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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학민 Mar 08. 2024

그렇게 이야기는 삶이 된다

조해진 소설 《로기완을 만났다》

죄책감에 시달리는 삶은 위태롭다. 나는 살아도 되는가. 의문이 들기 시작하면 삶의 자격을 잃은 듯 한없이 흔들리고 작아지기 때문이다. 우리의 내면에 이 같은 혼돈이 일어날 때 비슷한 사정을 겪은 타인의 이야기는 꽤 도움이 된다. 조해진 작가의 장편소설 《로기완을 만났다》(창비, 2011)의 화자인 ‘나’ 역시 본능적으로 그 사실을 알고 있는 듯하다. 그의 죄책감은 한 소녀에게 느낀 연민으로부터 시작된다. 실시간 ARS로 후원받는 다큐멘터리 방송의 작가로 일하던 ‘나’는 출연 예정자인 ‘윤주’를 만난다. 어려운 형편에서 홀로 살아가던 ‘윤주’는 뺨에 난 혹을 제거하는 수술을 앞둔 열일곱 소녀이다.

     

‘나’는 ‘윤주’에게 돌아갈 후원금을 늘리기 위해 추석 연휴로 방송 일정을 연기한다. 그로 인해 수술 날짜도 미뤄진다. 삼 개월 뒤. ‘윤주’의 혹이 악성 종양으로 바뀌었다는 “유감”스러운 소식이 전해진다. 연민으로 행한 선의가 커다란 죄책감으로 변해 다가오자 ‘나’는 도망치듯 현실을 등진다. 이제 어디로 가야 하는가. ‘나’는 시사주간지에서 읽은 ‘로기완’의 인터뷰 기사를 떠올린다. 그의 눈길을 사로잡은 건 기사에 실린 다음의 고백이었다. “어머니는 저 때문에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살아야 했습니다.” 그 한 줄을 간신히 부여잡은 ‘나’는 서울을 떠나 브뤼셀로 향한다. 


‘박’에게서 ‘로기완’의 일기와 자술서를 건네받은 ‘나’는 ‘로기완’이 머물던 그곳에서 그처럼 먹고, 자고, 걸으며 지나간 타인의 시간을 겪어보려 애쓴다. 물론 ‘나’는 모르지 않았다. “내가 지금 알 수 있는 것은 없다. 타인의 고통이란 실체를 모르기에 짐작만 할 수 있는, 늘 결핍된 대상이다. (…) 나는 영원히 정확하게 알아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불가능을 인정하기 위해 지독히 고독한 이방인을 이야기 속으로 데려온 것은 아니리라. 오롯이 겪을 수 없으니 온전히 이해하기 어렵지만, 소설은 고통 속에서도 살아가기를 포기하지 않은 한 사람의 분투를 온몸으로 읽어낼 때, 읽은 이의 삶이 달라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서서히, ‘나’는 내면의 변화를 겪는다. 죄책감에 휩싸여 살아가는 일조차 주저하던 ‘나’는 죄책감을 안고서, 아니 죄책감으로 인해서 살아가기로 결심한 ‘로기완’을 겪으며 자신을, 살아 있는 자신을 긍정하게 된다. 결말에서 ‘나’는 ‘로기완’을 만나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려고 한다. 왜 그래야 했을까. 이유는 이러하다. “타인과의 만남이 의미가 있으려면 어떤 식으로든 서로의 삶 속으로 개입되는 순간이 있어야 할 것이다. (…) 그러니 이제 나는 로에게도 나를, 그 자신이 개입된 내 인생을 보여줘야 한다. 로기완이 내 삶으로 걸어들어온 거리만큼 나 역시 그에게 다가가야 하는 것이다.”   

  

문학을 통해 타인의 이야기(소설)를 읽은 사람의 할 일도 그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야기를 통해 얼마간 내면의 변화를 겪었다면 이제 저마다 자신의 이야기를 해야 하리라. 그 대상이 소설의 등장인물이나 그것을 쓴 작가일 필요는 없겠다. 우리에게는 책을 덮으면 들이닥칠 현실이 있으며 그 안에는 내가 공감하고, 나를 공감할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다. 내가 전한 이야기는 타인의 이야기에 스며들고, 타인의 이야기가 된 그 이야기는 서서히 원출처가 흐려지며 또 다른 타인에게 녹아들 것이다. 역으로도 순환된다. 그렇게 이야기는 삶이 된다. 때로 살아갈 힘이 된다. 이 소설을 읽고서 나는 그 사실을 믿게 되었다.

     

얼마 전 이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가 공개됐다. 다만 영화 이야기를 덧붙이는 건 망설여진다. 특별한 문제는 없다. 그저 ‘너무’ 다른 작품 같아서다. 차이를 말하기보다는 제목만 살펴보자. 소설은 《로기완을 만났다》, 영화는 《로기완》(2024)이다. 나는 소설을 통해 ‘로기완’의 고독과 불안은 물론, 그가 만난 은인들도 함께 만났다. 소설의 결말에 이르러 완전한 이름으로 기술된 ‘박윤철’과 모든 이야기를 전해준 ‘나’와 그런 ‘나’에게 “충분하다”고 말해준 ‘윤주’도 만났다. 그러나 영화에서는 로기완의 사정을 닮은, 익숙한 멜로 영화 주인공을 보았을 뿐 나를 울리고 위무해 준 ‘로기완’은 끝내 만나지 못했다.


(2024. 03. 08.)

(@dltoqur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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