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해나 소설 《두고 온 여름》
드라마 《나의 아저씨》(tvN, 2018)의 한 장면. ‘동훈’(이선균)이 말한다. “(••••••) 인생도 어떻게 보면 내력과 외력의 싸움이고. 무슨 일이 있어도 내력이 세면 버티는 거야.” 그러자 ‘지안’(아이유)이 묻는다. “인생의 내력이 뭔데요?” 만약 이 질문을 내게 한다면 매번 다른 대답을 할 것 같다. 오늘은 이렇게 말해본다. 매일 흔들리는 나를 버티게 해주는, 내 뒤편에 놓아둔 기억. 성해나 작가의 첫 장편 《두고 온 여름》(창비, 2023)을 읽고서 든 생각이다. 내가 보기에 이 소설가는 내력이 강한 사람 같다. 시절을 세심히 되짚어 본다는 점에서. 그것을 그대로 두는 용기를 보여주었다는 점에서도.
내친김에 소설가의 첫인상을 더 말해보겠다. 맞춤한 곳마다 놓인 예스럽고 밀도 높은 한자어로 보나, 차분하고 진중한 문장으로 보나, 시간의 분절을 다룬 서사로 보나 경험 많은 소설가로 보인다. 더구나 책에 수록된 김유나 소설가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건강한 삶은, 누군가를 온전히 사랑할 수 있는 삶이 아닐까요.” 그러므로 그가 1990년대 중반에 태어나 2019년에 등단한 젊은 소설가라는 사실은 제법 이채롭게 느껴진다. 개인으로서 한 사람을 판단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러려고 작품에 관한 이야기를 미뤄둔 것도 아니다. 독자로서 이 소설가를 믿어도 될 것 같다. 그 근거를 말하려고 이렇게 적었다.
이제 소설을 이야기해 보자. 《두고 온 여름》은 한때 형제로 살았던 두 인물에게 흐른 시간에 관한 마음의 기록이다. 오십 년 넘은 적산가옥을 개축해 만든 사진관 겸 집이 있다. 그곳에는 기하와 기하 아버지가 산다. 어느 날 재하와 재하 어머니가 그 집에 들어온다. 넷은 가족이 되지만 그 집에 오래 머물지는 않는다. 대학 입학 후 기숙사에 들어간 기하가 먼저 (사실상) 집을 떠난다. 몇 년 후 재하와 재하 어머니가 떠난다. 혼자 남은 기하 아버지는 사진관을 운영하며 몇 해 더 머물다가 떠난다. 비로소 마지막. 시간에 밀려 집이 사라진다. 건물이 사라진 자리에 마라탕 전문점이 들어선다. 그렇게 한 시절이 저문다.
사진관에 딸린 집이 네 사람이 보낸 시절을 담은 곳이라면, 중식당은 기하와 재하가 서로를 바라보던 기억이 머문 장소이다. 어린 재하는 매주 수요일마다 대학병원의 아토피 클리닉에 다녔다. 보호자는 기하였고, 둘은 치료가 끝날 때마다 중식당에서 저녁을 먹었다. 그곳에서 비슷한 생각을 했다. 기하는 “저 애가 내 친동생이라면 어땠을까”(26쪽) 가정했고, 재하는 “우리가 친형제였다면 어땠을까”(61쪽) 상상했다. 어쩌면 둘은 가정과 상상이 필요가 없는 현실을 바랐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가정도, 상상도, 바람도 말로 하지 않았다. 동생에게 자기 몫의 땅콩 소스를 덜어주고, 형을 위해 입에 맞지 않는 음식을 먹을 뿐.
어른이 된 두 사람이 재회한 곳도 중식당이었다. 재하는 자신의 가게에 찾아온 기하에게 중국 냉면을 내주었다. 과거와 같은 메뉴였지만 둘은 예전 같지 않았다. 재하가 기억하는 기하는 “말보다는 표정이나 분위기, 실루엣이 더 오래 기억에 남는 사람”(53쪽)이었다. 말수 적고 표정이 어둡던 사람으로 기억하고 있었는데, 세월이 흐른 지금은 먼저 찾아와 안부를 물을 만큼 달라져 있었다. 천진하던 재하는 더 많이 변해 있었다. 기하는 “홍반이 사라진 것을 빼면 얼굴은 어릴 때와 비슷했지만, 하는 말이나 행동은 영 다른 사람 같았다”(102쪽)면서 “왕래하지도, 안부를 묻지도 못한 지난 시간들”(같은 쪽)을 절감했다.
달라진 두 사람은 인릉에 간다. 함께 걷는다. 나란한 인릉 산책이 처음은 아니었다. 넷이 같이 살던 시절에도 간 적 있는데, 그때 기하는 인릉을 나오며 생각했다. “아무것도 두고 온 게 없는데 무언가 두고 온 것만 같았다.”(38쪽) 다시 만난 오늘. 재하와 헤어지고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도 비슷한 기분을 느낀다. “아무것도 두고 온 게 없는데 무언가 잃어버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132쪽) 나는 반복되는 이 대목으로부터 소설의 태도를 읽었다. 소설은 기하와 재하를 통해 두고 온 시절을 돌아보지만, 가져오지는 않는다. 멀어짐을 헤아리고 지나온 시절 속의 어린 서로를 뒤늦게 이해하려 한 것이 전부였다.
이제 소설의 마지막 장면이다. 일본에 사는 재하는 하숙집 주인의 제의에 못 이겨 “겨우 한 문장” 남긴 편지를 쓴다. 받을 사람은 기하였으나 보낼 주소는 알지 못한다. 하릴없이 사진관에 딸린 옛집의 주소를 적으며 그는 이렇게 소망한다. “누구든 그곳에서는 더이상 슬프지 않기를 바라며 오오누키 씨에게 편지를 건넸습니다. 미처 못다 한 말이 봉해진 편지를요.”(143쪽) 이처럼 소설의 돌아봄에는 그리움이나 후회가 도드라지지 않는다. 잘 두고 가려는 마음이 더 선명하다. 그대로 두고 안녕을 바라는 것. 그렇게 나의 내력이 되게 하는 것. 흐르는 시간을 사는 인간에게는 어쩌면 이것이 최선의 매듭인지도 모르겠다.
(2023. 09.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