 ‘더러워진 벽지와 쌓여 있는 짐’(〈축―하우스2〉)처럼 축적된 세월까지, 본다.

     

시로 쓰인 섬세하고 차분한 목격담을 읽다가 새삼 궁금해졌다. 본 것을 타인에게 말하는(전하는) 건 인간의 본능인가. 참은 아닐지언정 거짓이라 말하기도 어려울 듯하다. 사람이 모이면 그 시기에 화제가 되는 작품이나 스포츠 경기에 관한 목격담이 들린다. 평소보다 큰 달(슈퍼문)만 봐도 가까운 이에게 연락하는 사람들이 많다. 우리가 나누는 대화의 주제는 대부분 목격담이라고 말해도 지나친 것은 아니리라.

     

재미있는 점은, 같은 것을 봐도 같은 말을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전하는 태도 역시 사람마다 다르다. 어떤 이는 정확한 사실을 옮기고 있다는 듯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하고, 어떤 이는 자신만의 견해임을 강조하며 신중하게 말한다. 개인의 성정이나 관계의 성격에 따라서 달라지기도 하는데, 어떤 태도가 더 옳은지 따질 수 없겠다. 다만 신뢰에 관해서라면 말해볼 수 있겠다. 나는 후자의 태도를 더 신뢰한다.

     

시집 속 화자들의 태도는 후자에 가깝다고 말해도 될 것 같다. 다음 시를 보자. “모두 말해야 정확하게 말한 것 같다 / 그러나 정확하지 않다 / 정확하지 않다고까지 말해야 더 정확한 것 같다”(〈선물〉). 이 문장과 짝지어 말해볼 구절도 있다. “개가 멍멍 짖는다고 말해줬는데 / 아기가 흉내내는 소리가 개의 목소리에 더 가까웠다 // 가까워진다는 것이 무엇인지 / 더 모르게 되었다”(〈선량〉).

     

두 편의 시를 읽다가 나는 확신의 부재를 ‘못’ 참는 이들을 떠올렸다. 세상엔 그런 사람들이 있다. “~한 것 같다”, “~인 듯하다” 말하면 자신감이 부족해 보인다고, 답답하다고, 책임을 회피하는 거라고 지적하는 사람들. 생명을 다루거나 공동체의 일을 대리하는 이들처럼 불명한 태도로 말해서는(일해서는) 안 되는 예도 있으므로 그들의 의견이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리라. 그러나 진리도 아닐 것이다.

     

세상엔 단언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일테면 사랑, 인생, 마음, 문학 같은 것들. 정답 없고 복잡한 주제들. 그런 것들을 말할 때 자신이 본 것(겪은 것)만이 유일한 사실인 양 말하는 목소리보다 “정확하지 않다고까지 말해야” 한다는 쪽이 내게는 더 미덥게 들린다. 물론 정확하지 않음을 인정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될 것이다. 거기서 멈춘다는 것은, 정확하기를 포기하는 것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지막 시가 내게는 더없이 특별하게 느껴졌다. “다음 페이지를 열고 / 버튼을 누르면 노래가 나와요 // 사랑 노래입니다 // 그냥 배울 수는 없고요 / 보고 배워야 가능합니다 // 저는 많이 보고 있어요”(〈사운드북〉). ‘돌봄’이란 ‘함께 봄’ 또는 ‘함께 배움’이라고 생각하게 된 구절인데, 이렇게도 들렸다. ‘정확히 알지 못하지만, 사랑을 배우려고, 배워서 하려고, 많이 보고 있어요.’

     

얼마 전 나는 어딘가에 이런 문장을 썼다. ‘문학을 읽을수록 결론이 멀어졌다. 무언가 알았다는 인식보다 점점 더 모르겠다는 감각이 선명해졌다. 타인을, 타인의 방식을 함부로 판단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이것은 내가 믿는 문학의 결론이기도 하다.’ 안미옥 시인의 시를 읽은 지금, 내가 믿는 문학의 결론에 이 문장을 더하고 싶다. ‘저도 많이 보고 있어요. 정확히 모르더라도, 다만 사랑하기 위해서.’


(2023. 09. 08.)

(@dltoqur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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