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톤 체호프 단편 〈귀여운 여인〉 & 에마뉘엘 보브 소설 《나의 친구들》
자기 존재의 결정권을 스스로 상대에게 내어준 사랑. 그러니까 ‘자기 없는 사랑’이라고 하면, 나는 ‘올렌카’부터 떠오른다. 안톤 체호프의 단편 〈귀여운 여인〉¹⁾에 등장하는 그는 소설에서 여러 인물을 만나 사랑하는데, 사랑하는 상대에 따라 자기 존재가 변한다. 상대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그러다가 그 대상이 사라지면 혼자서는 존재할 수 없다는 듯 별안간 생기를 잃고 만다. 지극히 헌신적이고 때로는 아름다워 보이는 올렌카의 사랑은 그러나 운전대를 내준 채 조수석에만 앉는 사랑이다. ‘나’는 없고 ‘너’만 있는 그 사랑을 나는 이해할 수 없다.
최근 읽은 소설에서도 ‘자기 없는 사랑’에 빠진 인물을 만났다. 에마뉘엘 보브가 쓴 《나의 친구들》²⁾의 주인공 ‘빅토르 바통’. 곁에 둘 누군가를 만나야만 자기 삶이 시작된다고 믿는 바통은 절대적으로 의존할 대상을 찾고 있다. 그 대상을 친구라고 부르며 갈급하지만, 누구를 만나도 관계를 지속하지 못한다. 미숙함을 넘어 위험해 보일 만한 망상으로 타인을 대하기 때문이다. 밝혀두자면 나는 바통의 내면과 행동을 읽는 것조차 힘들었다. 그가 ‘리카즈’의 딸을 만나기 위해 파리 음악원에 찾아가는 대목에서는 거의 괴로울 지경이었다. 나는 도저히, 그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이렇게 끝인가. 그런 거라면 이 글은 물론 소설조차도 무의미해질 것이다. 다행히 우리는 두 개의 눈으로 타인을 바라볼 수 있다. 하나는 ‘나’ 자신의 상태에서, 다른 하나는 ‘사회적 존재’로서. 전자의 관점에서는 ‘나’의 경험, 성정, 가치관을 바탕으로 타인을 판단한다. ‘나’와 같으면 공감하고 다르면 이상하게 여긴다. 후자 역시 개인의 관점이므로 앞의 세 요소로 타인을 바라보지만, 판단 결과가 달라지기도 한다. 사회적 맥락에서 타인을 투과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던 두 인물을 이번엔 ‘사회적 존재’로 바라보려고 한다.
사랑 말고 다른 것은 할 게 없어 보이는 올렌카는, 어쩌면 차별받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 사회에는 태어남과 동시에 선택의 자유가 제약되는 사람이 있다. 과거에도 있었고, 여전히 그렇다. 그러한 상황에 놓일 때 모든 걸 포기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할 수 있는 일에 매진하는 이도 있다. 올렌카는 후자인 듯하다. 자신의 모든 에너지를 사랑에 쏟는다. 단순히 자기를 희생하는 게 아니라 상대로 체화한 채 이전과는 다른, 다양한 삶을 산다. 만일 그가 선택의 자유를 가졌다더라면 스스로 운전대를 잡고 더 멀리 나아갔으리라. 이 관점 안에서 그는 차별의 피해자이다.
바통은 전쟁의 포화에서 살아남은 상이군인이다. 몸뿐만 아니라 마음마저 다친 듯하다. 왜 그런가. 첫째, 스스로 이상하다고 여길 만큼 사고와 행동이 불안정하다. 둘째, 자기보다 불행한 사람을 곁에 두고 우월감을 느끼려 한다. 셋째, 무한히 신뢰할 수 있는, 등을 맞댈 전우(친구)를 여전히 찾아 헤맨다. 그런 그에게 지금 당장 필요한 건 친구가 아니라 치료인지도 모른다. 사회가 그에게 총을 쥐게 하고 전쟁에서 적을 섬멸하는 기술을 훈련 시켰다면, 이제는 아픈 곳을 치료하고 사회화 훈련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할 것이다. 그는 전쟁의 피해자이기 때문이다.
소설적 체험을 말해보았지만, 현실에서도 의존 성향을 지닌 인물을 종종 만난다. 강한 의존이 자신에게나 상대에게나 이롭지 않음을 모르는 이는 없는 듯했다. 이상한 일은 아닐 것이다. 앎은 쉽게 삶이 되지 않으므로. 타인을 하나의 눈으로만 보며 이해하지 못하는 나도, 나의 몰이해를 스스로 비난하기 싫어서 상대를 탓하는 것도 같은 이유 때문이리라. 타인과 나를 비난하지 않기 위해 염두에 두는 것이 있다. 스스로 원한 적 없고 당장 어쩔 수도 없는 개인의 특질을 비난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부정확한 일이며 윤리적으로 부당한 일이라는 것. 문학이 가르쳐 준 것 중에는 이런 것도 있다.
(2023. 10. 18.)
1)《체호프 단편선》(안톤 체호프 저, 김학수 역, 문예출판사, 2006)에 수록.
2)《나의 친구들》(에마뉘엘 보브 저, 최정은 역, 빛소굴, 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