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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학민 Feb 17. 2024

그저 다정하게 들어주렴

헤르만 헤세 시집 《슬퍼하지 말아요, 곧 밤이 옵니다》

소설은 다른 인생을 살아보기 위해 읽는다.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되어 겪어 본 적 없는 시간을 체험해 보는 것이다. 그를 통해 나의 외연이 넓어지길 기대하지만, 기대가 충족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저마다 사정이 있다는 것. 매번 그 정도만 간신히 배운다. 시는 어떤가. 체험보다는 무의식에 남겨두려고 읽는다. 즉 읽기 자체가 목적이며 가능한 한 오래 기억하길 기대한다. 살다 보면 실현된 예언처럼 내가 겪는 순간이 시가 노래한 내용과 일치할 때가 있는데 그제야 비로소 한 편의 시를 읽어낸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이처럼 ‘시를 사는 순간’을 겪으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시를 기억해야 한다. 하나 나는 기억력이 좋지 않아서 자꾸 잊는다. 문신을 새기듯 영혼에 시를 남겨두고 싶은데 쉽지 않다. 그렇다고 억지로 암기할 바에야 차라리 옮겨 적는다. 종종 시에 기대 잡문을 쓰는 데에도 그러한 이유가 얼마간 있으리라. 다른 사람들은 어떨까? 꼭 기억하기 위해서는 아닐지라도 기록하는 사람들이 있다. 눈으로 한 번, 손으로 또 한 번. 두 번 읽으며 필사하는 사람들. 그들이 남긴 흔적을 볼 때마다 가득 찬 물잔을 옮기는 조심스러운 손이 떠오른다.

     

함부로 옮기면 흘러넘치고, 그러면 무언가 훼손될 것 같아서 정성을 기울이는 분들에게 도움을 주는 책이 있다. 시가 적힌 페이지 옆에 그 시를 따라 쓰도록 여백을 둔 책. 흔히 필사 시집이나 시 필사 집으로 불리는 책. 오늘은 그중 독일의 대문호 헤르만 헤세의 시가 담긴 《슬퍼하지 말아요, 곧 밤이 옵니다》(유영미 역, 나무생각, 2024)을 펼쳐 본다. ‘시인이 아니면 아무것도 되지 않겠다’ 결심했던 헤세에 관해서는 긴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대신 책에 담긴 두 번째 시를 함께 보자.


          

복숭아꽃 온통 흐드러졌다
꽃이라고 다 열매를 맺지는 않는다
파란 하늘, 흘러가는 구름들 사이로
흐드러진 꽃들이 장밋빛 거품처럼
화사하게 빛난다     

생각도 꽃들처럼 피어난다
하루에도 백 번씩 피어난다
피어나라! 그냥 그렇게 흘러가라!
쓸모 따위는 따지지 마라     

놀기도 해야 하고
천진난만하게 웃기도 해야 하리니
그다지 쓸모 없는 꽃도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세상은 좁디좁아져
사는 재미가 없으리라     

〈흐드러진 꽃들〉 전문    

      


화자의 진심은 다음 시구에 놓여 있으리라. ‘그다지 쓸모 없는 꽃도 있어야 한다.’ 낯선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시가 말하는 건 ‘무의미의 의미’에 가까우며 우리는 그것을 모르지 않으니까. 꽃이 핀다고 항상 열매를 맺는 게 아니듯 인생 안에는 무의미한 순간도 있으며 그 순간도 ‘사는 재미’를 주는 인생의 부분임을 안다. 다만 궁금한 것. 훗날 이 시가 되돌아올 때. 그러니까 지나온 시간이 ‘흐드러지게’ 몰려오는 순간에도 이 시를 긍정할 수 있을까? 혹 열매 맺지 못함을 아쉬워하거나 지고 만 꽃을 그리워하지는 않을까?

     

마침 이 시집 안에는 그런 순간에 함께 떠올려볼 시도 수록돼 있다. “아주 오래전 젊을 적부터 / 내 마음을 움직이고 기쁘게 했던 / 모든 덧없는 것들, / 사색과 몽환 속에 / 기도와 구애와 비탄 속에 / 다채롭게 흩어져 있던 것들, / 너는 이 시집에서 그것들을 되찾게 될 것이다 / 바람직한 것인지, 쓸모 있는 것인지 / 너무 진지하게 묻지는 말고 / 그저 이 오래된 노래들을 다정하게 들어주렴” 〈시집을 손에 든 친구에게〉의 전반부인데, 아마도 자주 떠올리게 될 것 같다. 시를 읽을 때마다 또는 유난히 길었던 하루 끝에서.


(2024. 02. 16.)

(@dltoqur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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