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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학민 Feb 01. 2024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음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 & 《황야》

*이 글에는 작품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극한의 상황에 놓이면 인간의 본성이 나온다는 말이 있다. 과연 그런가. 안온한 상태에서는 친절하던 사람이 급박한 상황이 오자 냉혹해졌다고 가정해 보자. 이때 본성을 운운하며 이전 모습을 부정하는 건 온당한가. 한 인간의 생에서 극한의 상황은 평범한 일상에 비해 극히 적은 지표일 텐데, 일면으로 전면을 판단하는 건 부당한 일 아닌가.

     

상황이 좋지 않으면 모든 행동이 용인된다고 주장하려는 건 당연히 아니다. 극한의 상황에서 돌변하여 타인에게 위해를 가하는 순간 이전 선행이 무색해진다는 걸 모르지 않는다. 상황은 인간을 변화시킬 수 있음. 그 가능성에 동의할 뿐이다. 물론 어떠한 상황이든 일관된 태도를 보이는 사람도 있겠다. 그러면 누구라도 ‘나빠지기 쉬운’ 상황에서는 어떨까. 일테면 세상에 멸망이 찾아온다면?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2023)와 《황야》(2024)는 그러한 세상을 배경으로 한 작품들인데, 장르, 사건, 인물, 메시지 등이 확연히 다르므로 두 작품을 한데 묶어 설명하기는 어렵다. 다만 같은 원작(웹툰 ‘유쾌한 왕따’ 2부 ‘유쾌한 이웃’)을 기초로 한다는 점. 멸망의 원인이 대지진이라는 점. 그 가운데 무너지지 않은 아파트 한 채가 주요 배경이라는 점이 같으므로 두 세상에서 생존한 인물들의 변화는 살펴볼 수 있겠다.



《콘크리트 유토피아》(2023)

     

먼저 《콘크리트 유토피아》 속 세 인물을 보자. ‘명화’(박보영)는 변하지 않은 인물이다. 억압된 현실에서도 외부인을 도울 정도로 상황과 무관하게 선량한 태도와 신념을 유지한다. 그의 반려인 ‘민성’(박서준)은 얼마간 변한다. 가족(명화와 자신)의 생존을 위해 권력에 굴복하고 폭력에 가담한다. 다만 죽음을 앞두고 되돌아온다는 점에서 그 역시 변하지 않은 부류, 인간의 존엄을 잃지 않은 인물로 볼 수 있으리라.

     

반면 ‘영탁’(으로 위장한 ‘모세범’. 여기서는 ‘영탁’으로 표기, 이병헌)은 악화되는 인물이다. 다만 선인이 악인이 되는 과정 같은 건 없다. 작은 신음이 비명으로 커지듯 강도가 세질 뿐. 아파트 대표가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폭력적인 행동을 보이던 그는 급기야 자신의 욕망(아파트를 지키는 것)에 방해가 되는 인물이 등장하자 살인도 서슴지 않는다. 그렇게 점점 광기에 사로잡힌다.



《황야》(넷플릭스, 2024)


《황야》에는 딸을 잃은 두 인물이 나온다. 먼저 ‘남산’(마동석). 딸을 떠올리게 하는 ‘수나’(노정의)가 납치되자 남산은 구출에 나선다. 무력을 통해 선량한 사람을 보호하는 해당 배우의 이전 출연작(일테면 ‘범죄도시’ 시리즈)과 마찬가지로 악을 처단하며 나아간다. 그 과정이 과격해 보여도 의심할 필요는 없다. 마동석 또는 남산이 휘두르는 주먹은 작품 설정상 ‘정의의 주먹’에 가깝고 그것은 이 영화에서도 줄곧 변함없기 때문이다.

     

‘기수’(이희준) 역시 딸을 잃은 인물이지만, 남산과 달리 점점 더 나빠지는 쪽에 속한다. 멸망한 세상에 처음 등장할 때부터 이미 미쳐 있는 듯 보이던 그는 아파트라는 작은 사회를 독재하며 억압적인 실험을 통해 인간을 도구로 쓰거나 괴물로 만든다. 존엄이나 윤리를 잊은 지는 한참이나 지난 듯하다. 광인 그 자체가 되어버린 것이다.

     

정리하자면 다섯 인물은 그대로(명화, 남산)거나 혼란을 겪다가 돌아오거나(민성) 더 나빠(영탁, 기수)진다. 그들만으로는 극한 속 인간의 유의미한 변화를 발견하기 어렵다는 말인데, 관점에 따라서는 영탁과 기수의 경우를 변화로 바라볼 수도 있겠다. 다만 두 인물이 점점 더 나빠지다 결국 광기에 휩싸인 괴물이 된 이유를 따져 보면 결론은 달라질 수밖에. 그 이유가 단순히 세상의 멸망 때문이 아니기 때문이다.

     

세상이 멸망하기 전. 영탁은 사기꾼을 응징하다가 우발적인 살인을 저지른다. 그리고 기수는 딸을 살리기 위해 비윤리적 실험을 감행하는데 그 과정에는 많은 죽음이 있었다. 그러니까 순서를 바로잡자. 그들의 변화는 세상의 멸망보다 먼저 시작됐다. 스스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을 잃는 순간(영탁은 아파트를 사기 위해 모은 돈을, 기수는 딸을 잃었다) 두 인물은 ‘나’(자아 또는 존엄)의 멸망을 겪었고, 이후 대지진으로 세상이 무너지자 끝내 괴물이 된 것이리라.

     

그들처럼 범죄나 악행을 저지른 이에게 서사를 부여하는 일은 위험하다. 그럴 만하다는 공감이나 면죄부를 줄 수 있기 때문이다. 현실에서는 그러하나 작품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누구나 몇 번쯤, 작품을 보며 배우거나 성장한 적 있을 것이다. 일반적인 일이다. 작품을 본다는 건 체험하는 일이며, 그를 통해 인식과 상상의 범위를 확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작품의 유일한 기능은 아니지만, 유용한 기능 중 하나임은 분명하다.

     

두 영화를 통해 나는 두 인간의 멸망을 보았다. ‘나’의 멸망과 ‘세상’의 멸망은 비슷해 보이지만 같지 않음도 배웠다. 그중 인간을 진정으로 변화시키는 사건은 나의 멸망인 듯하다. 세상의 멸망은 나를 변화시킬 수도 있지만, 나의 멸망은 반드시 나를 변화시킨다는 점에서. 그리고 인간으로 살아남는 데 가장 중요한 요소가 무엇인지도 얼핏 알게 되었다. 그것을 단순히 ‘집’과 ‘가정’이라 말하기엔 부족해 보인다. ‘Home’과 ‘House’의 의미를 합친 ‘일상의 터전’쯤이라고 해야 할까.

     

이제 작품 밖 우리의 세상을 본다. 이곳은 멸망을 안심해도 되는가. 멸망하지 않은 세상을 둘러보자. 평온해 보이는 세상 곳곳에 가족을 잃거나 전세 사기를 당하는 사람들의 사연이 놓여 있다.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없다고 믿을만한 ‘나의 멸망’이 모여 평온을 이룬 곳. 이곳이 우리의 세상이라면 이런 결론도 가능하리라. 멸망은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음.


(2024. 02. 01.)

(@dltoqur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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