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달님 산문집 《우리는 조금씩 자란다》
독서의 이유를 묻는 사람들을 종종 만난다. 책은 지식 또는 인식의 창이니까, 맥락을 파악하는 훈련을 할 수 있으니까, 한 번뿐인 삶을 여러 번 살아보기 위해서 등 거창한 이유를 댄 적도 있지만, 주로 하는 대답은 이렇다. 좋아서, 읽는다. 더 솔직해지고 싶을 때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미세하게나마 더 나은 인간이 되고 싶어서 책을 읽는다. 반응은 두 부류로 나뉜다. 책을 안 읽는 사람들은 책의 비밀을 전해 들은 듯 눈을 반짝인다. 반면 책을 생활에 둔 사람들은 의심 어린 눈으로 반문한다. 책 읽는다고 더 나은 인간이 될 수 있던가요?
아는 만큼 보인다던데, 독서의 세계에서는 보는 만큼 모르게 되는 것이 정론인가. 하긴. 책을 읽고 더 나은 사람이 되겠다니. 내가 봐도 낭만적인 생각이기는 하다. 그래도 포기하고 싶지 않다. 독서만으로 달라지는 것은 없겠지만, 연습할 기회 정도는 얻는다고 믿는다. 길이 아니라 길 찾는 방식과 태도를 연습할 기회. 연습은 실전에서도 통했던가. 이 질문은 책을 읽고 더 나은 인간이 되었냐는 의미와 같은데, 그것을 스스로 대답하는 일만큼 겸연쩍은 일도 드물 것이다. 이 정도는 말해 볼 수 있겠다. 책이라도 읽어서 그나마 인간답게 산다.
읽지 않아도 괜찮은 사람이 많지만 나는 그렇지 않아서, 그럴 자신이 없어서 책을 읽는다. 다른 방법은 알지 못한다. 그래서 책을 아니, 책 읽는 순간의 나라도 믿어 본다. 이 믿음은 자주 흔들린다. 한때라도 굳건해지는 순간이 있다면 스승 같은 책을 만날 때이다. 어떤 책인가. 내가 더 나아질 수 있다는 믿음을 실어주는 책. 그런 책을 쓴 작가들을 나는 기꺼이 편애한다. 편애하는 이름 중에는 김달님 작가도 있다. 그의 신작 산문집 《우리는 조금씩 자란다》(미디어창비, 2023)가 출간되었다. 나에게 선물하는 기분으로 읽었다.
이번에도 좋았다. 아름답고 요긴해서 좋았다. 또 한 번 곁에 두고 싶을 만큼 좋았다. 좋았다는 표현을 세 번이나 반복했지만, 내가 느낀 좋음을 미덥게 느낀 분들은 없을 것이다. ‘좋다’는 말로는 ‘좋음’을 증명하지 못하므로. 다만 나는 이 아름답고 이로운 책이 가능한 많은 분에게 알려지길 바란다. 그래서 지금부터 이 책에 관해 말해 보려고 한다. 김달님의 책에 관해서라면 항상 할 말이 많아서 간명하게 말하는 법은 모르지만, 그래도 참고 몇 가지만 이야기해 보겠다. 이것은 믿음에 관한 글이기도 하다.
이 책은 단권으로도 탁월하지만, 시리즈 신작으로 읽어도 무방해 보인다. 특별한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한 작가가 쓴 에세이 안에는 연속성을 가진 이야기가 나오기 마련이니까. 특별한 게 있다면 그가 앤솔러지(《너와 나의 야자 시간》, 책폴, 2022)와 문학잡지(《언유주얼 vol.3》, 언유주얼, 2019)에 발표한 단편 에세이(공교롭게도 두 편 모두 연애 이야기가 담겨 있다)를 제외한, 세 권의 산문집에서 들려준 이야기가 본인의 성장 서사에 가깝다는 점이리라.
저자는 할머니 할아버지의 더없는 사랑을 통해 어른으로 자란다.(《나의 두 사람》, 어떤책, 2018) 그런데 두 사람이 아프다. 영원할 것 같던 돌봄의 관계가 뒤바뀐다.(《작별 인사는 아직이에요》, 어떤책, 2019)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두 사람에게 배운 것들이리라. 저자는 배운 대로 가까운 이들을 향해 정확한 사랑의 표현을 전한다.(《우리는 비슷한 얼굴을 하고서》, 수오서재, 2022) 그리고 네 번째 책 《우리는 조금씩 자란다》에서는 서문에서부터 변화를 알린다. “지난겨울엔 나를 키워준 두 사람이 차례로 세상을 떠났다.”(10쪽)
장례 절차가 끝난 뒤 저자는 ‘밀도 높은 슬픔’을 경험한다. 두 사람이 남긴 흔적 앞에서 눈물을 쏟는다. “어느 순간에는 눈물도 나지 않고 문이 닫힌 아주 고요한 방에 남겨진 듯했다.”(153쪽) 그 상실의 순간에 저자는 인생의 질문을 맞닥뜨린다. “이러한 상실을 계속 겪어야 하는 게 삶이라면, 산다는 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 어떻게 다시 삶을 믿고 살아갈 수 있을지.”(같은 쪽) 그런 저자 곁에는 사람들이 있었다. “먼 곳에 사는 이들은 전화로 평소보다 자주 안부를 물었고, 가까이 있는 이들은 편하게 울 수 있도록 조용히 옆에 있어 주었다.”(155쪽)
동료 작가 ‘수미 언니’는 저자를 집으로 초대해 밥을 지어주었다. 손에 꼽을 만큼 추운 어느 날 저자는 언니의 집에 간다. 밥을 먹는다. 운다. 웃는다. 언니의 제안에 요가를 한다. 마지막 동작을 위해 정자세로 눕는다. 햇살이 들어와 저자의 얼굴에 머문다. 그 온도가 어쩐지 익숙하다. “얼굴에 머무는 햇살이 잡아본 적 있는 누군가의 따뜻한 손바닥 같았다.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정오를 지난 햇볕처럼 이 슬픔도 조금씩 줄어들게 되리라는 걸. 그럼에도 아주 사라지지 않고 표정처럼 말투처럼 내 일부가 되리라는 것.”(159쪽)
이윽고 두 계절이 지나간다. 두 사람과 작별한 ‘그 밤’으로부터 떠나왔다고 자각할 즈음, 저자는 그 이유를 이렇게 짐작한다. “오직 나만이 알아볼 수 있을지라도 내 안에서 조금씩 자라난 마음 덕분이었다.”(12쪽) 어떤 마음인가. “슬픔이 긴 날들에도 다시 기쁠 수 있다고 믿는 마음. 지금 여기에서 더 나아질 수 있다고 조용히 희망하는 마음. 그러니 하루하루 다가오는 삶을 기꺼이 사랑해보자는 마음.”(같은 쪽) 이 ‘마음’은 ‘믿음’의 다른 말인 듯하다. 그가 다시, 삶을 믿기 시작한 것이리라.
새롭게 믿게 된 것도 있다. “무언가를 보면 할아버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138쪽) 바람이 불고, 보름달이 뜨고, 피아노 건반 덮개가 닫히는 순간과 다가오는 길고양이와 하늘로 날아오르는 새를 보면 “어김없이 눈물이 나는 한편 지금껏 경험한 적 없는 위로를 느끼기도 했다. 어떤 모습으로든 나를 보러 온 할아버지를 상상할 수 있었으므로.”(139쪽) 마침내 그는 다짐하듯 말한다. “지나간 시간을 돌이킬 수는 없어도 다가올 시간은 믿을 수 있다. 그렇게 우리는 어디서든 만날 수 있다. 함께 살아갈 수 있다.”(141쪽)
이 이야기를 상실을 겪은 한 사람이 주변 사람들의 곡진한 관심과 애정 덕분에 ‘괜찮아지는’ 내용으로 읽는다면 그 과정이 수월해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순간에 괜찮아지지는 않았으리라. 상실이란 영원한 공백이다. 그리하여 상실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극복이 아니라 적응에 불과한지도 모른다. 적응하기 위해선, 살아가기 위해선 믿어야 한다. 이따금 무너지더라도 믿어야만, 그래야만 ‘상실 이후에도 살아가야 할 나의 삶’이 계속된다는 것. 그것을 ‘믿기’ 위해 저자가 필사적으로 견뎌온 순간들은 아마도 다 쓰지 못했으리라.
‘쓰는 사람’인 저자는 ‘듣고 쓰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가 인터뷰어라는 사실은 거의 운명적으로 느껴진다. 가까운 사람의 말은 물론 라디오, 길거리, 카페 등 다양한 곳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어느 하나 흘려듣지 않는 귀와 어떤 것도 곡해하지 않는 손을 가졌다는 점에서. 그런 점에서 나는 저자를 존경하는데, 그도 자신의 일을 사랑하는 듯하다. “나는 그런 게 좋았다.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내가 어떤 삶들과 함께 살아가는지 구체적으로 감각하게 되는 순간이.”(91쪽)
지금껏 내가 만나온 훌륭한 인터뷰 글에는 두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 내밀한 이야기가 들린다. 둘째, 그 이야기가 곁에서 듣는 것처럼 생생하게 들린다. 이 책에 담긴 인터뷰 글은 어떤가. 이승기 선생님이 영화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치에코 씨가 어떤 마음으로 일하는지, 김영인 사무국장이 아이들에게 정말로 해주고 싶은 게 무엇인지, 미숙 님에게 바다가 어떤 의미인지, 이재덕 선생님이 왜 ‘집게 칼’에 관한 글을 쓰게 됐는지. 저자가 듣고 쓰지 않았으면 몰랐을 그들의 내밀한 이야기가 들리고, 그것을 말하던 순간 그들이 내보였을 마음의 결까지 생생하게 느껴진다.
비결은 무엇일까. 저자는 “책상으로 돌아와 내가 본 만큼, 내가 이해한 만큼 기사를 쓴다”(85쪽)고 했는데, 신뢰할 만한 태도이기는 하나 근거로는 부족해 보인다. 어쩌면 다음 문장 안에 힌트가 있는지도 모르겠다. 정혜윤 PD·작가는 이 책의 추천사에 “무엇을 포착하고 무엇을 기억하는가는 한 사람의 고유성이자 독자성”이라고 적었다. 그러니까 김달님 작가는 그런, 사람인 듯하다. 믿을 수 있는 말들을 포착하고, 믿고 싶은 말들을 기억하는. 그리하여 우리는 듣지 못하는 평범한 사람들의 특별한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주는, 인생의 번역가.
김달님 작가의 책을 처음 읽을 땐 ‘에세이란 이런 사람이 쓴 이런 글이지’ 감탄하는 정도였다. 지금은 읽을 때마다 놀란다. 깊고 아름다운 문장에 당황한다. 이번 책도 그랬다. 가령 이런 문장. “아이를 살며시 감싸 안았을 땐 따뜻한 눈을 맞는 기분이었다.”(187쪽) 또 이런 문장. “세상이 불쑥 아름다울 때마다 당신이 몇 년만 더 살았으면 좋았을 것이다, 생각합니다.”(271쪽) 전체가 아름다운 산문도 있다. 나는 〈과일 던지는 아이〉를 읽으며 그렇게 느꼈는데, 그 아름다움을 귀로도 듣고 싶어서 하나의 긴 시를 읊듯 소리 내 읽었다.
예쁘고 보기 좋은 문장을 나열했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가 구현한 아름다움은, 훌륭한 문학이 하는 일이 대개 그렇듯 문장이 정확한 인식에 도달하여 우리를 그 순간에 살게 할 때 발생하는 필연적인 사고와 같았다. 그로 인해 나는 너무 귀해 금방이라도 녹아버릴 것 같은 존재를 끌어안는 사람이 되고, 야속하게 아름다운 세상의 풍경을 벌처럼 바라보는 길 위에 선다. 그 순간의 감정은 복잡하지만, 아름답다. 그가 문장으로 구현한 세계는 늘 그랬다. ‘구질구질한데 문득 아름답게 보이는’ 그 세계는 믿고 싶을 만큼 믿음직하고 점점 더 그렇게 되어간다.
지난해 봄 나는 그의 세 번째 산문집을 읽고 쓴 글에 이렇게 적었다. “실패를 예감하며 분연히 다음을 기약했다. (···) 그의 다음 책만큼은. 그 감상은 더 정확히 표현할 수 있기를 바라고 또 바라며.” 그 후로 여러 작품에 기대 글을 썼다. 매번 서툴렀으나 허투루 쓴 적은 없다. 그럴 수 없었다. 그의 다음 책을 만나기 전까지 책을 정확하게 표현하는 방법을 익혀야 했으므로. 조금 과장한다면 이 글을 쓰려고 한 해 넘게 여러 창작물을 읽고 쓰며 살아왔는지도 모른다. 그러는 동안 배운 게 있다. 인간은 언제 자라는가. 간절히 잘하고 싶을 때 자란다. 그 목표가 글이든 인생이든 사랑이든. 슬픔과 상실을 견뎌내는 일이든.
겸연쩍은 말이지만, 읽고 쓰는 나 역시 조금 자란 것 같다. 딱 맞던 바짓단 아래에 발목이 보이게 될 정도는. 그 정도로는 부족해서 이번에도 실패를 예감한다. 괜찮다. 이런 책이라면 다음에도 읽고 쓰고 싶다. 이 의지는 제대로 쓸 수 있다는 호기가 아니라 실패해도 하겠다는 용기에서 나온다는 것을 이제는 조금 안다. 또 한 번 실패하더라도 쓸 것이다. 그러는 나를 보고 싶다. 하냥 쓸데없는 소리만 내는 내가 그의 책을 읽고 쓰는 동안에는 사람과 사랑을 생각하고, 그 순간 미세하게나마 나아지는 기분을 느끼기 때문이다.
인생에 대해 아는 것은 거의 없지만, 살다 보면 예기치 못한 일이 일어나고 불가피한 상실이 다가온다는 사실은 모르지 않는다. 어찌할 수 없는 고통이 들이닥칠 때 저자가 어린 동생을 향해 쓴 이 말을 들려주고 싶다. 아니, 삶에 소질이 부족하다 믿는 분이 있다면 누구라도 들어주기를. “삶은 필연적으로 쓸쓸해지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것도 서서히 받아들이게 될 거야. 그리고 지금의 나처럼 어렴풋이 깨닫는 날이 오겠지. / 이제는 네가 기억하는 것들이 너를 지켜준다는 것을.”(175쪽) 믿는다면 우리는 조금씩 자랄 것이다. “우리가 모르는 행복”(127쪽)이 놓인 방향으로.
(2023. 09. 23.)
*이 글의 제목 ‘믿고 싶은 말들’은 《우리는 조금씩 자란다》의 가제이자, 사전 연재 당시 제목이었음을 밝혀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