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거서 크리스티 소설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재미에 무게를 둔 소설의 효용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그 이유를 사유의 부재로 꼽는다. 인간에게 유용한 질문을 건네지 못한다는 주장이다. 과연 그런가. 읽는 사람을 생각해 보자. 뛰어난 독자는 어떤 소설을 읽든 간에 상상의 나래를 펼치거나 평소 깊이 생각하지 않던 주제에 관해 고민하며 이야기 밖의 이야기를 발견해 낸다. 반대로 생각할 거리를 가득 담은 소설을 읽고 아무것도 사유하지 못하는 독자도 있다. 즉, 소설의 효용은 장르가 아니라 독자의 능력에 의해 정해지는 것이리라. 내가 봐온 나는 미진한 독자이다. 재미있는 소설을 읽을 때 다른 것들은 떠올리지 못한다. 그럴 여력이 없다.
어떤 소설이 특별한 재미를 준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하다고 믿는 나 역시 소설을 통해 재미 이상의 무언가를 경험하려는 욕망은 있다. 그 욕망을 실현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부족한 실력을 의지로 극복할 수 없는가. 알지 못하므로 시간 들여 여러 번 읽는 수밖에. 오늘 말해 볼 소설 앞에서도 그랬다. 추리 소설의 거장 애거서 크리스티의 고전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1939)를 처음 읽을 때 나는 눈과 손만 바빴다. 구성의 탁월함에 놀라고, 긴박한 서사를 좇느라 허겁지겁 책장만 넘겼다. 사고가 틀 안에 갇힌 것처럼 이야기 속 이야기에만 집중했다. 상상의 틈입이 가능해진 건 최근의 일이다.
결말을 알고 있기 때문인지, 읽고 쓰는 일을 하고 있어서인지 원인은 모르나 기년 만에 이야기 밖의 이야기를 상상할 수 있었다. 특별한 것 없는 내 상상은 이렇다. 소설 내용대로 ‘법으로 심판할 수 없는 인물들을 섬에 가둬두고 단죄하는 일’이 현실에서 일어난다면? 엄청난 관심을 받을 이 ‘사건’에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복수극이나 대리 심판을 주제로 한 작품들이 큰 주목을 받는 사례들을 떠올려 보면 적어도 처음에는 ‘워그레이브’의 행동을 인정하는 목소리가 들려올 것 같다. 그러나 분분한 과정을 거친 뒤에는 이렇게 결론 나지 않을까. ‘법을 지키지 않는 단죄는 또 하나의 범죄일 뿐이다.’
근거를 말하는 대신에 조금 더 위험한 상상을 해 보자. 단죄할 열 명의 죄인을 우리 각자가 선택한다면? 내 선택은 이러하다. 우리의 환경을 오염시키는 데 주저하지 않는 자, 사회 안전망을 최소화하거나 그것으로 부당한 이득을 취하는 자, 역사를 왜곡하고 진실을 은폐하는 자, 자신들의 권력을 지키려고 평범한 이들을 서로 다투게 하는 자…… 열 명을 채우기도 전에 숨에 찬다. 이런 식이라면 스무 명도 금세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인권을 운운하는 글을 쓰고, 피곤하다는 이유로 원망조차 꺼리는 내가 ‘죄인 찾기’에 주저 없는 까닭은 무엇인가. 아마도 스스로 정의를 알고 있다는 착각 때문인 듯하다.
새삼스러운 말이지만, 나는 정의를 모른다. 적어도 ‘우리’의 정의는. 안다고 믿는다면, 자기만의 기준으로 살의를 해소하려는 워그레이브와 바 없으리라. 이쯤에서 앞서 한 질문을 다시 살펴보자. 단죄할 열 명의 죄인을 우리 각자가 선택한다면? 방점은 ‘우리’ 그리고 ‘각자’에 찍어야 하겠다. 단죄할 인물을 각자 정해보자는 것은 개인이 생각하는 죄인의 기준을 묻는 것과 같다. 사람의 생각은 제각각 다르니 잘못의 판단도, 처벌 수위도, 그것을 추동하는 경험과 논리도 저마다 다를 것이다. 그러므로 각자의 기준에 따라 단죄를 실행한다면 우리 사는 이곳의 결말 역시 이렇게 되리라.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죄를 판단하고 처벌하기 위해서는 공동체 구성원 모두가 믿고 따를 기준이 필요하다. 우리는 그것을 법이라고 부른다. 아시다시피 법은 완벽하지 않다. 그나마 희망이 있다면 고정돼 있지 않다는 것. 법은 정하고, 수정하고, 발전시킬 수 있다. 그러므로 법의 가치는 법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이행하는 인간의 의지로 정해지는 것이리라. 그 의지는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 정의를 실현하고 약자를 보호하는 것. 그것으로 공동체를 유지하려는 의지. 즉, 우리의 법으로 우리를 지키려는 의지여야 할 것이다. 그 이상은 바라기 어렵다. 우리의 법이 다름 아닌 우리를 지켜주는 일조차 현실보다는 이상에 가깝기 때문이리라.
(2023. 09. 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