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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학민 Oct 11. 2023

선택과 이후의 근심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병 속의 악마〉

선택과 이후의 근심에 관해 이야기해 보자. 《보물섬》과 〈지킬 박사와 하이드〉로 유명한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단편 〈병 속의 악마〉(1891)*에는 소원을 이루어 주는 병이 나온다. (여기서는 ‘악마의 병’이라 부르겠다) 이것만 있으면 근사한 집을 가질 수 있고, 질병도 치료할 수 있다. 파란 요정이 나오는 특정 작품에서와 달리, 소원의 횟수 제한도 없다. 완벽한 도구 같지만 미심쩍은 조건이 있다. 최종 소유자는 죽은 뒤 “지옥에서 영원히 불타는 몸”이 된다는 것. 게다가 악마의 병은 버릴 수 없다. 산값보다 싼 값에 팔아야 한다.

     

겁에 질린 소유자들은 악마의 병을 통해 원하는 것을 얻자마자 폭탄 돌리듯 병을 처분한다. ‘케이웨’도 마찬가지. 집과 돈을 얻은 뒤 서둘러 악마의 병을 판다. 그러나 운명의 상대 ‘코쿠아’를 만나자 다른 선택을 한다. 결혼을 앞두고 자신에게 병(病)이 있음을 알게 된 그는 악마의 병(甁)을 다시 산다. 다가올 불행(지옥행)을 감수하더라도 사랑 곁에 있고 싶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을 선택한 인물은 근심 없이 살 수 있는가. 그렇지 않은 듯하다. 너무 싼 값(1센트)에 병을 사는 바람에 되팔 수 없게 된 케이웨는 고통에 휩싸인다.

     

그러자 이번엔 코쿠아가 선택한다. 케이웨를 위해 몰래 병을 사들인 것이다. 사실을 안 케이웨는 다시, 병을 사려고 한다. 꼬리 물 듯 서로의 불행을 대신 짊어지려는 두 사람 앞에 예외적 인물이 등장한다. 케이웨가 술집에서 만난 ‘갑판장’이다. 악마의 병을 두려워하는 다른 이들과 달리 그는 그것을 기회로 여긴다. 지옥행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지난날 저지른 일들로 인해 어차피 지옥에 갈 거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처음 읽을 때만 해도 나는 그를 어리석은 인물로 생각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사회가 변할수록) 어쩐지 그의 선택이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돈은 여유 또는 자유를 주며 그것은 인생의 시야를 넓히는 일과 다르지 않다. 선택지도 많아진다. 반대로 말하면 돈이 없을 때 여유와 자유는 제한된다. 삶이 고달파진다. 물론 모두에게 해당하는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가진 게 없어라도 더 멀리 보는 사람, 여유 있는 인간이 세상에 존재한다. 그러나 대다수가 그렇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지옥행(죽음 이후)에 대한 근심보다 지금의 삶이 더 고달픈 사람, 벼랑 끝에 내몰린 사람이 내 눈에는 더 자주 보인다. 우연은 아닐 것이다. 그러한 사회에서 살다 보니 갑판장이 이해되기 시작한 것이리라.

     

나도 갑판장 같은 선택을 할 수 있을까. 글쎄. 쉽지 않을 테다. 감당키 어려운 커다란 행운을 얻는다면 그만한 근심도 따라오는 법. 세상에 공짜는 없다. 예고된 불행 앞에서 의연하긴커녕 무르지도 못할 선택을 떠올리며 걱정만 반복할 것 같다. 케이웨가 그랬듯이. 갑판장은 어떨까. 그도 이내 근심에 휩싸이게 되었나. 소설에는 나오지 않으니 상상해 볼 수밖에. 내가 보기에 그는 행복까지는 몰라도 제법 뻔뻔하고 풍요롭게 살아갈 것 같다. 다만 몸과 마음이 쇠약해지는 순간, 그러니까 삶의 끝에 이르면 그도 병을 팔고 싶어 하지 않을까.

     

계속 상상해 보자. 병을 팔기 위해서는 구매자가 필요하다. 다른 이들이 정직한 방식으로 구매자를 찾아다녔다면 갑판장은 직접 찾아오게 할 것 같다. 어떻게? 세상엔 갑판장과 같은 인물이 적지 않다. 여유 또는 자유가 제한된, 지옥보다 삶이 고달픈 벼랑 끝의 인물들. 그들을 한데 모아 게임을 여는 상상을 해 본다. 갑판장 자신이 병을 산 가격(2상팀)보다 낮은 금액(1상팀 또는 그보다 가치가 낮은 외국 화폐)을 게임 참가비로 두고, 우승 시 모든 걸 가질 수 있는 병을 주겠노라 선언하며 시작하는······ 유사한 게임을 어디선가 본 것도 같은데.



(2023. 10. 11.)

(@dltoqur__)


          



*이 글은 《자살 클럽》(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저, 임종기 역, 열린책들, 2014)에 담긴 〈병 속의 악마〉를 바탕으로 썼다.     




http://www.themac.co.kr/news/articleView.html?idxno=3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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